典獄署
1. 개요
고려, 조선 시대에 감옥 운영에 대한 사무를 맡은 부서이다. 청사는 종각에서 서쪽으로 맞은편, 지금의 세종문화회관 자리에 있었다. 오늘날로 치면 서울구치소와 비슷하다.[1]2. 상세
고려 건국 때부터 운영했으며 성종 치세 말기인 995년에 대리시(大理寺)로 이름을 바꿨다가 문종 대에 다시 전옥서로 바꾸고 정8품의 영(令) 1명과 정9품의 승(丞) 2명이 관리하게 하였다. 충선왕 연간에 폐지되었다가 1362년에 다시 설치되었는데 영은 종8품, 승은 종9품으로 종전보다 1단계 내려갔다.조선 시대에는 경국대전이 완비되면서 우부승지가 겸임하는 제조(提調), 종6품 주부(主簿), 종8품 봉사(奉事), 종9품 참봉(參奉) 각각 1명씩 담당하였다.[2]
현재의 서울구치소, 서울동부구치소 등 한양과 그 인근의 구치소의 역할을 맡았던 기관으로 형조, 의금부에서 추국할 중죄인[3]은 물론이고 태형, 장형 정도로 처리될 잡범들도 수용되었으며 경국대전에 규정된 대로 모든 죄인들은 최대 3번의 재판을 받을 수 있었기에 지방 감영에서 송사에 불복하여 한양으로 이감을 온 인원들도 존재했다.[4] 전체 수용인원은 대략 1백명 정도였다.[5] 본래 미결수를 처리하는 시설이라 죄인이 유형이나 도형을 선고받을 경우 각 지방의 감옥으로 이송되기에 전옥서에서는 오직 죄인의 구금만 담당했고 구금된 죄인에게는 기본적으로 칼, 수갑, 차꼬 등의 형구를 채워 놓게 되어 있었다.[6] 참고로 현대 교정시설의 경우 미결수는 무죄추정의 원칙에 따라 법적으로 범죄자가 아니기 때문에 비교적 생활에 터치가 적고 자유도도 높은 편이다.] 죄인이 들어올 때마다 죄인 이름과 죄상을 적은 수도기(囚徒記)를 작성하며 주기마다 왕에게 보고하고 전옥서의 수감인원이 너무 많을 경우나 혹서기, 혹한기 때에는 죄가 가벼운 죄인 위주로 석방을 시키기도 했다.[7] 감옥은 남녀의 수용을 엄격히 구분했고 남자 옥사 9칸에 여자 옥사 5칸이기에 생각 외로 여죄수가 수감된 비율이 높았다.[8] 또 미결수를 가둬두는 전옥서와 재판을 실시하는 형조 관청 사이에 거리가 있어 죄인들이 이를 오가는 과정에서 탈주하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형조 청사 옆으로 전옥서를 이전시키려는 논의가 있었으나 결국 시행되지 못하였다.[9]
여담으로 이곳의 죄인들은 품계를 가진 벼슬아치 아니면 누리기 힘든 특권(?)을 누렸는데 바로 얼음이었다. 나라에서는 제사용 얼음, 대신 이하 궁궐 사람들에게 나눠 줄 얼음, 왕실 전용 얼음, 열사병 환자 치료용으로 쓸 얼음 등을 채취해 모았는데 그 분배 대상 중 하나가 전옥서의 죄인들이었다.[10]
[1]
죄수의 구속, 구금 등을 관장하는 부서는 형조 안에 장금사라는 이름의 부서가 따로 있었다. 이쪽이 오늘날의 교정본부, 범죄예방정책국 등과 유사한 편.
[2]
우부승지가 정3품으로 1급 상당이니 사실상 민정수석이 교정본부장까지 겸직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여기에 주부는 계장(교감, 6급), 봉사는 부장(교사, 8급), 참봉은 담당(교도, 9급)에 대응하면 현대의 직급 체계와도 얼추 맞아떨어진다.
[3]
여기에 상대방을 주술로 저주하는 행위도 포함되며 다른 죄와는 아예 따로 집계할 정도로 엄중히 다루었다. 당시에는 미신이 성행하여 이로 인한 사건이 많아 조정에서 이를 중대 범죄로 취급하였고 특히 왕실에 대한 저주는 대역죄로 다스려 해당 죄인은 능지처참에 삼족을 멸할 정도였다.
[4]
오늘날에도 항소/상고를 하게 되면 고등법원이 있는 지역의 교정시설로 이감이 되고 상고를 하게 되면 서울구치소나 안양교도소 등 서울 인근의 교정시설로 이감을 오게 된다고 한다.
[5]
현재
서울구치소의 수용정원인 2000명에 비하면 턱없이 적지만 전근대임을 감안하면 상당히 많은 인원을 수용한 셈이다.
[6]
현재는 재소자 인권 문제로 당연히 이렇게는 안 하지만 출정이나 이감 등으로 수용자가 외부로 이동해야 하는 경우에는 포승줄을 묶고 수갑을 채워서 움직임을 제한하며 수용자가 난동을 부리거나 자해를 하는 등 소요가 발생하면 직원 및 타 수용자 보호를 위해 수갑, 포승줄 등으로 움직임을 제한하기도 한다.
[7]
현재도 교도소의 인원은 워낙 포화상태라서 형기를 일정기간 채우고 교정시설 내에서 성실하게 생활했다면 가석방을 시켜주는 경우도 많고 초범의 경우에는 피해자와 합의를 하는 등 책임지고 반성하려는 자세를 보여준다면 집행유예로 풀어주는 경우가 많다. 교도소 자체가 님비 시설이라 신축도 쉽지 않고 확장도 어려운 것은 예나 지금이나 동일한 듯하다.
[8]
현대에도 교정시설 내에는 남녀의 분리수용이 원칙이며 청주여자교도소를 제외하고도 각 구치소/교도소에는 여자 사동이 별도로 존재한다.
[9]
현대에도 원칙상 사법기관과 구치소는 인접해 있어야 하며 인천구치소나 수원구치소의 경우 법원 청사 바로 옆에 붙어 있고 지하통로가 있어서 출정을 나갈 때도 시설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
[10]
물론 양은 그리 많지도 크기가 크지도 않겠지만 황금보다도 더 비싼 걸 염두에 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