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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이라크 내전

제1차 이라크 내전
Iraqi Civil War
이라크 전쟁의 일부
기간
2006년 2월 22일~ 2008년 5월 15일[1]
장소
[[틀:깃발|]][[틀:깃발|]][[이라크|]]
원인
수니파와 시아파의 종파 갈등
교전 국가 및 세력
[[틀:깃발|]][[틀:깃발|]][[이라크|]]


[[틀:깃발|]][[틀:깃발|]][[페슈메르가|]]
[[틀:깃발|]][[틀:깃발|]][[틀:깃발|]] 마흐디군
[[틀:깃발|]][[틀:깃발|]][[유일신과 성전|]]
[[틀:깃발|]][[틀:깃발|]][[알카에다|]]
[[틀:깃발|
기 명칭
이라크 바트당
]][[틀:깃발|
깃발 명칭
이라크 바트당
]][[바트당(이라크)|
바트당(이라크)
이라크 바트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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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관
[[틀:깃발|]][[틀:깃발|]][[잘랄 탈라바니|]][[틀:깃발|]][[틀:깃발|]][[잘랄 탈라바니|]]
[[틀:깃발|]][[틀:깃발|]][[마수드 바르자니|]][[틀:깃발|]][[틀:깃발|]][[마수드 바르자니|
마수드 바르자니
]]
[[틀:깃발|]][[틀:깃발|]][[틀:깃발|]] 이브라힘 알자파리
[[틀:깃발|]][[틀:깃발|]][[틀:깃발|]] 토미 프랭크스
[[틀:깃발|]][[틀:깃발|]][[틀:깃발|]] 무크타다 알사드르
[[틀:깃발|]][[틀:깃발|]][[틀:깃발|]] 아크람 알 카비
[[틀:깃발|]][[틀:깃발|]][[틀:깃발|]] 카이스 카잘리
[[틀:깃발|]][[틀:깃발|]][[틀:깃발|]] 아부 오마르 알바그다디
[[틀:깃발|]][[틀:깃발|]][[아부 무사브 알자르카위|
아부 무사브 알자르카위
]] †
[[틀:깃발|]][[틀:깃발|]][[사담 후세인|]] †[2]
[[틀:깃발|]][[틀:깃발|]][[이자트 이브라힘 알 두리|
이자트 이브라힘 알 두리
]]
[[틀:깃발|]][[틀:깃발|]][[틀:깃발|]] 모하메드 유니스 알 아메드
결과
1. 개요
1.1. 발단1.2. 수니파-시아파 갈등 격화 (2006~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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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1. 발단

1, 2차 팔루자 전투 누리 알 말리키의 독재 등등 부시행정부가 낙관론에 젖어있는 상황에서도 수니파와 시아파의 갈등은 물밑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분쟁이 표면으로 격화된 것은 2006년의 시아파의 성지 알아스카리 사원 폭탄 테러가 원인이다.

알 아스카리 사원이 시아파에게 어떤 의미인지는 시아파의 주류를 차지하고 있는 12이맘파에 대해 알아야 한다. 간략하게 말하자면 12이맘파의 정통 이맘에 대한 해석은, 12대 이맘이였던 알 마흐디가 알라의 손에 거둬졌으며, 훗날 인류를 구원하러 다시 올 예정이라는 것으로 기독교의 메시아 사상과 일치하는 부분이 있다.

알 아스카리 사원은 그 알 마흐디의 아버지이자 11대 이맘이었던 하산의 유해가 묻힌 곳으로, 기독교 식으로 말하자면 성모 마리아나 요셉이 묻힌 곳이나 다름없다. 즉, 예루살렘 급은 못되더라도 최소한 베들레햄이나 바티칸 급 정도는 되는 곳.

