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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6-12 15:00:39

율리아 리비아

Julia Livia | 율리아 리비아
이름 율리아 리비아
(Julia Livia)
왕조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출생 서기 7년
로마제국 이탈리아 로마
사망 서기 43년(향년 36세)
로마제국 이탈리아 로마
직위 로마 공주
부모 드루수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아버지), 리빌라(어머니)
형제자매 티베리우스 게멜루스(동생), 게르마니쿠스 게멜루스(동생)
배우자 네로 카이사르
가이우스 루벨리우스 블란두스
자녀 루벨리아 비사(수양딸), 루벨리우스 플라우투스, 루벨리우스 드루수스(요절)


1. 개요2. 생애
2.1. 어린 시절2.2. 네로 카이사르와의 결혼생활과 그 악행들2.3. 의문스러운 재혼2.4. 몰락
3. 평가

1. 개요

전체 이름에서 드러나듯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공주로, 2대 황제 티베리우스의 손녀다. 티베리우스의 친아들로, 아우구스투스의 법적 손자인 드루수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그 아내인 리빌라 사이에서 태어난 세 아이 중 첫째다.

아버지는 아우구스투스의 피를 잇지 않았으나, 아우구스투스 생전 후계자로 결정된 황족 중 한명이며, 어머니 리빌라는 대 드루수스 소 안토니아의 외동딸, 로마 황제 클라우디우스 1세의 누나, 로마 제국의 황태자이자 장군 게르마니쿠스의 여동생이며, 로마 황제 칼리굴라의 고모다. 따라서 부모를 통해 아우구스투스, 리비아 드루실라, 소 옥타비아의 피를 모두 이은 아우구스투스 직계 황족이 된다.

서기 36년, 아들 루벨리우스 플라우투스를 제위에 앉히고자 세를 모으고, 불륜과 근친상간 등을 벌인 혐의로 기소돼 사형을 언도받았다가, 사형 집행 전 자살했다. 사후, 반역죄 유죄판결을 받은 이들처럼 사실상 모든 영예, 명예가 박탈되고 모든 재산이 압류됐다.

2. 생애

2.1. 어린 시절

양증조부 아우구스투스 통치 말년인 서기 7년, 로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드루수스 율리우스 카이사르(통칭: 소 드루수스)는 아우구스투스의 아내인 황후 리비아 드루실라가 첫남편에게서 얻은 장남 티베리우스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의 딸 빕사니아 아그리피나와 결혼해 얻은 아들이다. 따라서 부계를 통해 아우구스투스 피를 이어받지 못했다. 그렇지만 율리아 리비아는 어머니 리빌라를 통해, 아우구스투스의 누나 소 옥타비아의 피를 이었고, 소문상 외조부 대 드루수스가 아우구스투스의 친아들이라는 말이 돌고 아우구스투스 역시 이를 믿어 아우구스투스에게는 친혈육으로 인정받았다.

아버지 소 드루수스는 티베리우스가 로도스 섬으로 은거한 뒤, 아우구스투스 손에서 직접 성장해 총애를 받았고, 어머니 리빌라가 아우구스투스 부부의 사랑을 듬뿍 받은 만큼, 탄생부터 아우구스투스에게 사랑을 듬뿍 받았다. 이런 배경 때문에 서기 14년 아우구스투스는 병석에서 자신의 어린 증손녀 율리아 리비아가 병에 걸렸다는 소식을 듣자, 아내 리비아 드루실라에게 "율리아는 다 나았소이까?"라고 그 안부부터 물었다고 한다.

2.2. 네로 카이사르와의 결혼생활과 그 악행들

아우구스투스가 죽자 율리아의 친할아버지인 티베리우스가 로마의 두 번째 황제가 됐다. 이 해에 아버지 소 드루수스는 정식으로 원로원에 "아우구스투스의 손자"로 소개된다.

