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 신궁 관련 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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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 이세 신궁 伊勢神宮 | Ise Grand Shrin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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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504C4B> 명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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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궁([ruby(神, ruby=じん)][ruby(宮, ruby=ぐう)]) | |
소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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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504C4B> 내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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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에현
이세시 우지타치초 1 (三重県伊勢市宇治館町1番地) |
외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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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에현
이세시 토요카와초 279 (三重県伊勢市豊川町279番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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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신
(祭神) |
내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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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테라시마스스메오오미카미 (天照坐皇大御神) |
외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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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요우케노오오미카미 (豊受大御神)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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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격
(社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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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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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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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이닌 천황 26년(서력기원 불명) |
외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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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랴쿠 천황 22년(서력기원 불명) | |
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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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의 내궁(황대신궁) | 2015년의 외궁(도요우케 대신궁) |
1. 개요
일본 미에현 이세시에 있는 신사 125개소를 가리킨다. 일본 내 모든 신궁을 대표하는 만큼, 정식 명칭은 '신궁(神宮)'이지만, 다른 신궁들과 구분하고자 흔히 '이세 신궁'이라고 부른다. 이십이사 중 상칠사의 으뜸이고, 오늘날에도 일본 전국의 약 8만여 곳에 달하는 신사를 통괄하는 신사본청의 총본산에 해당하는 중요한 곳이다.2. 참배와 행사
이세 신궁에 속하는 신사가 1백여 곳이 넘지만, 이 모두를 대표할 만한 곳은 내궁(內宮) '황대신궁(皇大神宮)'과 외궁(外宮) '도요우케 대신궁(豊受大神宮)', 2곳이다. 이중 내궁 황대신궁은 천황가의 우지카미(氏神; 씨족신)이자 태양신인 아마테라스(天照大御神)를 받든다. 그 때문에 역사적으로도 일본 황실 및 조정과 관계가 밀접했다. 지금도 이세 신궁에 참배하고자 오는 사람들의 최종 목적지 역시 바로 이 내궁. 외궁 도요우케 대신궁은 '식량의 신'인 토요우케(豊受大御神)를 모시는데, 5세기 무렵에 처음 조성되었다. 내궁으로부터 도보로 약 50분 가량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았다.에도 시대에는 사람들이 토요우케를 모시는 이세 외궁에 참배하는 '오이세마이리(お伊勢参り)'[1]가 유행했다. 특히 부모나 집 주인의 허락 없이 집을 빠져 나와 이세 신궁을 참배(누케마이리)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적당히 묵인해 주는 것이 관례였다. 사실 이 시기에는 지역 간 이동이 매우 제한되어서, 이세 참배를 목적으로 여행을 같이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에도 막부의 강력한 정책으로 메이지 유신 초기 사람들이 천황에 대해 잘 모르는 경우가 많았고, 결국 메이지 정부는 이세 외궁에 내한 경배를 아마테라스를 모시는 내궁, 즉 천황의 조상(으로 여겨지는 신)에 대한 경배로 교묘하게 전환시켰다. 그리고 이세 신궁을 모독하는 행위는 불경죄로 다스렸다.
이세 신궁 내궁은 삼종신기 중 야타노카가미를 신체(神体)[2]로 삼는다. 또한 내궁의 정전을 식년천궁(아래 항목에서 설명) 할 때마다 지표 위로 정전의 중앙 기둥 일부를 약간 남기는데, 이를 신노미하시라(心御柱)라고 부른다. 다음 번에 정전을 세울 위치가 바로 여기라고 미리 표시하는 역할을 하는데, 목재를 보호하고자 작은 감실을 만들어 기둥 위에 덧씌운다.
단순해 보이는 건물의 외관은 고대부터 이어져온 이 건물의 역사를 나타낸다. 그리고 20년마다 건물을 해체하고 다시 짓는 식년천궁(式年遷宮)으로 유명하다.
