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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동명이인)

* 동명이인
1. 조선의 인물
1.1. 성종, 연산군 시절의 문신1.2. 선조, 인조 시절의 문신, 학자1.3. 조선 중기의 왕족1.4. 조선 중기의 무신1.5. 인조, 숙종 시절의 의사1.6. 효종, 숙종 시절의 학자
2. 중국의 인물
2.1. 명나라의 인물2.2. 청나라의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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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선의 인물

1.1. 성종, 연산군 시절의 문신

李蕃
1463~1500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여주(驪州), 자는 숙한(叔翰). 아버지는 참군(參軍) 이수회(李壽會)이며 성리학자로 명성을 떨쳤던 이언적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성종 시절 왕이 문학을 즐겨하여 전국 관찰사에게 명하여 도내 유생으로 하여금 제술을 지어 올리도록 하였는데, 이번은 경주교생으로서 1493년(성종 24)에 시(詩)·부(賦)에서 2등하고, 제술에서 수거(首居)하였다.

성종으로부터 이번의 글이 인정되어 궐내로 들어가 다시 시부를 제진하는 영광을 받기도 하였다. 1495년(연산군 1)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생원이 되고 성균관 유생으로 수학하다가 죽었다. 찬성에 추증되었다.

1.2. 선조, 인조 시절의 문신, 학자

李𤄫
1575~1633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학자.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태원(太原), 호는 낙강(洛江) · 낙주재(洛洲齋)로 효령대군의 7대손이다. 아버지는 부호군 증호조참판 이사제(李思齊), 어머니는 청주한씨(淸州韓氏)로 증조는 청평군(淸平君) 한언(韓堰)이며, 사과(司果) 한용(韓鏞)의 딸이다.

12세에 이원익(李元翼)의 문하에 들어가 문하에 들어가 공부하고, 이어 김장생(金長生) 문하에도 출입하였다. 이번의 학문적 교유는 넓어서 윤황(尹煌) 형제와 정온(鄭蘊)·허후(許厚) 등의 영향도 받았다. 임진왜란 류성룡의 천거로 영릉참봉에 임명되었고, 바로 도체찰사였던 유성룡을 수행하며 문서를 관리하고 각종의 명령서를 기초하였다. 이 때의 공로로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난 후에 선무공신 1등의 녹권을 받았다.

그 후 사헌부감찰·연산현감·청하현감·봉화현감 등을 거치다가 인목대비가 서궁에 유폐될 때 대비의 근척(近戚)이라는 이유로 파직당하였다. 인조반정 때 구인후(具仁垕)를 도와 거사하여 성공시킨 후 정사원종공신(靖社原從功臣)의 녹권을 사양하고 처향(妻鄕)인 밀양으로 낙향하였다.

이번의 학문은 실천을 중시하였는데 담박(淡泊)함과 청정(淸淨)함을 좋아하였으며, 자손들의 교육에는 염치(廉恥)를 강조하여 그것이 사람을 금수와 다르게 하는 것이라 하였다. 인조와 인목대비가 여러 차례 벼슬로 불렀으나 나가지 않았다.

박홍미(朴弘美)·조즙(趙濈)·유여각(柳汝恪)·정창시(鄭昌詩)·방두원(房斗元)·전경(全儆)과 친하게 지냈는데 당시 사람들이 죽림칠현으로 비유하였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저서에는 『낙주재실기(洛洲齋實記)』가 있다.

1.3. 조선 중기의 왕족

豊萊君 李瀿
1593~1647

조선 중기의 왕족.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경담(景淡)으로 덕흥대원군의 증손이며 풍래군이라고 불렸다. 선조의 백형 하원군(河原君)의 손자이자 아버지는 종실 당은군 이인령(唐恩君 李引齡), 어머니는 풍양군부인 조씨(豊壤郡夫人 趙氏)로 부인은 현령 증 참찬 안동인 김광위(金光煒)의 딸로 군부인 김씨다.

당은군의 4남으로 1593년(선조 26) 1월 13일 한성 서부 인달방 도정궁(都正宮)에서 탄생하였다. 처음 양천부정(楊川副正)에 봉작되고, 광해군이 대원군묘(大院君廟, 덕흥궁)에 친제할 때 집사로 봉무하고, 명선대부로 가자되었다.

1622년(광해 14) 유학(幼學) 안홍지(安弘止)의 거짓 고변으로 무고를 당하고 옥에 하옥되었다가 인조가 즉위 후에 곧 풀려났다. 유학 안홍지는 사형되었으며, 그리고 인조가 사친을 추봉하여 원종으로 하고, 종묘에 봉안하고 공고제를 지낼 때 집사로 봉무하였으며, 정의대부 풍래군(豊萊君)에 봉작되었다.