2006년 2월과 6월, 2차례에 걸친 폭탄테러로 사원은 크게 파괴되었으며, 중심부인 황금 돔 또한 완전히 붕괴하였다. 오늘날 이 사건은 시아파를 자극하여 수니파를 단결시키기 위한 알카에다의 공작으로 여겨지며, 알카에다의 의도대로 1차 공격 이후 시아파 민병대에 의한 대대적인 보복학살이 벌어졌다. 이라크 주둔 다국적군 사령부에 의하면 1차 공격인 2월 22일 후 28일인 1주일간 무려 300~400명이 살해되었다고 하며, 이라크 사상자 프로젝트는 같은 기간 1000여 명이 살해당했다고 추정했다. 사상자의 수를 제일 높게 잡은 것은 워싱턴포스트로, 1차 공격 후 4일 만에 사망자만 1300여 명에 달하며, 부상자나 여타 약탈, 강간 피해자는 셀 수 조차 없다고 발표했다.

이 와중에 사태를 악화시킨 것은 공식적인 이라크 정부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2005년 12월에 치러진 총선 이후, 선거 결과가 1월에 발표되었지만 이라크 특유의 시아파-쿠르드-수니파 간의 파벌에 따른 부처 나눠먹기와 막후 협상에 대한 문제로 수상이 지명되지 않은 상태였고 물론 장관직 또한 임명된 것이 하나도 없었다. 이 상황에서 시아파 행정부는 시아파 민병대의 보복 활동을 방관하거나, 심지어는 적극적으로 지원하면서 사태를 크게 악화시켰다.

이 와중에 막후 협상 또한 지지부진하여 알말리키가 총리로 지명되고 내각이 들어선 것은 무려 5월 20일로 1차 공격 발생으로부터 세 달이 지난 후였고, 이들이 행정부를 완전히 장악하기 전인 6월 초 2차 공격으로 마침내 사원의 중심부가 완전히 붕괴하면서 사실상 수니파와 시아파 간의 돌이킬 수 없는 내전이 발발하였다.

1.2. 수니파-시아파 갈등 격화 (2006~2008)

파일:사마라 이란.jpg
수니파 극단주의자들의 테러로 파괴된 사마라의 알-아스카리 (이마민) 성지[3]

2003년부터 2006년까지의 반군 활동은 주로 이라크 다국적군을 겨냥하는 방향으로 나갔으나, 이 당시 이라크 선거의 여파로 수니, 시아파 계열 민병대가 서로에게 폭탄 테러와 총질을 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렇다고 보안군과 다국적군에게 총질을 안 한 것도 아니었다.

얼핏 봐서는 미국이라는 공동의 적을 놓고 서로의 지지기반들을 깎아먹는 제살까먹기식 치킨 게임으로 보이기 쉽지만, 이로 인한 폭력사태는 과거 미군을 상대할 때 이상으로 늘어나 골치를 썩게 만든다. 이때부터 이들이 미군을 직접 공격하기보다 저항할 능력이 없는 ' 배교자'들을 공격하는 것이 테러 효과가 뛰어나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간단히 예시를 들어, 지하디스트들이 IED 하나로 테러를 한다 쳤을때, 만약 미군을 상대로 폭탄을 터트린다면 상당수는 이미 미군에 의해 제조, 설치과정 중에 걸려 실패하거나, 성공적으로 설치했어도 폭탄제거 작전 중에 발견되면 폭발도 못 해보고 해체당할 수도 있고, 설령 폭발에 성공해도 미군 몇 명을 부상입히는 것에 그치게 되며, 미군 병사를 죽였다면 그건 운이 좋은 거다. 미군의 IED 피해는 그만한 낮은 성공률에도 불구하고 폭탄 테러를 수없이 많이 시도한 결과에 가깝다. 반면 똑같은 폭탄을 터트려도 저항능력이 없다시피한 민간인들을 상대로 한다면 더 적은 시도로 더 많은 인원을 살상할 수 있고, 욕은 오히려 현장의 치안을 안정시켜야하는 다국적군이 먹게 된다. 그야말로 일석이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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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1월 17일에 끝났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2] 태스크 포스 121에 체포돼 교수형으로 사망 [3] 열두이맘파의 10,11대 이맘이 잠들어있는 곳이다 [4] 심지어 경찰이나 대테러 부대를 극단주의자들로 채워넣은 정황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