3. 기원
일본 신화에 따르면 이세 신궁이 창건된 계기는 이러하다. (이하의 내용은 일본서기 본문의 기록을 요약한 것이다. 일본서기에서 부연한 일서의 기록은 생략한다.)10대 스진 천황 재위 5년(기원전 93년?)에 전염병이 돌아 많은 사람이 죽었다. 이듬해(기원전 92년?)에도 그 여파로 백성들이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며 충돌이 일어났고 이를 다스리기 어려웠다. 스진 천황은 아마테라스와 야마토노오쿠니타마, 두 신을 궁궐에 모시면서 죄를 고백하고 제사를 지냈으나, 두 신을 두려워하여 궁궐 안에서 함께 지내기를 매우 부담스러워했다. 그래서 장녀 토요스키이리비메(豊鍬入姬命)로 하여금 궁궐 밖에서 아마테라스를 모시며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3]
11대 스이닌 천황 재위 25년(기원전 5년?)에 스이닌 천황은 아마테라스를 모시며 제사 지내는 직무를 누이 토요스키이리비메 대신 딸 야마토히메가 맡도록 하였다. 야마토히메가 아마테라스를 모시기 좋은 터를 찾아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이세국(伊勢國)에 닿았을 때 아마테라스가 신탁을 내려 알려주었다. 야마토히메는 신탁을 받은 뒤에 이세에 신궁[6]을 지었는데, 그 자리가 아마테라스가 하늘에서 처음으로 내려온 곳이라고 일본서기는 말한다.
참고로 일본 각지에는 모토이세(元伊勢) 신궁이라고 불리는 곳들이 있다. 전해오는 말에 따르면 아마테라스가 이세 신궁 자리에 정착하기 전, 토요스키이리비메나 야마토히메가 각지를 떠돌며 임시로 신령을 모셨는데, 모토이세라 불리는 곳들이 잠시나마 아마테라스를 모셨던 터라고 한다.
외궁의 기원에 대해서는 별개의 기록으로 전한다. 지유기궁의식장(止由気宮儀式帳)에 따르면, 21대 유랴쿠 천황 22년(477년)에 천황의 꿈에 아마테라스가 나타나 말하기를 "나 혼자서는 안심하고 식사도 할 수 없어 매우 불편하다. 단바(丹波)[7]에 있는 토요우케(豊受大神)[8] 신을 내 가까이에 불러 날 시중 들도록 하라." 하고 명령하였으므로 그대로 하였다고 한다.[9]
그러나 일본서기나 지유기궁의식장 등은 모두 실제 신궁이 건립된 지 수백 년이 지난 뒤에 기록되었으므로 곧이 믿기는 어렵다. 학자들은 대체로 이세 신궁이 원래는 이세 지방의 토착신을 모신 성지였으리라 추정한다. 특히 이세 지방에 있던 이소베씨(磯部氏) 집안의 씨족신인 토요우케 신을 모신 곳이었을 가능성이 상당하다.[10] 이소베 씨는 성을 와타라이(度会)로 바꾸어 지금도 외궁의 신관직을 세습한다.
이세 신궁이 지금의 형태로 건축된 때도 지토 천황의 치세이다. 지토 천황의 치세에 아마테라스를 제사지내는 직무를 맡던 오쿠(大来) 황녀가 이세 신궁으로 들어가기를 거부했다는 기록도 이를 뒷받침한다.[11]
신화대로라면 아마테라스의 부속신으로 경내에서 조그만 건물 하나를 받았어야 할 토요우케 신이 '외궁'이라는 이름으로 거의 아마테라스와 동격의 건물을 받게 된 것도 본디 이세의 토착가문인 이소베씨의 성지를 아마테라스의 성지로 재편성하면서 나온 지토 천황 시절의 정치적/종교적 타협의 산물이었을 것이다.
최초의 식년천궁이 지토 천황의 치세에 시작함도 결코 우연이 아니다.
4. 신직
4.1. 재궁(齋宮)
옛날에는 내친왕, 여왕(천황의 증손녀 또는 5대손 이하) 등 미혼의 황녀들이 무녀로서 봉직하였는데 이를 재궁(斎宮, さいぐう)이라고 하였다. 재궁은 보통 새로운 천황이 즉위할 즈음에 퇴임하였는데, 퇴임 이후에 결혼은 할 수 있었지만 대부분 미혼으로 평생을 살았다. 이러한 재궁 제도는 남북조시대에 중단되었다.이 재궁으로부터 일본의 성씨 사이토가 유래했다. 교토의 가모 신사에는 마찬가지로 황실 가문의 미혼 무녀로서 재원(斎院, さいいん)]) 제도도 있었다. 재궁과 재원을 합쳐 재왕(斎王, さいおう)이라고 칭한다.
