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라과이 공화국 대통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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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fff> ※ 파라과이의 경우 임기가 중간에 단절되었다가 다시 집권해도 처음 집권했을 당시의 대수를 유지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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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38a9><colcolor=#fff> 파라과이 제43대 대통령 이히니고 니콜라스 모리니고 마르티네스 Higinio Nicolás Morínigo Martínez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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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97년 1월 11일 |
파라과이 파라과리(Paraguarí) | |
사망 | 1983년 1월 27일 (향년 86세) |
파라과이 아순시온 | |
국적 | 파라과이 |
정당 | 무소속 |
임기 | 파라과이 제43대 대통령 |
1940년 9월 7일 ~ 1948년 6월 3일 | |
배우자 | 돌로레스 페라리 (1932–1983) |
복무 | 파라과이 육군 |
1919년 ~ 1948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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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라과이 제43대 대통령이자 군인, 독재자.2. 생애
2.1. 집권 까지
스페인계와 과라니족 혈통을 가지고 있어 과라니어에도 능했다. 1919년 3월 1일, 전체 3위 성적으로 임관했다. 1922-1923년 파라과이 내전 당시 모리니고는 내전 가담을 거부하여 스스로 체포되었다.[1] 1932년 9월 소령 시절때 차코 전쟁이 발발하면서 대령까지 고속 승진을 거듭했다. 1936년 9월 2일엔 세로 코라 전투의 현장에서 프란시스코 솔라노 로페스의 유해를 수습하고 아순시온 전쟁 박물관에 안치시켰다. 하지만 1937년 8월 13일, 군사 쿠데타로 프랑코 대통령이 실각했지만 모리니고는 내무부 장관직에 임명되었고 이후 치뤄진 총선에서 승리한 차코 전쟁 영웅이자 자유당 소속의 호세 펠릭스 에스티가리비아 대통령은 1940년 5월 2일 모리니고를 준장으로 진급시키고 그를 전쟁부 장관으로 임명했다. 당시 모리니고는 국가평의회라는 초헌법적인 군부 집단의 우두머리이기도 했다.같은 해 9월 7일, 에스티가리비아 대통령이 항공 사고로 갑자기 사망하면서 이히니오 모리니고는 임시 대통령직을 승계하게 된다. 모리니고는 콜로라도당과 손잡고[2] 당시 전세계를 휩쓸고 있던 파시즘 또는 나치즘식 독재정치를 추구하여 3주만에 자신의 집권을 위해서 헌법을 정지하고 내각을 해산했으며 자유당의 정당활동을 금지시켰다. 한편, 나치즘에 동조하고 독일군을 존경하는 군인으로 구성된 전쟁전선이라고 불리는 단체의 도움을 받았다. 주요 구성원은 빅토리아노 베니테스 베라 당시 중령이 있었다. 1943년 2월, 에스티가리비아의 원래 임기가 종료되었지만 모리니고는 선거에서 승리하여 계속 대통령직을 이어갔다. 총 186,640개의 유효 투표수 중 169,338개를 득표했다.
2.2. 친 파시스트 정권
1940년대 파라과이의 군부는 친나치와 친파시스트 성향을 강하게 지녔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미국은 추축국 지지자들의 영향력을 제한하기 위해 모리니고에게 압력을 행사하려 했다. 그러나 모리니고 정부는 친 독일파였다. 많은 파라과이 군 장교들과 정부 관료들은 공개적으로 추축국에 동조했다. 남미 최초의 나치당 지부가 1931년 파라과이에 설립된 이래, 독일 이민자 학교, 교회, 병원, 농민 협동조합, 청년 단체, 자선 단체 등이 추축국의 적극적인 후원자가 되었다. 미국은 파라과이가 독일과 아르헨티나[3]의 의존과 협력을 막기위해 대여 협정에 따라 파라과이에 상당한 양의 자금과 물자를 공급하고, 공공 사업을 위한 대출을 제공했으며, 농업과 의료 분야에서 기술 지원을 했다. 하지만 많은 파라과이인들은 독일이 미국만큼 파라과이의 주권에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믿었다. 미국은 매우 불쾌했지만, 모리니고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독일의 경제적, 외교적 이익에 반하는 행동을 거부했다.1941년 12월 일본의 진주만 공습으로 태평양 전쟁이 발발, 독일이 미국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미국은 모리니고를 연합국 측으로 공개적으로 참전하도록 강요했다. 모리니고는 1942년 추축국과의 외교 관계를 공식적으로 단절했지만 1945년 2월까지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지 않았다. 오히려 모리니고는 전쟁 내내 독일군의 영향을 많이 받은 아르헨티나 군대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고 추축국의 스파이와 요원들에게 은신처를 제공했다.
2.3. 이후
종전 후, 모리니고는 1946년 6월 9일, 군부의 우익 수장인 빅토리아노 베니테스 베라 대령를 해임했다. 이후 콜로라도당과 전직 대통령인 라파엘 프랑코의 추종파, 좌익 야당인 2월당으로 구성된 연립내각을 만들었고 파라과이 공산당의 합법화에까지 이르는 정치적 자유를 허용했다. 하지만 2월당은 1947년 초에 모리니고에 반발하면서 연립내각을 탈퇴했고, 그러자 이에 격노한 모리니고 대통령은 콜로라도당만을 지지하면서 대대적인 탄압에 나서게 되었다. 이에 2월당과 자유당 및 파라과이 공산당이 공동전선을 체결하여 라파엘 프랑코 전 대통령을 리더로 하는 반란군으로 내전을 일으켰는데 이를 1947년 파라과이 내전이라고 부른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이전부터 대통령에게 충성하던 해군의 거의 전체와 육군 일부가 반란에 가담했다. 하지만 몇 안되는 충성파 세력인 알프레도 스트로에스네르가 콜로라도당을 지원하면서 모리니고는 반격에 나섰고, 결국 1947년 8월에 반란군을 해산시키며 승리했다.[4]1948년 2월 15일, 콜로라도당 전당대회에서 승리한 모리니고는 차기 대선에 출마하려 했으나 이를 막기 위해 6월 3일 펠리페 몰라스 로페스가 이끄는 일부 콜로라도당원들이 반란을 일으켜 그를 아르헨티나로 망명시켰다. 그렇게 7년 9개월간 이어진 모리니고의 독재가 막을 내린다. 모리니고는 1954년 잠시 귀국했으나 다시 아르헨티나로 떠나야했고 1981년이 되어서야 귀국했다. 2년 뒤 사망하였고 국장으로 대통령궁인 로페스 궁에서 장례가 치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