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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31 15:14:36

임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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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제
林悌
파일:SE-7f7aad81-d676-48b2-b08e-ef0dd0db4060.jpg
임제 상상화
출생 1549년 12월 8일
( 명종 4년)
조선 전라도 나주목 회진리
(現 전라남도 나주시 다시면 회진리)
사망 1587년 9월 13일
( 선조 20년)
조선 전라도 나주목 회진리
(現 전라남도 나주시 다시면 회진리)
본관 나주 임씨
자순(子順)
백호(白湖)/겸재(謙齋)/풍강(楓江)/소치(嘯痴)/벽산(碧山)
능묘 전라남도 나주시 다시면 가운리 142 -2 번지
기념관 전라남도 나주시 다시면 회진길 8 백호 문학관

1. 개요2. 생애3. 성격4. 일화5. 당대 평가6. 대표시조7. 저서8. 현대의 평가들

[clearfix]

1. 개요

조선 중기의 문인. 본관은 나주(羅州), 자는 자순(子順), 호는 백호(白湖)·겸재(謙齋)·풍강(楓江), 소치(嘯痴)·벽산(碧山)이다. 허목의 외조부이다.

2. 생애

1549년 12월 8일 전라도 나주목 회진리(현 전라남도 나주시 다시면 회진리)[1] #에서 5도 병마절도사를 지낸 아버지 임진(林晉)과 어머니 남원 윤씨 윤개(尹塏)의 딸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래로 임선(林愃)·임순(林恂)·임환(林懽)·임탁(林㤞) 등 남동생이 4명 있었고 여동생이 2명 있었다.

임제는 어려서부터 지나치게 자유분방해 스승이 없었는데, 1570년 그가 충청도를 거쳐 서울로 가는 길에 쓴 시가 성운(成運)에게 전해진 것이 계기가 되어 20세가 넘어선 나이에야 그를 스승으로 모시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어머니를 여의고 글공부에 정진하였으나, 과거에 번번히 떨어졌다. 그러나 계속 학업에 정진하여 중용을 800번이나 읽은 일화가 유명하다고 한다.

1576년( 선조 9년) 28세의 나이로 식년시 생원시와 진사시 양시에 각각 2등 5위와 1등 4위로 합격하였으며 # @, 이듬해인 1577년에 알성시 문과에 을과 1위로 급제하여 # 흥양현감(興陽縣監), 서북도 병마평사(西北道兵馬評事), 관서도사(關西都事), 예조정랑(禮曹正郞), 홍문관 지제교(弘文館知製敎)를 지냈다.

그러나 본인의 호방한 성격, 동서의 붕당의 분쟁등으로 현실 정치에 개탄하고 명산을 찾아다니면서 시를 짓고 유람을 하다가 1587년 38세의 나이로 고향인 회진리에서 여생을 마쳤다.

3. 성격

四海諸國未有能稱帝者獨載邦終古不能
生於若此 陋邦 其死何足借命 勿哭

사해의 여러 나라들이 황제를 일컬어 보지 않은 나라 없거늘
우리나라만 예로부터 그래보지 못했다.
이와 같은 나라에 태어났거늘 그 죽는 것을 어찌 애석해할 것 있느냐
곡을 하지말라


白湖林悌 臨終 誡子 勿哭辭(백호임제 임종 계자 물곡사)

당대의 명문장가로 이름이 높았으며, 호방한 성격에 시, 술, 검과 퉁소[2]를 좋아했다고 한다.

또한 평소 사대주의에 매우 회의적이었던 인물로 보인다. 이는 그가 죽기 직전 남긴 임종시인 물곡사(勿哭詞)에 잘 나타나있다.

아직 단종과 사육신이 복권되기 이전시기임에도, 이를 은유한 소설 원생몽유록을 지었을만큼, 대범하기도 했다.

4. 일화

靑草 우거진 골에 자느냐 누웠느냐
紅顔을 어디두고 白骨만 묻혔느냐
盞 잡아 勸할 이 없으니 그것을 슬퍼하노라

유명한 기녀였던 황진이가 인생 사십에 병에 걸려 쓸쓸한 산기슭에 묻히느니 사람들 왕래가 빈번한 대로변에 묻어 주기를 유언하여 송도(松都) 대로변에 묻혔는데, 황진이의 기(氣)와 예(藝)를 높이 평가했던 임제는 그녀가 살았을 때 고대했던 만남을 바랬지만 뜻을 이루지 못함을 아쉬워하며, 기예(氣藝)가 일찍 저버림을 탄식하였고, 황진이의 무덤 앞에 넋을 달래며 제문을 짓고 제를 지냈다. 이후 조정에서 사대부가 기생에게 술을 올리고 그를 기리는 시를 지은 것을 문제 삼아 탄핵해 파직에 이르게 만든다.