대개의 로마 귀족 여성들처럼 결혼 적령기인 14~18세 이전, 결혼상대자가 정해지는 로마 관습에서 율리아 리비아의 배필이 누구였는지는 확실치 않다.

그녀가 16세 생일이 될 무렵, 할아버지 티베리우스의 결정으로 법적 사촌 오빠이며 혈연상 친가로는 6촌, 외가로는 4촌 사이인 네로 카이사르( 게르마니쿠스 대 아그리피나의 장남)와 결혼한다. 이 결혼은 게르마니쿠스 요절 후, 소 드루수스가 뒤를 이은 뒤 제위계승구도를 명확히 한 결정이었다. 그렇지만 율리아 리비아의 결혼은 시작부터 어머니 리빌라의 개입과 질투로 파열음이 일고, 소 드루수스가 급사하면서 흔들리기 시작한다. 여기에 악명 높은 근위대장 세야누스가 개입하면서 남은 결혼생활은 불행하게 끝나고 만다.

세야누스는 율리아의 어머니 리빌라와 일찍부터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는데, 소 드루수스 생전부터 불륜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러다가 이들은 소 드루수스가 세야누스의 본심(제위 찬탈)을 알고 대립하다가 급사한 직후부터 공식적인 연인이 된다. 따라서 세야누스는 리빌라를 이용해, 쉽게 황실 가족들의 일에 개입했다.

어릴 적부터 어머니와 유대관계가 대단했던 율리아는 어머니 리빌라처럼 세야누스와 사이가 무척 각별했다. 따라서 리빌라와 그 연인 세야누스를 따라, 게르마니쿠스 일가를 제거할 계획 음모에 동참한다.

타키투스의 기록에 따르면, 율리아 리비아는 남편 네로 카이사르가 말을 하거나, 침묵해도 모두 세야누스 일당에게 전달해 네로 카이사르와 그 어머니 대 아그리피나, 시동생들인 드루수스 카이사르, 가이우스(후일의 칼리굴라), 소 아그리피나 등을 궁지로 몰았다. 여기에 더해 율리아는 시간이 지날수록 남편 네로 카이사르를 이유없이 증오해 긴장상태로 몰고 갔는데, 이때 남편 네로 카이사르가 밤낮으로 잠을 못 이룰 정도로 답답해하자 이것까지 보고해 세야누스 일당이 게르마니쿠스 일가를 멸족하려고 하는데 큰 힘을 보탰다.

따라서 서기 29년 후반, 세야누스의 음모와 거짓 증언으로 티베리우스의 서한을 시작으로 네로 카이사르와 대 아그리피나는 반역죄로 기소됐다. 이때 네로 카이사르는 원로원에서 두 번의 재판을 받고, 공공의 적으로 선언받은 다음 쇠사슬에 묶어 폰티아 섬으로 유배됐다. 그는 이듬해, 세야누스가 몰락하기 직전 이곳에서 자살 혹은 처형되는데, 디오 카시우스는 율리아가 세야누스와 약혼했다며 율리아 리비아가 어머니 리빌라처럼 세야누스와 불륜관계 역시 맺고 있었음을 간접적으로 말하고 있다.

이렇게 율리아 리비아는 남편 네로 카이사르를 몰락시켰는데, 이후 어머니 리빌라, 근위대장 세야누스와 함께 시동생 드루수스 카이사르 몰락에도 힘을 보탠다.

2.3. 의문스러운 재혼

서기 31년 10월 31일, 세야누스가 완전히 몰락하고 어머니 리빌라 역시 죄가 드러나 죽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2년이 흘러 서기 33년이 된다. 이때가 되면 리빌라에 대한 추가조사, 네로 카이사르 죽음 진상파악 조사에 이어 티베리우스 황제의 정식 후계자 드루수스 카이사르 명예회복과 석방 준비가 시작된다. 그런데 그 해, 율리아 리비아는 뜬금없이 결혼식을 올린다. 재혼대상이 된 이는, 서기 18년 집정관을 지낸 기사계급 신분의 신참자 가이우스 루벨리우스 블란두스였다. 루벨리우스 블란두스는 집정관 경력자이자 조부 때부터 엄청난 부자임에도, 또 로마에서 귀족과 평민의 결혼이 있던 상황 속에서도 "사회적 재앙"으로 큰 비난을 받았다.

