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사키오스 1세
동로마 제국의 군인, 황제. 항목 참조2. 요안니스 콤니노스의 차남
(1050 – 1102/1104)안나 콤니니에 의하면 신체적으로는 동생 알렉시오스와 비슷했지만, 피부가 더 창백하고 수염이 적었다고 한다. 성격이 급했다고 하는데, 이는 전투에 나서면 전위에 나서려고 하는 그의 행동과 맞물려서 여러 차례의 포로생활을 하게 만들었다(...).
로마노스 4세의 재위기에 군인 가문들이 실세로 복귀하고 콤니노스 가문이 황제의 사돈집안이 되면서 형 마누일과 함께 지휘관으로 활동했다.1072년 즈음에는 알라니아의 마리아의 사촌인 알라니아의 이리니와 결혼했다. 두카스 왕실이 여러모로 콤니노스 가문을 가깝에 역어두려했던 것의 일환이었을 것이다. 이 덕분인지 1073년에는 동부군 총사령관으로 발탁되어 대 튀르크 전선에 나섰는데, 케사리아 인근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패하여 포로로 잡혔다.
제국 정부로부터 몸값이 지불되어 풀려난 이후엔 1073/1074년즈음 안티오히아의 둑스(Doux)로 발령받는다. 안티오히아 도독은 반독립적인 세력을 구축하기 좋은 타우로스 산맥 동쪽의 안티오히아, 킬리키아, 텔루크(Teluch)의 세 관구를 통솔하는 자리였고, 안티오키아 총대주교구가 위치해있었으며, 키프로스에서도 지척이었으므로 그야말로 엄청나게 중요한 직위였다. 그러나 이사키오스는 튀르크와의 전투에서 다시 포로로 잡혀버렸고, 그의 몸값을 지불하기 위해 안티오히아의 시민들이 금화 2만전을 제공해야했다.
1078년에는 수도로 귀환했는데, 이 때는 이미 황제가 바뀌어 니키포로스 3세가 제위에 올라있었다. 당시 두카스 가문의 상징적 대표인 황후 알라니아의 마리아나 두카스 가문은 이래저래 불만이 많았는데, 두카스 가문의 실질적 대표인 요안니스 두카스의 손녀 사위인 알렉시오스 콤니노스가 전공을 쌓아가고 황후의 인척인 이사키오스가 알렉시오스와 함께 황후와 가까워지자 이를 경계한 황제의 심복들은 형제를 제거하려 하였다.
그 즈음 수도에서 지척인 키지코스(Kyzikos)가 니키포로스 멜리시노스가 반란을 일으키면서 끌어들인 튀르크인들에 의해 함락(1080)되자 제국군 총사령관인 알렉시오스는 출진을 명받는데, 이 때 소집할 병력을 이용하여 형제는 자신들의 가문은 물론 두카스 가문까지 끌어들이는 쿠데타를 실행한다. 경력만은 화려했던 이사키오스는 쿠데타동안 황제후보로 고려되기도 하였으나, 전공으로 보나 직위로 보나 두카스 가문과의 관계로 보나 동생측이 더 나았으므로 이사키오스는 황제의 상징인 보라색 신발을 직접 동생에게 신겨주어 내분을 피했다.
친형인데다 연장자인데도 제위를 양보했던 덕분인지 쿠데타가 성공한 이후에는 동생 알렉시오스 1세에게 신임받아 제국의 2인자인 세바스토크라토르(Sebastocrator) 칭호를 받았으며, 동생의 통치를 조력하였다. 동생 알렉시오스 1세의 치세 초반은 친정(親征)이 잦아 수도를 자주 비웠는데, 이사키오스는 어머니 안나 달라시니와 함께 수도를 지키고 황제를 대행하는 일을 맡았다. 재위 초반의 알렉시오스 1세가 국정 전반에 경험이 부족했고 신경쓸 틈도 없었음에도 어떻게든 치세를 이어간 점이나, 조카인 안나 콤니니가 나쁜 평을 남기지 않은 것으로 보아 아무래도 군재보다는 다른쪽에 능력이 뛰어났던 모양이다(...). 아내 이리니와의 사이에서 다섯 자녀를 두었고, 노년에는 아내와 함께 수도원으로 은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