4.2. 제주(祭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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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습 제주 | |||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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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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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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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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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대(환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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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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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中臣毛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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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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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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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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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中臣奥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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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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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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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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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中臣公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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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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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祭主)는 이세 신궁의 최고위 신직이다. 전근대 일본의 관위 체계에서 영외관이었고, 국가의 제사를 관장하는 신기관(神祇官)에 속하였다. 스이코 천황의 치세에 나카토미노 미케코( 카마타리의 아버지)가 초대 제주를 맡은 이래로 에도 시대까지 나카토미씨가 관직을 세습하였다.
메이지 시대 이후 근대에 들어서는 이러한 세습을 폐지하였으며, 제주 관직을 천황이 임명하는 친임관으로 바꾸고, 황족이나 공작인 인물 중에서 임명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는 황족 출신 기혼 여성이 제주를 맡게 되었다. 초대 여성 제주는 메이지 천황과 측실 소노 사치코의 7녀 기타시라카와 후사코(北白川房子)였고,[12] 제2대는 쇼와 천황과 고준 황후의 3녀 다카쓰카사 가즈코, 제3대는 쇼와 천황과 고준 황후의 4녀 이케다 아츠코였다. 2012년부터는 아키히토 천황과 미치코 황후의 장녀 구로다 사야코가 보조 제주가 되어 쇠약해진 고모 아츠코를 도왔다. 2017년 6월, 아츠코가 퇴임하고 사야코가 제4대 제주로 취임했다.