그 이유는 남편이 된 블란두스의 행보 외에도 율리아 리비아가 결혼한 해에 아들 루벨리우스 플라우투스를 출산해 이들이 일찍부터 불륜 관계였다는 것이 들통난 것 등이 컸다. 이 해에 드루수스 카이사르는 석방 직전, 노예들이 감옥 관리를 소홀히 하고 음식을 공급하지 않고 폭력을 가해 죽었다. 그런데 이 사실이 프라이토리아니, 황실 해방노예들에게 발각돼, 상황은 걷잡을 수 없게 된다. 머리 끝까지 열받은 티베리우스 황제와 원로원은 조사 진행 후, 모든 관련자와 그 일가를 모조리 죽여 그 시체를 티베르 강에 던지는데, 여기에서 불륜으로 시작된 의문스러운 결혼과 속도위반으로 얻은 아이를 출산한 일까지 들통나자, 로마 사회는 분노한다.

티베리우스 황제는 이 사실을 안 뒤 크게 침통해하고 분노했다. 그는 이 시기, 손자 티베리우스 게멜루스와 종손자 가이우스(칼리굴라), 종손녀 세 자매 및 조카 클라우디우스 일가를 과보호할 정도로 과거와 달리 친족에게 관심을 쏟고 있었다. 그럼에도 티베리우스는 손녀 율리아 리비아에 대해 어떤 말도 꺼내지 않았다. 되레 그녀의 비밀 임신과 깜짝 재혼 소식을 보고를 받았음에도 어떤 말도 하길 거부했다. 황제는 그녀의 결혼을 무시했고, 그녀를 아예 없는 사람 취급했다. 이는 원로원, 지식인, 평민들도 비슷했다. 그들은 율리아 리비아의 재혼을 "중년 사내와 20대 공주의 일탈된 불륜과 재혼", "불륜과 거짓으로 벌어진 황실의 비극 속에서 피어난 부도덕의 완결판"이라고 여겨 혐오감을 드러냈다. 더욱이 율리아 리비아는 증거가 확실치 않아 기소되지 않았을 뿐, 게르마니쿠스 일가를 거짓증언으로 몰락시킨 혐의도 있어, 로마 원로원은 티베리우스의 반응을 이해한다는 자세까지 취했다. 그 결과, 율리아 리비아의 재혼은 "로마를 슬프게 한 많은 슬픔"로 불리게 됐고, 그해 태어난 첫 아이 루벨리우스 플라우투스는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아이' 내지 '로마를 슬프게 한 많은 슬픔'으로 인식됐고, 일부에게 저주를 받았다.

율리아 리비아는 의붓딸 루벨리아 바사 외에 재혼을 통해 두 아들을 얻었다. 이중 차남인 루벨리우스 드루수스는 세 돌이 될 무렵 요절했다.

2.4. 몰락

재혼 이후, 율리아 리비아는 아들을 두 명이나 낳고 큰 물의를 일으키지 않는다. 도리어 귀부인으로 살면서 여러 인맥을 모으고 유덕한 이미지까지 얻었다고 한다. 허나 조부 티베리우스는 그녀를 끝까지 용서하지 않았다. 이는 그녀의 개입으로 두 형과 어머니를 잃은 사촌동생 가이우스(칼리굴라) 역시 비슷했다. 그는 그녀를 끝까지 용서하지 않았고, 없는 사람으로 취급했다.

