보편 공의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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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1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는 서기 381년 테오도시우스 1세에 의해 소집되었고, 트라키아와 이집트와 소아시아의 주교 150명 내지 180명이 성 에이레네 성당에 모여 참석했다. 이 공의회는 “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의 본체를 비슷하게 본체를 지니셨지 같은 본체는 아니다”라고 가르친 아리우스주의의 가르침을 재차 단죄했으며, 이교 숭배를 금하는 중요한 법령을 추가로 제정하고 장차 모든 가톨릭과 정교회 신자들이 암송하게 될 니케아 신조의 용어를 명확히 했다. 이 공의회는 “성령께서는 성자에 의해 창조되었다”라고 가르친 마체도니우스 주교를 비난했다. 이 결과, 성삼위일체의 가르침이 승리를 거두었다. 이 공의회는 니케아 신앙고백 나머지 5개의 조항과 7개의 규범을 채택했다.또한 테오도시우스 1세는 콘스탄티노플과 예루살렘을, 사도들이 창건한 로마,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와 같은 총대주교의 위치로 승격시킬 것을 주장했다. 예루살렘은 그리스도가 설교 하다 십자가형을 받은 곳으로 헬레나에 의해 발견된 영예로운 장소라는 점을 이유로 들었고, 콘스탄티노플은 황제가 거주하는 로마 제국의 수도이기 때문이라는 점을 근거로 내세웠다. 그러나 콘스탄티노플을 승격시키는 문제는 당연히 로마와 쉽게 합의에 이르지 못했고, 결국 해당 공의회에서는 실패했다.
공의회 전문은 여기에서 영문으로 볼 수 있다.
2. 규범
- 니케아 신경: 니케아 신경은 견고하게 준수되어야 한다. 이를 준수하지 않는 자는 파문된다. (규범1)
- 여행하는 자: 여행하는 자는 그 지역 교회에 성직자의 서품이나 승좌로 인한 어떤 혼란도 일으켜서는 안 된다. 이교도의 나라에 있는 교회에서라도 교부의 전통을 지켜야 한다. (규범2)
- 주교의 서열: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주교는 명예상의 특권으로 로마의 주교 다음을 누린다." (규범3)[1]
[1]
원문의 언급은 "왜냐하면 새로운 로마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주교는 명예상의 특권으로 로마의 주교 다음을 누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제국의 경제력과 정치력과 군사력은 모조리 동방에 몰려있는 상태였기에, 규범상의 서열과 실제 정치적 발언권이 따로 노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는 훗날 수위권 논쟁의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사실 제정 초기의 로마만 하더라도, 이미 경제력, 문화적 발전은 그리스-오리엔트 지역이 짱먹고 있었는데, 본국 이탈리아와 수도 로마가 정치적-군사적 중심지라는 권위 덕에 밸런스를 땜빵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가 그리스 지역으로 천도하면서, 정치-군사-경제-문화가 동방에 몰리는 밸런스 붕괴가 벌어진 것. 다만 이 공의회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 주교의 위상이 수직상승하면서 가장 당혹한 쪽은 애초부터 가장 서열이 높던 로마가 아니라, 제국의 제2도시, 제3도시로서 동방 신학을 주도하던
알렉산드리아와
안티오키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