5. 식년천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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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지은 건물(사진의 아래-서쪽)과 곧 헐릴 낡은 건물(사진의 위-동쪽) |
식년천궁(式年遷宮, しきねんせんぐう)이란 일정 기간이 지나면 건물을 다시 짓고 신을 옮기는 의식이다. 이세 신궁은 20년 주기로 천궁을 하는데, 2013년 10월에 62번째 천궁이 있었다. 이를 위해 2백 년, 3백 년 뒤에 사용할 나무를 미리 심어둔다. 홀수 번째 천궁 때는 동쪽 부지로, 짝수 번째 천궁 때는 서쪽 부지로 옮겨 짓는다.
식년천궁 제도가 시작된 유래는 불명확하다. 과거 선대 기술자들이 후세들에게 기술을 완전 전수하는 데 20년이 걸려서 그렇다는 설도 있고, 정기적인 재건축이 신의 영위를 재탄생시킨다는 설, 그냥 과거에 건축기술 부족으로 건물이 낡으면 위험해지니 정기적으로 새롭게 다시 짓는 것이 관습화되었다는 설, 손과 발을 사용해서 셀 수 있는 가장 큰 숫자가 20이기 때문이라는 설 등 다양한 주장이 있다.
이세 신궁처럼 '현대 일본의 신사' 하면 떠오르는 신사 건축의 형태는 의외로 역사가 짧다. 에도 시대 신사건축 양식 중 '고대의 건축은 이렇게 짓지 않았을까'하고 추측하면서 짓던 복고양식 건축이 유행하다가 고착화된 것이다.[13]
5.1. 역대 식년천궁
횟수 | 내궁(內宮) | 외궁(外宮) | ||||
서기 | 연호 | 천황 | 서기 | 연호 | 천황 | |
<colbgcolor=#FFFFC2,#191919> 제1회 | <colbgcolor=#FFFFE6,#1F2023>690년 | <colbgcolor=#FFFFE6,#1F2023> | <colbgcolor=#FFFFFB,#1F2023> 지토 | <colbgcolor=#FFFFE6,#1F2023>692년 | <colbgcolor=#FFFFE6,#1F2023> | <colbgcolor=#FFFFFB,#1F2023>지토 |
제2회 | 709년 | 와도(和銅) 2년 | 겐메이 | 711년 | 와도 4년 | 겐메이 |
제3회 | 729년 | 덴표(天平) 원년 | 쇼무 | 732년 | 덴표 4년 | 쇼무 |
제4회 | 747년 9월 | 덴표 19년 | 748년 | 덴표쇼호(天平勝宝) 원년 | 고겐 | |
제5회 | 766년 | 덴표진고(天平神護) 2년 | 쇼토쿠 | 768년 | 진고케이운(神護景雲) 2년 | 쇼토쿠 |
제6회 | 785년 9월 18일 | 엔랴쿠(延暦) 4년 | 간무 | 787년 | 엔랴쿠 6년 | 간무 |
[임] | 792년 | 엔랴쿠 11년 | ||||
제7회 | 810년 9월 | 고닌(弘仁) 원년 | 사가 | 812년 9월 | 고닌 3년 | 사가 |
제8회 | 829년 9월 | 덴초(天長) 6년 | 준나 | 831년 9월 | 덴초 8년 | 준나 |
제9회 | 849년 9월 | 가쇼(嘉祥) 2년 | 닌묘 | 851년 9월 | 닌주(仁寿) 원년 | 몬토쿠 |
제10회 | 868년 9월 | 조간(貞観) 10년 | 세이와 | 870년 9월 | 조간 12년 | 세이와 |
제11회 | 886년 9월 | 닌나(仁和) 2년 | 고코 | 889년 10월 | 간표(寛平) 원년 | 우다 |
제12회 | 905년 9월 | 엔기(延喜) 5년 | 다이고 | 907년 | 엔기 7년 | 다이고 |
제13회 | 924년 9월 | 엔초(延長) 2년 | 926년 9월 | 엔초 4 | ||
제14회 | 943년 9월 | 덴교(天慶) 6년 | 스자쿠 | 945년 12월 | 덴교 8년 | 스자쿠 |
제15회 | 962년 9월 | 오와(応和) 2년 | 무라카미 | 964년 9월 | 고호(康保) 원년 | 무라카미 |
제16회 | 981년 9월 17일 | 덴겐(天元) 4년 | 엔유 | 983년 9월 | 에이간(永観) 원년 | 엔유 |
제17회 | 1000년 9월 16일 | 조호(長保) 2년 | 이치조 | 1002년 9월 | 조호 4년 | 이치조 |
제18회 | 1019년 9월 17일 | 간닌(寛仁) 3년 | 고이치조 | 1021년 9월 16일 | 지안(治安) 원년 | 고이치조 |
제19회 | 1038년 9월 16일 | 조랴쿠(長暦) 2년 | 고스자쿠 | 1040년 9월 15일 | 조큐(長久) 원년 | 고스자쿠 |
제20회 | 1057년 9월 | 덴기(天喜) 5년 | 고레이제이 | 1059년 9월 | 코헤이(康平) 2년 | 고레이제이 |
제21회 | 1076년 | 조호(承保) 3년 | 시라카와 | 1078년 | 조랴쿠(承暦) 2년 | 시라카와 |
제22회 | 1095년 9월 | 가호(嘉保) 2년 | 호리카와 | 1097년 9월 | 조토쿠(承徳) 원년 | 호리카와 |