이런 상황에서 서기 37년 티베리우스가 노환으로 세상을 떠나고, 그 뒤는 칼리굴라와 율리아 리비아의 동생 티베리우스 게멜루스가 유언장상으로 공동승계한다. 그러나 원로원은 "가이우스 카이사르 게르마니쿠스(칼리굴라)만의 단독승계를 허락한다"고 프린켑스 직을 칼리굴라에게 내렸고, 8개월 뒤 그녀의 동생 티베리우스 게멜루스는 반역죄로 자결형을 선고받고 죽는다.

이렇게 동생이 죽게 되자 율리아 리비아는 숨 죽이고 산다. 이런 가운데 서기 38년 남편 루벨리우스 블란두스가 병으로 죽는다.

서기 43년 경, 로마 사회에서 잊혀진 율리아 리비아가 반역죄, 근친상간 및 간통, 부도덕 혐의로 기소돼 떠들썩해진다. 이 당시 율리아 리비아는 아버지 소 드루수스에 대한 평판이 좋고, 본인 역시 숨죽여 살면서 주변에게 워낙 잘해 인망을 얻고 유덕한 이미지까지 얻은 상태였다. 그래서 고대 기록들은 메살리나 황후가 남편 클라우디우스 1세를 속여 거짓기소했을 것이라고 표현한다. 그러나 메살리나와 원로원 인사들은 여러 증거를 내밀었고, 그 증거는 거짓 증언이 아니었다. 하여 고대기록들은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증거가 너무 많아 조카를 보호하려고 하다가 포기하고 기소했다고 한다.

이 기소 당시,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자신의 혈육(누나 리빌라의 딸)인 율리아 리비아 만은 살려주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어머니 율리아 리비아가 자신의 아들 루벨리우스 플라우투스, 루벨리우스 드루수스 등에게 제위를 안겨 주고 싶어했고, 이를 위해 세력을 규합했다는 것이 드러난다. 여기에 더해, 메살리나가 자신의 아들인 브리타니쿠스를 위해, 가세하자 상황은 더 복잡해진다. 이렇게 되자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율리아 리비아에 대한 변호를 받아들이지 않고, 엄격한 조사를 명한다. 이는 원로원도 비슷했다. 그들 역시 기소부터 수사 과정 내내 증거가 너무 많이 나오자, 그녀에 대한 좋은 평가 역시 감경사유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은 메살리나와 친황제파 인사들의 주장을 받아들인다.

따라서 클라우디우스는 재판을 통해, "칼로 처형한다"고 결론을 내리고 이를 판결한다.

율리아 리비아와 루벨리우스 플라우투스는 황족으로 누릴 특권을 받지 못했다고 해도, 엄연히 황제의 친족인 것은 변함없었다. 그렇지만 율리아 리비아는 세야누스가 게르마니쿠스의 두 아들 네로 카이사르, 드루수스 카이사르에게 누명을 뒤집어 씌워 제거할 때, 적극 합세한 악행이 있어 이를 갈고 있는 이들이 상당히 많았다. 더욱이 옛 티베리우스 지지세력들에게 그녀는 남편 네로 카이사르를 배신하고, 아버지 소 드루수스와 조부 티베리우스의 명예를 실추시킨 일로 큰 지지를 받지 못했다. 따라서 율리아 리비아는 남은 아이들을 지킬 결심인지, 아니면 비참하게 명예까지 조롱받을 것을 걱정해서였는지 몰라도, 사형 선고 직후 체념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여담으로 그녀가 스스로 목숨을 끊을 무렵, 비슷하게 메살리나에게 고발당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칼리굴라의 여동생 율리아 리빌라 공주는 확실히 누명을 썼다고 평가받고 있다.

3. 평가

로마 제국의 황녀 중 악녀 반열에 반드시 들어가는 공주인 어머니 리빌라와 달리, 메살리나에게 누명을 썼다는 고대 기록 덕분에 당대 이미지와 달리 현대에는 그 악행이 부각되지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