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二 重 公 儀 体 制도요토미 지지 세력과 도쿠가와 지지 세력, 두 세력에 의해 분할된 일본 통치를 일컫는 용어.
학계에서는 보통 히데요시로부터 계승된 조정 중심 정치와 이에야스의 무사 중심 막부 정치라는 두 이론이 불안한 공존을 이루었던 과도기 즈음으로 설명한다.
2. 역사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후계자로 지목된 도요토미 히데요리가 일본을 통치할 예정이었으나 히데요리는 어린아이에 불과했고, 막대한 영지를 가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도요토미 가문의 자리를 넘보기 시작했다. 히데요리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이에야스에게 반기를 든 히데요시의 가신 이시다 미츠나리가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이에야스에게 패배하여 권력의 균형이 틀어진다. 이에 따라 일본을 지배하는 천하인의 자리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넘어간다. 그리고 1603년 마침내 이에야스가 쇼군직을 재수받으며 일본의 지배자로 군림하게 되었다.하지만 이에야스가 막부를 열었음에도 도요토미가는 막부 체제에 포함되지 않고 도쿠가와가와 거리를 두면서 대등한 관계를 유지했다. 도요토미가는 여전히 셋칸케(摂関家)의 일원으로 인정받아 히데요리는 순조롭게 높은 관직을 부여받았으며 가신들에 대해 독자적인 관직 서임권을 행사하였고 매해 신년마다 조정의 공가(公家)들에게 거성인 오사카 성에서 참배를 받는 등 히데요시 생전과 다름없는 높은 예우를 받았다. 무가 사회에서도 도요토미 히데요리의 가신은 배신(陪臣)[1]이 아닌 도쿠가와의 직통 가신과 동등하게 인정받았다.
이는 이에야스에게는 크나큰 불안요소로 느껴졌다. 그의 후계자 히데타다는 정치적 능력은 나름 출중했으나 군재는 전혀 없었고, 다이묘들에게 그리 큰 경애를 받지도 않았다. 그로서는 도요토미 가문이 건재하면 도쿠가와가 휘청이는 순간 도요토미가에 의해 짓밟히거나, 아니면 도요토미가 다시 상위로 올라서서 도쿠가와를 제어하는 구도가 펼쳐질 것을 우려했다.[2]
때문에 이에야스는 어떻게든 히데요시를 제거하기로 하고 호코지 종명 사건을 명분으로 도요토미가에 전쟁을 선포해 오사카 전투를 일으켰다. 이때 도요토미 충성파 다이묘 가문은 공교롭게도 가주가 죽어서 혼란에 빠지거나 세력이 약화되었고, 그렇지 않더라도 각자의 사정 때문에[3] 도요토미를 버리고 도쿠가와 편에 섰다. 도요토미가는 각지의 낭인들을 끌어모아 필사적으로 저항해 1차 침공을 격퇴했으나(오사카 겨울의 진), 도쿠가와의 계략으로 오사카 성의 해자가 전부 매워져서 2차 침공은 결국 이기지 못하고 멸망했다. (오사카 여름의 진)
여담으로 오사카 겨울의 진 때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네덜란드 대포 사용이 전황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것 등 여러 요인이 영향을 준 덕분에 에도 막부는 정치적으로 쇄국이 필요한 시기더라도 네덜란드만큼은 적극적인 외교를 허용하는 특별한 흐름이 계속 이어지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이후 천주교도 농민 봉기 등에서도 네덜란드가 결정적인 도움이 되어, 일본과 네덜란드 간의 우호 관계는 다방면에서 유용했다. 네덜란드 입장에서도 이러한 사정 덕분에 중요한 무역 국가인 일본을 독점적으로 상대할 수 있었다.
3. 이후
도쿠가와 가문은 오사카 전투에서 도요토미 가문을 멸망시키며 일본의 단독 지배자로 군림할 수 있게 되었다. 덕분에 에도 막부는 260년 동안 안정된 정권을 이룰 수 있었다.4. 타 국가에서
네덜란드는 일본과의 독점 관계 덕에 이전까지만 해도 아시아 무역의 지배자였던 포르투갈을 단숨에 제치고, 새로운 아시아의 무역 지배자로 성장했다. 그리고 네덜란드는 아시아 이외에도 각지에 진출하며 전 세계 무역의 50%를 지배하는 부국이 되었다.한편 류큐는 본래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따르고, 이후에도 도요토미 세력을 따랐었다. 그런데 이러한 점이 도쿠가와 눈에는 적대 세력으로 비쳐졌다. 게다가 류큐와 사쓰마와의 관계는 오래 전부터 적대적인 이력도 있었다. 1609년 류큐의 슈리성이 함락되고, 류큐 국왕이 다음 해에 도쿠가와를 만나 직접 평화 중재를 호소했으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