제23회 | 1114년 9월 16일 | 에이큐(永久) 2년 | 도바 | 1116년 9월 | 에이큐 4년 | 도바 |
제24회 | 1133년 9월 16일 | 조쇼(長承) 2년 | 스토쿠 | 1135년 9월 | 호엔(保延) 원년 | 스토쿠 |
제25회 | 1152년 9월 | 닌페이(仁平) 2년 | 고노에 | 1154년 9월 | 큐주(久寿) 원년 | 고노에 |
[임] | 1169년 | 가오(嘉応) 원년 | 다카쿠라 | |||
제26회 | 1171년 | 조안(承安) 원년 | 1173일 | 조안 3년 | 다카쿠라 | |
제27회 | 1190년 9월 16일 | 겐큐(建久) 원년 | 고토바 | 1192년 9월 | 겐큐 3년 | 고토바 |
제28회 | 1209년 9월 16일 | 조겐(承元) 3년 | 쓰치미카도 | 1211년 9월 | 겐랴쿠(建暦) 원년 | 준토쿠 |
제29회 | 1228년 9월 16일 | 안테이(安貞) 2년 | 고호리카와 | 1230년 | 칸키(寛喜) 2년 | 고호리카와 |
제30회 | 1247년 9월 16일 | 호지(宝治) 원년 | 고후카쿠사 | 1249년 9월 26일 | 겐초(建長) 원년 | 고후카쿠사 |
제31회 | 1266년 9월 16일 | 분에이(文永) 3년 | 가메야마 | 1268년 9월 15일 | 분에이 5년 | 가메야마 |
제32회 | 1285년 9월 16일 | 고안(弘安) 8년 | 고우다 | 1287년 9월 18일 | 고안 10년 | 고우다 |
제33회 | 1304년 12월 22일 | 가겐(嘉元) 2년 | 고니조 | 1306년 12월 20일 | 토쿠지(徳治) 원년 | 고니조 |
제34회 | 1323년 9월 16일 | 겐코(元亨) 3년 | 고다이고 | 1325년 9월 16일 | 쇼추(正中) 2년 | 고다이고 |
제35회 | 1343년 12월 28일 | 고코쿠(興国) 4년 | 고무라카미 | 1345년 12월 27일 | 고코쿠 6년 | 고무라카미 |
제36회 | 1364년 2월 16일 | 쇼헤이(天平) 19년 | 1380년 9월 08일 | 텐주(天授) 6년 | 고카메야마 | |
제37회 | 1391년 12월 20일 | 겐추(元中) 8년 | 고카메야마 | 1400년 2월 28일 | 오에이(応永) 7년 | 고코마쓰 |
제38회 | 1411년 12월 | 오에이 18년 | 고코마쓰 | 1419년 12월 21일 | 오에이 26년 | 쇼코 |
제39회 | 1431년 12월 20일 | 에이쿄(永享) 3년 | 고하나조노 | 1434년 9월 23일 | 에이쿄 6년 | 고하나조노 |
제40회 | 1462년 12월 27일 | 간쇼(寛正) 3년 | 1563년 9월 23일 | 에이로쿠(永禄) 6년 | 오기마치 | |
제41회 | 1585년 10월 13일 | 덴쇼(天正) 13년 | 오기마치 | 1585년 10월 15일 | 덴쇼 13년 | |
제42회 | 1600년 9월 21일 | 게이초(慶長) 14년 | 고요제이 | 1600년 9월 27일 | 게이초 14년 | 고요제이 |
제43회 | 1629년 9월 21일 | 간에이(寛永) 6년 | 고미즈노오 | 1629년 9월 23일 | 간에이 6년 | 고미즈노오 |
제44회 | 1649년 9월 25일 | 게이안(慶安) 2년 | 고코묘 | 1649년 9월 27일 | 게이안 2년 | 고코묘 |
[임] | 1659년 11월 25일 | 만지(万治) 2년 | 고사이 | |||
제45회 | 1669년 9월 26일 | 간분(寛文) 9년 | 레이겐 | 1669년 9월 28일 | 간분 9년 | 레이겐 |
[임] | 1683년 3월 10일 | 덴나(天和) 3년 | ||||
제46회 | 1689년 9월 10일 | 겐로쿠(元禄) 2년 | 히가시야마 | 1689년 9월 13일 | 겐로쿠 2년 | 히가시야마 |
제47회 | 1709년 9월 02일 | 호에이(宝永) 6년 | 나카미카도 | 1709년 9월 05일 | 호에이 6년 | 나카미카도 |
제48회 | 1729년 9월 03일 | 교호(享保) 14년 | 1709년 9월 6일 | 교호 14년 | ||
제49회 | 1749년 9월 01일 | 간엔(寛延) 2년 | 모모조노 | 1749년 9월 04일 | 간엔 2년 | 모모조노 |
제50회 | 1769년 9월 03일 | 메이와(明和) 6년 | 고사쿠라마치 | 1769년 9월 06일 | 메이와 6년 | 고사쿠라마치 |
제51회 | 1789년 9월 01일 | 간세이(寛政) 원년 | 고카쿠 | 1789년 9월 1일 | 간세이 원년 | 고카쿠 |
제52회 | 1809년 10월 16일 | 분카(文化) 6년 | 1809년 10월 16일 | 분카 6년 | ||
제53회 | 1829년 9월 02일 | 분세이(文政) 12년 | 닌코 | 1829년 10월 16일 | 분세이 12년 | 닌코 |
제54회 | 1849년 9월 02일 | 가에이(嘉永) 2년 | 고메이 | 1849년 9월 05일 | 가에이 2년 | 고메이 |
제55회 | 1869년 9월 04일 | 메이지(明治) 2년 | 메이지 | 1869년 9월 07일 | 메이지 2년 | 메이지 |
제56회 | 1889년 10월 02일 | 메이지 22년 | 1889년 10월 05일 | 메이지 22년 | ||