1635년(인조 13) 인렬왕후 한씨가 산후병으로 승하하여 혼전제관으로 대장례를 맡치고, 중의대부에 가자되었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몽진할 때 어가를 호종하였으며, 공로로 승헌대부 겸 오위도총부 도총관에 제수되었다.

1644년(인조 22) 영국원종공신(寧國原從功臣)에 훈록되고, 현록대부에 가자되었다.

1647년(인조 25) 10월 13일 향년 55세로 사망하였다. 인조가 소식을 듣고 부의를 넉넉히 내리시고, 치제하게 하고 장남 이준한(李俊漢)은 영국원종공신으로 책록되고 현록대부에 가자되었다. 이해 겨울에 과천현 남쪽 화산에 예장하였다가 그 후 을묘년 수원 이목동으로 이장하였다. 경진년 8월 24일 광주부 왕윤 오마동 을좌신향으로 이장하였다가 다시 1939년 전남 장성군 북일면 성산리 누태부락 후록 자좌로 이장하였다.

군은 평일에 독서를 좋아하고, 특히 필법이 정연하여 직접 쓴 경전 10여권과 고시 1부를 제자와 여러 아들들에게 물려주기도 하였다.

아버지 : 당은군 이인령(唐恩君 李引齡, 1562년 - 1615년), 도정궁 사손.
어머니(계모) : 밀양군부인 박씨(密陽郡夫人 朴氏, 1562년 - 1588년), 밀양인(密陽人) 판서(判書) 박계현(朴啓賢)의 3녀.
어머니(생모) : 풍양군부인 조씨(豊壤郡夫人 趙氏, 1571년 - 1629년), 풍양인(豊壤人) 현령(縣令) 조희철(趙希轍)의 딸.
부인 : 군부인 김씨(郡夫人 金氏, 1593년-1670년), 현령 증 참찬 안동인 김광위(金光煒)의 딸.
장남 : 이준한(李俊漢, 1621년 - 1674년), 영국원종공신.
2남 : 이인한(李仁漢, 1627년 - 1684년)
3남 : 이신한(李信漢, 1638년 - 1656년)
4남 : 이의한(李儀漢, 1646년 - 1699년)
장녀 : 군수 덕수인 이희준(李喜俊)에게 출가.
2녀 : 부사 능성인 구문제(具文濟)에게 출가.
3녀 : 찰방 청주인 한태유(韓泰兪)에게 출가.
4녀 : 군수 한산인 이서우(李瑞雨)에게 출가.

1.4. 조선 중기의 무신

李蕃
생몰년도 미상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재령(載寧), 자는 사영(士英), 호는 남계(南溪)로 아버지는 이희만이다.

어릴 때부터 큰 뜻을 품고 강개하고 대범한 면모를 갖추었더니 1592년 임진왜란 때 아우인 이분, 종제인 이홍훈과 더불어 곽재우를 따라 화왕산성에 들어가 왜적에 대항하였다. 또, 이순신을 따라 바다에서 싸워 군공을 세웠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3 「충의조(忠義條)」에 이름이 올랐다.

1.5. 인조, 숙종 시절의 의사

李蕃
1641~1708

조선 후기의 의사. 본관은 연성(延城), 자는 중거(仲擧), 이식(李植)의 손자다.

그는 당시 유행하였던 두창(痘瘡)에 대해 의인으로 경험한 바를 종합하여 1672년(현종 13)에 『용산요두편(龍山療痘編)』을 저술하였다.

1.6. 효종, 숙종 시절의 학자

李燔
1657~1704

조선 후기의 학자. 본관은 함평(咸平), 자는 희경(希敬), 호는 몽재(蒙齋)로 청양 출신. 아버지는 영릉참봉(寧陵參奉) 이주길(李柱吉)이다.

총영(聰潁)하여 글 읽기를 좋아하였다. 윤증(尹拯)에게 수업을 받고 학문을 익혀가면서 우리나라 학자의 예설을 강구변증(講究辨證)하고 경전의 미사오지(微辭奧旨)나 의장문물(儀章文物) 등에도 깊이 관심을 가져, 의심나는 바를 뒤에 스승에게 서신으로 물었다. 또, 성력(星曆)·시책(蓍策)·병가(兵家) 등에 이르기까지 두루 통효(通曉)하였다. 저서로는 『차록(箚錄)』5권이 있다.

2. 중국의 인물

2.1. 명나라의 인물

李蕃
생몰년도 미상

명나라 말기의 인물. 일조현 후마장(오늘날의 조시 산구 후촌진 후마장) 사람으로 진사를 지냈다.

2.2. 청나라의 인물

李蕃
1621~1694

청나라 초기의 인물. 자는 석정, 호는 나암으로 통강 사람. 1657년에 과거에 합격하여 관리가 되었다. 저서로는 '설홍당 문집' 18권이 있으며, '사고총목'이 세상에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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