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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30 18:56:46

정헌태

파일:정헌태.jpg
<colbgcolor=#0047a0> 출생 1902년 12월 22일
충청남도 서산군 인지면 화수리
사망 1940년 6월 28일
충청남도 서산군
상훈 건국훈장 독립장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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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200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정헌태는 1902년 12월 22일 충청남도 서산군 인지면 화수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고향에서 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1917년 경성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 1919년 경성에서 3.1 운동이 발발하자 만세시위에 참가한 뒤 중국 지린성 연길로 망명했다.

1919년 음력 11월 대한의군부(大韓義軍府) 간도전위대 소속 모연대장 이제안(李濟安)의 지휘 아래 북간도 지방에서 독립운동자금 및 동지규합을 위해 잠시 활동하다가, 1921년 국내로 잠입하여 모금 운동을 전개하다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개성의 광진학교(廣進學校)에서 교사로 근무하던 그는 1926년 3월 일본으로 유학하여 도쿄의 니혼대학 전문부 사회과에 다녔다. 일본 유학 중 1926년 6월 일본 도쿄에서 조선유학생연합웅변회(朝鮮留學生聯合雄辯會)에 참가하여 한국인의 해방을 호소하는 등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1927년 5월 신간회 토쿄지회 간사로 일했으며, 니혼대학 3학년을 중퇴하고 국내로 돌아온 뒤 12월 신간회 경성지회의 조직부 상무간사 등에 선임되어 각 지회 주최의 강연회에 연사로 참가하여 민지계발에 힘썼다. 정헌태는 신간회에서 경기 광주,경남 밀양등지를 돌며 일제강점 하에 있는 조국의 현실과 향후 민족이 나아갈 바 등에 대해 대중강연을 수행했다.

그는 1928년 조선공산당 조직이 와해되자 이를 재건하기 위해 이준열(李駿烈) 등과 함께 1929년 1월 조선공산당 잠정 조직을 결성하였다. 그리고 동년 3월 당의 잠정조직을 조선공산당재조직준비위원회로 개칭하고 야체이카·고려공산청년회·조선피압박동맹회 등의 조직에 착수하였다. 이때 그는 고려공산청년회 조직부 임무를 맡았다.

그는 동지 포섭에 힘을 쏟아 민병회(閔丙會)를 비롯하여 고학당 출신 정관진·김태래(金泰來)·김성기(金成琦)·박치우(朴治宇)· 전진한 등을 입회시키고 동년 3월 하순 고려공산청년회의 부서를 정하였다. 또한 1923년 이준열 등과 함께 고학당 내에 조직한 조선학생혁명당(朝鮮學生革命黨)을 조선학생전위동맹으로 확대 개편하면서 고려공산청년회의 조직 기반을 강화시켜 나갔다. 이러한 학생전위동맹은 고려공산청년회 행동 조직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으며, 서울지역 각 학교에 독서회를 설치하며 학생운동을 통할 지도하는 조직체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안상훈(安相勳) 등과 함께 열성자대회(熱誠者大會)를 추진하던 중 1929년 6월 당재조직준비위원회와 산하 고려공산청년회가 발각되면서 체포되었다. 1931년 6월 경성지법에서 징역 7년형을 선고 받았다. 복역 중이던 1932년 7월 대전형무소로 이감되던 중 "조선민족 독립만세"를 외쳤다는 이유로 1933년 1월 25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8개월을 가형받았다. #

1936년 만기 출소한 그는 고문의 후유증에 시달리다 1940년 6월 28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5년 정헌태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