[임] | 1900년 10월 02일 | 메이지 33년 | ||||
제57회 | 1909년 10월 02일 | 메이지 42년 | 1909년 10월 05일 | 메이지 42년 | ||
제58회 | 1929년 10월 02일 | 쇼와(昭和) 4년 | 쇼와 | 1929년 10월 05일 | 쇼와 4년 | 쇼와 |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제59회 식년천궁 연기 | ||||||
제59회 | 1953년 10월 02일 | 쇼와 28년 | 쇼와 | 1953년 10월 05일 | 쇼와 28년 | 쇼와 |
제60회 | 1973년 10월 02일 | 쇼와 48년 | 1973년 10월 05일 | 쇼와 48년 | ||
제61회 | 1993년 10월 02일 | 헤이세이(平成) 5년 | 아키히토 | 1993년 10월 05일 | 헤이세이 5년 | 아키히토 |
제62회 | 2013년 10월 02일 | 헤이세이 25년 | 2013년 10월 05일 | 헤이세이 25년 |
6. 관광
가기는 쉽지 않다. 이세 신궁이 위치한 곳은 미에현에서도 동쪽 끝자락이라서 오사카나 나고야에서 간격이 벌어진다. 하지만 이세 신궁은 일본인들이 평생 한 번은 가 보고 싶어하는 곳으로 꼽는다[19]. 그만큼 일본의 역사와 문화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는 뜻이다.단, 칸사이(즉, 오사카, 교토, 나라 등을 중심으로 하는 여행)나 나고야권을 중심으로 돌아다니는 여행을 가면서 이곳만 들르는 것은 추천하기가 어렵다. 아무리 빨리 이동한다고 해도 적게는 왕복 3시간 길게는 왕복 5시간은 잡아야 하고, 스룻토 간사이 패스 같은 각종 칸사이나 나고야권에서 쓰는 패스의 통용 구간을 넘어가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여기까지 오려면 얄짤없이 추가 요금을 내야 한다. 킨테츠에서 발행하는 패스라면 추가요금 없이 올 수 있지만, 간사이나 나고야권 여행이라면 다른 패스에 비해 메리트가 없는 경우가 많다.
JR 투어리스트 패스 중 이세 - 쿠마노 - 와카야마 지역 패스를 사용하면 편하게 이용할 수 있다. 미에 교통의 버스 노선까지 추가금 없이 이용할 수 있어서 좋지만, 도카이도 본선( JR 교토선)과 나라선이 이용 범위에 없기 때문에 교토 관광은 포기하다시피 해야 한다.
킨테츠에서 이세·토바·시마 슈퍼 패스포트 마와랸세라는 미에현 최고존엄 패스를 판매하고 있다. 미에현에서는 위에 있는 JR 투어리스트 패스보다 몇 배로 효율적[20]인데 실 사용범위 외 지역인 오사카, 나고야, 교토 등 킨테츠의 전 노선에서부터 범위 내까지 왕복할 수 있는 특급권 제공[21]과 범위 내 특급권 4장을 제공한다. 여기에 최대 수천엔씩 하는 주요 관광지들의 무료 입장이라는 상당한 혜택이 있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항목으로.
이세시 역 남쪽 출구로 나와서 미에교통 51, 55 외궁내궁선(外宮内宮線) 버스를 타면 된다. 이세시역전(伊勢市駅前) 정류장에서 타고 우치미야마에(内宮前) 정류장에서 내리면 바로 내궁행이다. 요금은 2017년 3월 기준 430엔.
내궁 입구에는 이스즈천 목재 도리이가 서 있으며 바로 강을 건너는 다리로 이어진다. 많은 사람들이 이 토리이 앞에서 인사하고 들어간다. 나갈 때도 마찬가지. 여기서부터 내궁 본전까지 걸어서 가는데, 시간이 좀 걸리니 주변 숲을 둘러보면서 천천히 가자. 본전 앞은 사진 촬영 금지이므로 참배하는 모습을 찍을 수는 없다.[22]
일본인들은 관례적으로 먼저 외궁부터 참배한 뒤 내궁에 가는데, 외궁에서는 좌측보행, 내궁에서는 우측보행을 요구한다. 그러니 신정 등 명절 때에는 워낙 사람이 넘치기 때문에, 일본인들조차도 외궁을 생략하고 내궁만 가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외궁을 다니다 보면 길 옆에 네모나게 금줄을 친 공간이 있다. 가운데에 조그만 돌 세 개를 모아 놓았기에 흔히 '미츠이시(三ツ石)'라고 부르는데, 정식 명칭은 '카와라노하라이쇼(川原祓所)'라고 한다. 원래는 그 옆으로 물길이 흘렀다고 한다. 그래서 '강변(카와라노)'에 있다고 '카와라노하라이쇼'라고 하는데, 1498년에 큰 지진과 쓰나미가 닥친 이후 물길이 달라져서 지금은 물이 흐르지 않는다고 한다. 외궁이 식년천궁을 할 때마다 그 자리에서 의례를 거행하기 때문에 그 자리를 표시해둔 것이다. 본래는 신성한 곳이라 하며 만지지 않음이 예의지만, 일본인들 중에도 미츠이시에 신령한 힘이 깃들었다는 이유로 만지는 사람이 종종 있다는 듯. 만지면 따뜻한 것이 느껴지는 파워 스팟이라느니 하는 말이 일본 인터넷에 나온다. 미츠이시 가까운 곳에 짧은 다리가 있는데, 다리 상판을 이루는 돌이 꼭 거북 모양이라고 카메이시(亀石, 귀석)라고 부른다. 위나 앞에서 보면 '이게 어딜 봐서 거북이야?' 싶은데, 돌 가까이 대각선으로 보면 왜 거북 돌이라고 부르는지 이해가 간다. 돌의 서쪽 면이 거북 머리처럼 보이는데,[23] 원래는 근처에 있는 고인돌의 입구를 이루는 바위였다고 한다.
