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이명 | 정금모(鄭金模), 정윤모(鄭允模) |
자 / 호 | 인술(仁述) / 송은(松隱) |
본관 | 동래 정씨[1] |
출생 | 1879년 3월 15일 |
전라도
함평현 해보면 주현리 백토지 (현 전라남도 함평군 해보면 용산리 백토지마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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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10년 6월 2일[2] |
경상북도
대구군 동상면 신동 대구감옥 (현 대구광역시 중구 삼덕동2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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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 | 전라남도 함평군 손불면 동암리 |
상훈 | 건국훈장 애국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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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1879년 3월 15일 전라도 함평혆 해보면 주현리 백토지(현 전라남도 함평군 해보면 용산리 백토지마을)에서 아버지 정인숙(鄭寅淑, 1861 ~ ?. 3. 15)과 어머니 제주 고씨(? ~ ?. 5. 20) 사이의 2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함평군 대야면 운암리(현 함평군 해보면 광암리 운암마을)로 이주하여 농업에 종사했다.그는 1907년 9월 장성군 출신의 기삼연 의병진에 입대하여 담양군· 능주군·장성군 등지에서 의병활동에 참전했다. 그 뒤 1908년 3월 김준(金準) 의병진에 입진하여 장성군·담양군· 광주군 등지에서 적과 접전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다. 1908년 5월 이후에는 조경환(曺京煥) 의진에 소속되어 함평군· 나주군 등지에서 적과 교전하였다.
1909년에는 전해산(全海山) 의병진에 소속되어 의병 모집 활동을 전개했으며, 얼마 뒤에는 의병장 이강산(李江山)의 지휘에 따라 동지 박치일(朴致一)과 함께 함평군에서 활동하던 나주군 헌병 분견소 밀정 이판안(李判安)·김정태(金正泰)·최치도(崔致道)를 체포 후 처단했다.
그 뒤 이러한 활동들이 노출되어 결국 일본군에 체포되었으며, 1909년 3월 8일 대구공소원[3]에서 소위 폭동 및 모살 혐의로 교수형을 선고받았다. 이에 공소하였으나 이듬해인 1910년 3월 8일 대구공소원에서 같은 혐의에 대해 공소가 기각되었으며, 상고까지 했으나 1910년 4월 27일 고등법원에서 위 혐의에 대해 상고가 기각되어 결국 형이 확정되었다.
그리고 1910년 6월 2일 경상북도 대구군 동상면 신동(현 대구광역시 중구 삼덕동2가) 대구감옥에서 동지 이강산·박치일·박장태(朴章奉)· 서성학(徐成學)· 양창국(梁昌國) 등과 함께 교수형이 집행되어 결국 순국했다.
1977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포장을 추서받았고, 이어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1]
문경공파(文景公派)-정절공파(貞節公派) 30세 모(謨) 항렬. 족보명은 정금모(鄭金謨), 족보에 기록된 일명은 정윤모(鄭允謨).
[2]
독립유공자 공적조서에는 5월경에 별세한 것으로 오기되어 있다.
[3]
형사사건부에는 1909년 4월 27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교수형을 선고받은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