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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47a0> 출생 | 1899년 3월 4일 |
황해북도 개성시 | |
사망 | 1963년 5월 18일 |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 |
직업 | 독립운동가 |
상훈 |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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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제강점기 당시 고려공산청년회 집행위와 신흥청년사 상무위원 등을 역임한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 1992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2. 생애
1899년 3월 4일 개성시에서 태어났다. 미동보통학교와 선린상업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으로 건너가 세이소쿠 영어학교를 거쳐 게이오오의숙에서 공부했다. 일본에 유학을 하는 동안에 사회주의 사상을 수용했다. 1920년 귀국하여 그해 2월부터 대전청년회의 총무로 일했다.[1]1920년 10월 상하이로 망명하여 혜령전문학교에 입학하였다. 1921년 3월 고려공산청년단 상해회 결성에 참가하였으며 중앙위원으로 활동한다. 1921년 5월에는 안병찬이 설립한 사회주의연구소에도 참여하여 사회주의 이념 연구에 몰두하였으며, 이르쿠츠크파 단체의 상해지부에도 가입하여 고려청년회 위원에 임명되었다.[2]
1922년 1월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극동인민대표대회에 김규식, 여운형 등과 함께 조선대표단으로 참석하였다. 그 해 3월에는 국제공산청년동맹의 지도 아래 박헌영, 김단야 등과 함께 고려공산청년회 제2차 중앙총국을 조직하여 집행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이후 4월 2일 김단야와 함께 국내에서 사회주의 혁명 사상을 비밀리에 선전하고 공산당 조직을 결성하기 위해 귀국하였으나 일제에 의해 체포되었다. 결국 동년 5월 30일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6개월을 선고받고 수감되었으며 1924년 1월에 출소하였다.
그해 2월에는 신흥청년동맹의 중앙집행위원장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이후 박헌영, 김단야 등과 함께 고려공산청년회를 조직하여 중앙집행위원회 선전부 위원으로서 활동하였고 그로 인해 12월 4일 또 한 번 일제에 의해 체포되었다.
1925년 2월 화요파 공산주의자들과 함께 전조선민중운동자대회를 결성하는 것에 참여하였으며 준비위원이 되었다. 1925년 4월 고려공산청년회 창립대회에 참석하였으며 중앙집행위원으로 임명되어 선전업무 등을 맡게 되었다. 1925년 8월 조선일보 기자가 되었으나 조선총독부의 강압에 의해 다른 동료 사회주의자 기자들과 의해 10월 16명의 해고되었다. 같은 해 11월 조선공산당 1차 검거사건 때 체포되어 1928년 2월 2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 6개월을 선고받아 1930년 1월 1일 출소하였다.
1931년 2월 신간회 해소 주장이 나오자 잡지 '신천지'에 신간회의 해소를 반대대하는 글을 발표하였다. 1932년 8월 허정숙과 이혼했으며 이 무렵부터 사회주의운동에서 물러났고 1933년 여운형이 사장으로 있던 민족지 조선중앙일보에 입사해 1936년에는 지방부장이 되어 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그 뒤 홍중주식회사, 조선기계주식회사 등에서도 활동하였다.
해방 후에는 1947년 이극로, 조봉암 등이 조직한 좌우합작단체인 민주주의독립전선 준비위원회 결성에 참가하였다. 그 후 입각 제의를 거절하고 이름을 내세우지 않으며 살다가 1963년 5월 18일 서울에서 사망했다. 한국전쟁 당시 박정희와 친분이 있었고 5.16 군사정변을 지지했다는 말이 있다.
1993년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서강대학교 임지현(역사학자) 교수의 조부이다.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
독립유공자 공훈록 11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