내궁 입구는 우지교(宇治橋)라는 목조 다리로부터 시작한다. 우지교 밑에는 이스즈천(五十鈴川)이 흐르는데, 우지교를 건너야 비로소 신사의 경내가 시작된다. 우지교 양쪽 끝에는 나무 도리이가 있는데, 참배객들이 사진을 찍는 주요 지점이다. 우지교를 지나면 주요 참배로는 ㄴ자 형태를 이룬다. 자갈이 깔린 길을 따라 3백 미터쯤 걸어가면 (ㄴ의 꺾임점 부분에서) 이스즈 냇가에 다가갈 수 있는 장소가 있다. 이곳을 미타라시바(御手洗場)라고 부르는데, 일반 신사의 데미즈야(水手舍)[24]에 해당한다. 신령과 만나기 전에 이스즈 냇물로 손과 입을 씻으라는 것. 이스즈천 근처에 '동전을 던지지 마시오.' 하는 경고판이 있는 것으로 보아, 많이들 던지는 모양이다. 여기서 남동쪽으로 길이 꺾이는데, 쭉 따라 370미터 쯤 들어가면 아마테라스의 신체( 야타노카가미)를 봉안한 본전과, 참배객들이 참배하는 배전이 나온다. 일반인들은 배전까지만 들어갈 수 있는데, 배전 안에서는 사진을 찍을 수가 없다.
이세 신궁 앞에는 오카게요코초(おかげ横丁)라는 거리가 있다. 에도 시대 말기 몬젠마치를 재현한 곳으로 이곳에 60여 곳이 넘는 음식점 등 점포들이 들어서 있다.
일본에서 아주 유명한 큰 관광지라고 하지만, 어디까지나 자국민인 일본인들에게 해당하는 이야기다. 외국인 관광객이 정말 없다. 서양인은 물론이고 그 흔한 중국인 관광객도 여기에서는 거의 없다. 한국은 전통적으로 대일감정이 좋지 않은데다 야스쿠니 신사와 동급으로 단정하는 경향까지 있어 더욱 없다. 하기야 일본의 기원 신을 기리는 곳인 만큼 일본이라는 국가 자체에 대한 특별한 관심이나 애착이 있지 않은 이상 교통도 그다지 편리하지 않으니 외국인들이 오지 않는 곳이다. 이 경우엔 차라리 교통이 편리한 곳에 있는 다른 신사로 가는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다.
7. 창작물
많은 일본 대중매체에서 간간히 이름을 언급하거나 배경으로 나온다.- X(만화)의 키슈 아라시가 이 이세 신궁의 무녀라는 설정으로 나온 바 있고, 또 이세시가 배경으로 등장하는 라이트노벨 반쪽 달이 떠오르는 하늘에서도 등장한다.
- 애니메이션 로비하치에서 주인공들의 최종목적지인 이세칸달은 미에현 이세시 이세신전은 이세 신궁이 모티브이다.
[1]
오카게마이리(お蔭参り)라고도 부른다.
[2]
신토에서 신령이 깃들었다고 보고 신사에 안치하여 사람들이 숭경하도록 하는 물건. 보통은 거울을 신체로 삼지만, 그 외에도 다양하다.
