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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31 15:51:43

의인왕후 김씨

대한 추존 황후
懿仁皇后 의인황후
조선 제15대 왕비
懿仁王后 의인왕후
선렬의성[A]의인왕후
宣烈懿聖懿仁王后
선렬의성[A]의인황후
宣烈懿聖懿仁皇后
존호 선렬의성(宣烈懿聖)[A]
시호 의인(懿仁)[4]
출생 1554년(명종 원년)
조선 한성부
사망 1619년(경종 11년)
조선 한성부 경복궁[5]
능묘 장릉(莊陵)
재위 조선 왕비
1567년 ~ 1608년 12월 22일
(음력 1567년 ~ 1608년 11월 16일)
조선 왕대비
1608년 12월 22일 ~ 1619년
(음력 1608년 11월 16일 ~ 161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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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
전호 □□전(□□殿)
부모 □□부원군 김□□, □□부부인 이씨
부군 조선 장조
자녀 2남 2녀 }}}}}}}}}

1. 개요2. 작중 행적3. 기타

1. 개요

명군이 되어보세! 2부의 등장인물. 원 역사 선조 포지션인 경성군=장조의 왕비이다.

경성군의 중전으로 이장곤과 다지의 외손녀이다. 1554년생.[6]

2. 작중 행적

종친이던 경성군과 혼인해 경성군부인이 되었다가 경성군이 명종의 뒤를 이어 즉위하자 김씨 또한 중전이 되었다. 이후 왕세자를 낳으며 15년 동안 왕비 노릇을 했지만, 1582년 암군이었던 남편 경성군에게 재석이 빙의하면서 김씨 또한 인생이 달라지게 된다.

감이 좋아서 재석이 경성군에 빙의한 후 영혼이 바뀌었다는 것을 확실하게 눈치챘지만 재석이 임금으로서의 능력이 괜찮은 걸 보고 자신과 세자만 내치지 않는다면 문제 삼지 않기로 한다. 자신이 회임했다고 재석에게 밝혔는데, 어의를 통하지 않고 중전이 직접 회임을 알려줘서 재석이 기뻐하자 자신은 회임할 때마다 어의를 거치지 않고 직접 경성군에게 알려줬다는 사실을 밝혀서 재석을 잠깐 당황하게 했다. 사실 중전은 간섭을 안 했을 뿐이지 현상 유지를 중시하고 철저하게 절약 위주로만 흘러가는 원래 경성군의 성향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고, 성격은 오히려 재석과 잘 맞는 편이다.

재석이 왕세자빈 간택은 전적으로 왕비에게 맡겨서 본인 뜻대로 진행했는데,[7] 하필 삼간택 직후에 차차가 왕세자빈 자리를 노리고 조선에 방문하자 재석이 당장 삼간택한 처자 전부 왕세자의 처첩으로 들이라 명령해 식을 앞당겼고, 차차가 왕세자빈 책봉식 때 일본에서 하던 대로 화려하게 꾸미고 나와 결례가 되어 재석이 오다 나가마스[8]를 불러 질책하거나, 이때 꾸미고 나온 모습을 보고 혹한 임해군이 차차를 강간하려다 시녀 유키를 대신 강간했다 잡혀서 처형당할 뻔했다가 임해군을 봉 잡으려 한 차차의 뜻에 따라 결혼하는 등의 여러 해프닝이 일어났다.

재석과 상희 사이의 묘한 기류를 눈치채고[9] 재석이 중인 출신이라 뒷배경이 없는 상희를 후궁으로 삼게 해 다른 후궁들의 영향력을 차단하는 등 눈치와 처세술이 모두 뛰어나다. 다만 일본과의 전쟁 준비를 이해하지 못하는 등 국제 정세를 읽는 눈은 당시 조선 사람들과 똑같은 수준인 듯하다.[10]

왜란 발발 시에도 친정을 나가는 재석을 믿고 국모로서 의연하게 자리를 지킨다. 40대가 되었지만 20대로 보일 만큼 미모를 유지하고 있으며 여전히 승마가 능숙하다. 외조모 다지의 일대기를 연극으로 만든 고다지전의 극본을 직접 집필했는데 재석도 놀랄 정도로 뛰어난 작품을 내놓았다.

재석이 폐렴에 걸려 임종하는 순간을 지키며, 재석은 그동안 자신의 개혁 정책을 든든히 뒷받침해 준 고마움에 임종하기 직전 자신이 무종이라는 것을 알려주려 했지만, 당신이 누구든 그동안 서로 사랑하며 살던 내 남편이라며 듣지 않았다. 사실 처녀적 다지를 봤다는 말은 들었고 중전 본인도 경성군이 다른 사람이 되었다는 것은 눈치챘으니 경성군이 무종이라는 것은 충분히 알아들었을 것으로 보이지만, 진실이 무엇이든 상관하지 않고 남편이자 임금으로 섬기기로 결심한 것으로 보인다.

