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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발해 문왕의 4녀 정효공주의 무덤에 그려져 있는 벽화로, 당나라의 문화를 받아들였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2. 소개
정효공주 묘의 벽화는 묘실(墓室:널방) 동·서·북 세 벽과 연도(羨道)[널길] 안에 그려져 있다. 모두 12인의 인물 벽화이다. 인물들은 그 직분에 따라 무사, 시위, 악기, 시종, 내시 등의 부류로 나눌 수 있다.연도 뒤편에는 무사 2명이 그려져 있는데 동쪽과 서쪽에 마주하고 있다. 그들은 붉은 술을 단 투구를 쓰고 고기비늘 무늬 갑옷을 걸치고 왼쪽 허리에 검을 차고, 오른손으로 철퇴를 잡아 어깨에 메고 주변을 경계하는 모습을 하고 있다.
묘실 동쪽 벽에는 4명의 인물이 그려져 있으며 머리에 붉은 머리띠를 두르거나 두 날개를 교차시킨 복두(幞頭)를 썼다. 손에는 철퇴, 구리거울, 봇짐 등을 들고 있으며 첫 번째 철퇴를 든 사람은 공주를 경호하는 시위이고 나머지 세 사람은 공주의 시중을 드는 내시들이다.
서쪽 벽에도 네 명의 인물이 그려져 있는데, 첫 번째 사람은 호위병이고 나머지 세 명은 공주의 시중을 드는 악사들이다. 북쪽에는 활을 메고, 화개(華蓋)로 보이는 양산을 들고 있는 두 명의 시종이 묘사되어 있다.
정효공주묘 벽화는 벽돌 위에 회칠을 하고 그렸다는 점과 시위도[2]를 중심 제재로 하였다는 점에서 당나라 고분벽화와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무덤 비석 내용에 당나라로부터 수입한 중국의 각종 역사서와 유교 경전들도 인용되어 있어 발해의 유교 수준이 불교처럼 상당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무덤의 구조나 사신도, 병풍, 시녀 등이 등장하지 않는 점 등에서 중국의 벽화들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 이 시기 당나라 고문벽화가 동아시아적 보편성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지만 정효공주묘의 벽화에서 발해인들은 그 형식을 독자적으로 소화해 표현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3]
3. 그린 방법
예리한 긁개 같은 것으로 밑그림을 그린 위에 적ㆍ청ㆍ녹ㆍ흑ㆍ백색[4]의 색깔을 칠하고 다시 먹선으로 윤곽을 명료하게 나타내는 방법으로 그려졌다.4. 여담
- 정혜공주묘와 함께 공무원 시험에 자주 출제되는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