서울 가는 나그네가 개성을 지나는데
만월대에는 인적도 없고 계곡 물은 성벽을 돌아 흘러가네
슬프다. 오백년의 역사여
두견새 우는 소리에 청산이 빨려 들어가네

옥봉 백광훈

풍류 유람의 길동무인 백호 임제와 옥봉 백광훈이 서로 마부를 하루씩 교대하여 관서팔경을 유람하고 개성에 도착하니, 해가 저문데다 노자마저 떨어져 할 수 없이 어느 부잣집 신세를 지기로 하고, 저녁을 먹은 후 임제가 수작을 거는데, ‘주인 어르신, 오늘 은혜에 보답하고자, 제가 데리고 다니는 하인 놈이 글을 곧 잘하니 시나 한 수 읊게 하시지요.’라고 하면서 ‘운자는 서울 경이다.’하며 옥봉에게 분부한다.

옥봉 백광훈은 행색은 하인이지만 약속한 듯 붓을 들어 거침없이 일필휘지하는데, 그때 주인이 한참을 들여다 보더니 ‘ 전라도에 사는 백옥봉과 임백호가 글을 잘한다고 소문은 익히 들었지만, 글 잘하는 하인은 생전 처음 보았소.’ 하며 경찬을 하였다. 그러자 임제가 ‘저희들이 바로 백옥봉과 임백호입니다.’ 라며 함께 박장대소를 했다고 한다

그 외에도 충청도 감사의 아들에게 오줌을 신선이 마시는 불로주라 하여 마시게 한 일, 경상도 어느 지방에서 화전놀이 하는 이들에게 시를 지어주고 음식을 제공받아 종일 더불어 논 일, 박팽년 사당에 짚신을 신고 가 알현한 일 등의 일화가 전하고 있다.

5. 당대 평가

명산을 두루 유람하여 자신의 분방, 호일한 기운을 복돋아 시에다 토해냈다.
이항복 「백호집서」 中

위의 일화들로 인하여 당대 사람들은 그를 기이한 인물로 평했다고 한다. 한편 황진이를 추모하면서 쓴 시로 "어찌 관리가 일개 기생을 위해 시를 짓고 무덤에 술을 올릴 수 있냐"고 지탄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이면적인 평가와 달리, 그의 글은 높이 평가되고 널리 애송되었다고 한다.

6. 대표시조

청초(靑草) 우거진 골에 자난다 누엇난다.
홍안(紅顔)을 어듸 두고 백골(白骨)만 무쳣나니.
잔(盞) 잡아 권(勸)하리 업스니 그를 슬허하노라.
시조 <청초 우거진 골에>
대표적인 시조로는 황진이를 추모한 시인 '청초 우거진 골에'와 '물곡사' 등이 있다.
푸른 풀이 우거진 산골짜기 무덤 속에 자고 있느냐, 누워 있느냐?
젊고 아름다운 얼굴을 어디에 두고 백골만 묻혀 있느냐?
술잔을 잡고 권해 줄 사람이 없으니 그것을 슬퍼하노라.

7. 저서

대표적인 저서로는 화사(花史), 수성지(愁城志), 백호집(白湖集)[3], 원생몽유록, 남명소승(南溟小乘), 부벽루상영록(浮碧樓觴詠錄), 용성수창집(龍城酬唱集), 재판받는 쥐 등이 있다.

8. 현대의 평가들

임제는 기개가 (가히) 백두산 같을 뿐이라 하겠거니와
그는 자기의 울적한 기분을 가학하여 많은 시를 쓰고 또 소설「수성지」를 썼다.
조윤제 「한국문학사」 中
광객 같기도 하고 또 끝없는 애국사상가 같기도 하고, 호협하고 순결한 시인 같기도 하여, 그는 조선을 ' 소중화'로 칭하는데 강력히 반대할 것이라.
北京大 교수 웨이쉬성 「朝鮮文學史」中

이외에도 고은이 임제의 생애에 대해 쓴 시도 있다.

[1] 현재도 나주 임씨 집성촌이다. 임채정 전 국회의장과 임인채 전 국회의원도 이 마을 출신이다. [2] 그가 평소에 패용했던 검과 퉁소를 그의 고향마을에 위치한 백호 문학관에서 볼 수 있다. 그리고 문학관 근처에 나주 임씨 대종가가 있다. [3] 보통 윤휴의 문집인 백호집과 혼동을 피하기 위하여 '임백호집'이라고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