장조가 승하하여 왕세자가 즉위하자 의성왕대비라는 존호를 받고 왕대비가 되어 장조를 그리워하며 잘 지내고 있는 모습이 나온다. 아들의 재위를 보며 평화롭게 살다가 만65세에 자연사했는데, 시대를 생각하면 꽤 장수했다. 재위기간도 길어서 남편을 따라 장장 41년이나 중전으로 재위했으며 이후 아들의 치세 11년 동안 왕대비로 재위하였다. 사후 의인왕후의 시호를 받았고 후일 장손 선조가 칭제건원하면서 황후로 추존되었다.
3부에서 저승의 상황을 다룬 외전에 따르면 저승에 오자마자 사랑하던 남편을 찾았으나 저승에서 만난 경성군의 영혼이 재석이 아니라 성질 고약한 원래 경성군임을 알고 크게 상심했으며, 재석이 임종 때 한 말이 사실이었음을 그제야 깨닫는다. 같은 처지인 무종 비 성렬왕대비 신씨와 자주 만나 서로를 위로하면서 진짜 재석의 영혼을 찾고 있다. 양시증조할머니와 남편이 같다는 실로 난감한 상황이다.(...)[11]

다만 아직 상빈 이씨와 인현황후 민씨가 같은 상희라는 것과 재석과 상희가 미래인이고 이 두 사람의 윤회가 끝나려면 멀었다는 사실까지는 모르고 있다. 4부에서 상희의 윤회가 끝났다는 떡밥이 나왔지만 상희의 정체가 정체인지라 저승에 간 게 아니라 원 역사 또는 개변된 세계의 21세기로 갔을 거라는 게 정설이라서 한동안 만날 일은 없을 듯하다.

3. 기타

본격적으로 원 역사와 달라지며 가공인물 중심으로 재편되는 과도기였던 2부의 특성을 보여주는 인물 중 한 명이다.

왕비로서의 재위기간(1567~1608)은 원 역사 의인왕후(1569~1600)와 인목왕후(1602~1608)를 합친 것과 비슷하며, 왕대비 재위기간(1608~1619)도 인목왕후의 1차 왕대비 재위기간(1608년~1618)과 비슷하다.

모티브는 원 역사의 의인왕후 박씨이나 다른 사람이다. 단 원 역사와 마찬가지로 본작에서도 박씨는 하성군(원 역사 선조)의 정실부인이며 아이가 없었다.

다지처럼 현대적인 외모의 미녀에 당돌한 성격으로 재석은 다지가 백정이 아닌 양반가에서 태어났다면 이런 성격이었으리라고 생각한다. 다지를 무서워하던 재석은 2부에서도 다지의 외손녀라는 말에 다지를 떠올리며 쫄기도 했다.

미모에 대한 기준이 높은지 왕세자빈을 간택할 때 '보통 외모'를 골랐다고 말했는데, 직접 본 재석은 나름 예쁘장한 편이라서 본인 기준으로 평범했던 거냐는 감상을 남겼다.

어릴 적에는 몰래 마구간에 들어가 말을 타고 놀거나 남편감은 자기가 직접 고르겠다고 생떼를 쓰는 등 천방지축이었고, 지금도 겉으로만 얌전하지 본래 성격이 그대로 남아있다. 궁녀들에게 불같이 화낼 때가 많은데, 이를 두고 백정 혈통 때문이라며 뒷담하는 궁녀들이 있는 모양. 그래도 사람 보는 눈이나 대우는 괜찮아, 재석도 "중전이 치하하라고 하는 사람을 치하하면 문제가 생긴 적이 없다"고 한다.

매우 실리주의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있어 고름의 분말을 주사하는 우두법도 거부감 없이 세자와 왕자, 공주들에게 시행해 달라고 해 재석의 우두 사업에 힘을 실어주고, 사림파들을 축출하기 위해 역모 혐의를 조장하는 과정에서 명분을 제시할 실마리를 귀띔해주고, 재석이 일본의 반 노부나가 세력을 회유하기 위한 메시지로 첫째 옹주를 사나다 노부시게의 아내로 주겠다고 한 것에도 찬성하는 등 큰 도움을 준다. 이 점은 본인부터 백정의 외손녀라서 신분이나 출생에 따른 차별의식이 희박하고 개방적인 사고방식을 지녔기 때문이기도 하다.

다만 이건 후궁이 낳은 자식들도 중전의 자식들로 취급받기에 중전이 본인 자식이 아님에도 옹주의 혼약을 찬성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던 것인지라, 옹주의 친모인 후궁은 자기 딸을 어디 반듯한 양반가 자식도 아니고 왜인한테 시집 보낸다는 청천벽력 같은 결정에 충격과 공포에 빠졌고, 결국 동병상련의 처지에 있는 상희가 가서 달래줘야 했다.[12]


[A] 의성은 원 역사 의성왕대비 인순왕후의 존호로 나머지 두 글자는 여기에 대응해서 추정. [A] [A] [4] 원 역사 의인왕후의 시호. [5] 작중 묘사 없음. 추정. [6] 원 역사 의인왕후 박씨(1555년생)보다 1살 연상이다. [7] 왕세자가 자신의 아들이 아니라 경성군의 아들이라 처음에는 관심을 덜 가진 것도 있었다. [8] 오다 노부나가의 남동생으로 차차의 외숙부이다. [9] 단 재석과 상희가 연심을 품고 있다는 정도까지만 알았다. 물론 무당이 아닌 이상 전생에 부부였다는 초자연적인 부분은 모르는 게 정상이다. [10] 실제로 재석이 현대인이라 미래를 알고 있었던 것뿐이지, 저 시대 조선 사람들은 신료들을 포함해 전부 저랬다. [11] 의인왕후의 남편 경성군은 무종(연산군)의 손자 명종의 양자라서 양증손자였다. [12] 상희의 딸은 재석의 뜻에 따라 아이신기오로 누르하치의 두 아들인 다이샨과 홍타이지에게 시집 갔는데, 아무리 강성한 세력이라지만 한낱 오랑캐 추장의 아들에게 왕녀를 시집 보낸다는 건 굴욕이었다. 나중에 만력제가 아무 생각 없이 누르하치를 건주왕으로 책봉하고 왕비가 되었다 명나라가 멸망한 뒤 다이샨과 누르하치가 각각 청과 후금의 황제가 되면서 잭팟을 터뜨리기는 하지만, 당시에는 말이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