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산시의 향토유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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잿머리 성황당 | 선부동 지석묘군 |
1. 개요
고려의 문신 서희가 송나라 사신으로 가기 전에 제를 지내기 위해 세운 굿당. ‘안산시 향토유적 제1호’로 지정되어 있다. 주소는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성곡동 산 76.고려 시대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안산시의 대표적인 성황당으로, 안산시에서 해마다 10월 1일에 ‘잿머리 성황제’를 올리고 있는 곳이다. 당집은 화재로 새로 지었으며 정면 세 칸 측면 한 칸으로 되어 있으며 안에는 홍씨부인 영정, 안씨부인 영정, 관음장군 영정, 대신 영정, 마태장군 영정, 용궁칠성 영정, 성황기 등이 보관되어 있다.
2. 역사
『 동국여지승람』「사묘」조에 의하면 ‘성황사가 2개 있는데, 하나는 군의 서쪽 21리에 있고, 하나는 군의 서쪽 32리에 있다.’고 되어 있다. 또한『기전읍지(畿甸邑誌)』 안산군편에 실려 있는 지도에 읍내로부터 20리 떨어져 있는 군자산(君子山)에 성황당이 있으며 또 한 곳의 성황당은 성두(城頭)를 30리 떨어진 곳에 있음을 기록하고 있다. 군자산에 있는 성황당은 현재 시흥시에 소속되어 있으므로 안산의 대표적인 성황당은 잿머리 성황당임을 알 수 있다.이 성황당은 고려 제6대 성종[982~997] 대에 내부시랑(內部侍郞) 서희(徐熙)가 송나라 사신으로 가기 전에 장도(壯途)를 비는 제를 지내기 위해 세웠다. 이후 매년 정월 대보름과 칠월 칠석에 칠성맞이 행사를 시월에는 도당굿을 올리고 있다. 또한 3년마다 한 번씩 시월부터 정월까지 유가를 올리기도 하였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3. 내용
잿머리는 성의 꼭대기에 있다는 뜻으로, 성황사가 있었던 예가 있으므로 이를 중심으로 독자적 신앙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안산잿머리성황제는 일단 용어가 주목된다. 인접한 다른 지역에서는 성황제라는 제의 명칭이 그다지 활발하게 사용되지 않는다. 이를테면 도당굿이나 곶창굿이라는 말 말고는 다른 곳에서 사용하는 대동굿이라는 말도 사용되지 않는다. 안산 잿머리를 비롯해 몇 군데에서만 성황제라는 용어가 사용되고 있어 이 점이 각별하다. 안산 잿머리와 유관한 지역에서는 성황제를 사용한다. 구체적으로는 안산 잿머리를 비롯해 시흥 구준물 성황제, 군자봉 성황제 등이다. 이 뿐 아니라 우음도에서도 앞의 두 지역에서 말하는 성황신과 일정한 관련이 있는 신격과 제차가 있다. 안산과 시흥 군자봉, 구준물 성황제 등이 일련의 연계선상에서 독자적인 신앙계보를 형성하고 있다.잿머리 성황사가 있는 지역은 성황사를 중심으로 성터가 쌓여 있음에 비추어서 이해할 수 있다. 선곡동의 마을은 네 개의 자연마을로 되어 있음이 확인된다. 잿머리라는 마을의 총괄적인 명칭 아래 골우물, 벌말, 안말, 도란말 등으로 하위 구성되어 있음으로써 성황당을 신성시해 주변에 단을 쌓고 이 마을 주민들을 대상으로 신성한 마을을 구성한 것으로 보인다.
네 개의 자연마을 가운데 규모가 큰 마을은 안말과 도란말로 가장 성대했다고 전한다. 안말은 순흥 안씨들이 대대로 세거했으며, 이로 인해 ‘안촌(安村)’이라고 한 데서 유래되었다. 도란말은 바닷가에 위치한 마을이란 뜻으로, 바닷물이 이곳에 이르러서 황급하게 돌아가는 데서 유래한 말이라고 한다. 이 마을을 한자로 표기할 때에는 ‘회촌(廻村)’이라고 한다. 이 지역 김녕 김씨와 남양 홍씨가 대대로 거주한 세거지였으며, 잿머리에 들어온 성씨 순서는 안씨·홍씨·김씨 등으로 되어 있다고 전한다. 마을이 없어지기 전에 가장 번창한 성씨는 김녕 김씨였다고 전한다.
안산은 역사적으로 물화가 번성하고 자연·지리적인 조건 아래 교통의 요충지였다. 제보자들에 의하면 잿머리 아래 갯벌은 황금덩어리라고 표현될 정도로 마을의 주요한 수입원이다. 이 마을은 전적으로 잿머리 마을 아래에 있는 바다에 의존해 갖가지 경제적인 수입원을 조달했다. 역사적으로 안산 잿머리 마을은 일정하게 성씨의 변천을 거치며 성황제를 지내면서 성황제의 내력을 공고히 하는 한편 마을 사람들의 신앙심을 돈독하게 쌓은 것으로 이해된다. 잿머리 성황당이 몇 차례 화재에도 신앙심을 굳게 지켜온 것은 이 마을의 성황신앙에 관한 믿음이 온전한 덕분이라고 현지 전승자들은 말한다.
[출처] 한국민속대백과사전
4. 형태와 구조
성황당지는 약 30여 평이고 성황당의 면적은 15평이다. 당집은 화재로 새로 지었으며 정면 세 칸 측면 한 칸으로 되어 있으며 내부에는 홍씨부인 영정, 안씨부인 영정, 관음장군 영정, 대신 영정, 마태장군 영정, 용궁칠성 영정, 성황기 등이 보관되어 있다.[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4.1. 입구 (일주문)
보통 사찰, 굿당 등에서 성속(聖俗)의 경계문으로 지어지는 일주문을 입구로 하였다.
4.2. 성황당 본당
이곳에서 성황제, 굿 등 다양한 제사를 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