[3]
야마토노오쿠니타마는 다른 곳에 따로 모시도록 하였다. 이를 모신 곳이 나라현
텐리시의 오야마토 신사라고 한다.
[4]
일본 신화나 고대 민속에서 말하는, 바다 건너편에 있다는 낙원, 이상향을 가리킨다. 신화에서 흔히 보이는 타계(他界)의 한 종류다. 일본의 민속에서는 타계를 흔히 산 속이나, 혹은 바다 너머에 있다고 상상한 반면, 궁중에서는 천상계에 타계가 있다고 믿었다.
타카마가하라야말로 야마토 조정의 궁중에서 믿었던 천상계 타계이다.
[5]
이세를 현세와 타계의 중간쯤에 위치한 곳, 타계에 가까운 곳으로 보는 것이다. 이 문맥에서는 이세를 도코요라는 '해상 타계'와 가까운 곳이라고 하는데, 아마테라스는 천상 타계인 타카마가하라의 군주다. 이 부분은 야마토 조정의 포섭 이전부터 존재했던 민간 신앙의 성소를 야마토 조정이 포섭하려 한 역사가 신화에 남았다고 볼 수 있다. 야마토 조정의 포섭 이전에는 바다 건너편에서 이세로 신이 건너왔으므로, 그곳에 종교시설을 세웠다는 이야기였을 것이다.
[6]
정확히는 지금의 내궁
[7]
지금의
교토부 북부
[8]
곡령신(穀靈神), 즉 곡식의 신으로 그 중에서도 벼의 신이다. 따라서 벼농사 하는 농민에게 특히 숭배받았다. 기록에 따라 남신인지 여신인지 서로 말이 다르다.
[9]
즉 아마테라스는 곡식의 신 보고 내 밥순이가 되라고 명령한 것이다.
[10]
다른 학설에서는 원래 이세의 토착 태양신을 모신 곳이었는데, 야마토 조정의 태양신인 아마테라스와 습합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11]
물론 오쿠 황녀의 행동은 자기 오빠를 죽인
지토 천황에 대한 반발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세 신궁이 지토 천황의 치세 이전까지만 해도 아마테라스의 전통적인 성소가 아니었기 때문에, 전통이 아님을 핑계로 오쿠 황녀는 이세 신궁에 들어가기를 거부하고, 정말 최소한의 경우에만 마지못해 이세 신궁에 들어가 제례를 거행하곤 되돌아가기를 반복하였다.
[12]
후사코의 손녀
기타시라카와 하츠코는 1939년에 출생한 직후부터 황태자비 후보로 물망에 올랐는데, 평민
쇼다 미치코에게 밀려 탈락하고
고준 황후(나가코)의 외가인 시마즈(島津) 가문으로 시집갔다. 때문에
아키히토 황태자와 쇼다 미치코가 결혼식 전 이세 신궁을 참배하러 왔을 때, 후사코는 쇼다 미치코를 홀대하였다고.
[13]
고토 오사무(
도쿄대학 공학부 교수) 저, <일본건축사>.
[임]
내궁 정전이 소실되어 임시로 천궁함.
[임]
[임]
[임]
[임]
[19]
마츠오 바쇼도 오쿠노호소미치 기행을 마치고
오가키에서 옛 문우들을 만난 다음 배를 타고 참배를 위해 이세로 떠났다.
[20]
다른 지역에서 와 미에현만 여행 후 다시 떠난다면 마와랸세가, 와카야마까지 갈 생각이라면 JR 투어리스트 패스가 낫다.
[21]
킨테츠 일반 레일패스 및 레일패스 +에서는 특급권이 칼질당했다.
[22]
사실 신사들 대부분은 배전 안에서 사진을 찍지 못하게 한다.
[23]
미츠이시가 있는 쪽에서는 다리의 오른쪽에 서서 대각선으로 보면 된다.
[24]
흔히 일본
신사에 들어가면 배전 앞에 물이 고인 네모난 석통이 있는데, 위에는 나무 국자를 올렸다. 석통이 있는 자리를 데미즈야/초즈야 등으로 부르는데, 신령을 만나기 전에 몸을 정결히 하고자 손과 입을 씻으라는 것이다. 간이 목욕재계라고 할 수 있다. 한국에는 이런 관습이 없기 때문에 한국인 관광객들이 흔히 '약수'인 줄 알고 물을 떠 마시지만 이는 잘못이다. 손과 입을 씻을 생각이 없다면 그냥 지나가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