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尹淮( 1380년 ∼ 1436년 3월 12일)
조선의 문신이자 유학자.
2. 생애
본관은 무송(茂松)으로 자는 청경(淸卿), 호는 청향당(淸香堂), 학천(鶴川), 시호는 문도(文度)이다. 조선 개국공신이자 태조 이성계의 측근이었던 윤소종의 아들이다. 주로 세종대왕 시절 활약했다.1401년에 과거로 제3등이 되어 사재 직장에 임명되었다가 응봉사 녹사로 옮겨졌다가 술에 취해 일하지 못한 것으로 인해 직무태만으로 순군옥에 갇혔으며, 1406년에는 좌랑을 지내면서 조수와 함께 수문 갑사를 때렸다가 순금사에 갇혔다. 예조정랑, 이조정랑, 춘추관 기사관을 역임하고 태조실록 편찬에 참여했으며, 이후로 예문응교, 지승문원사, 판승문원사를 역임했다.
세종이 즉위하고 1418년에 판승문원사 경연 시강관, 동부대언, 참찬관, 좌부대언 등을 역임하다가 1419년에는 형방대언, 우부대언, 병조참의 등을 지냈으며, 1422년에 김익정, 민의생 등과 함께 의금부에 갇힌 후에 파면되었고 3차례나 사헌부로부터 벌을 줘야 한다는 탄핵을 받았지만 벌은 받지 않았다.
곧 집현전 부제학으로 임명되어 복귀했고 1423년에 동지관사를 지내면서 고려사를 개수할 것을 명받아 1424년에 동지춘추관사를 지내면서 교정하고 편찬한 고려사를 올렸으며, 1432년에는 맹사성, 권진, 신장 등과 함께 팔도지리지를 편찬하고 1434년에는 자치통감훈의의 오류를 교정해 대제학이 되었다.
3. 여담
야사로 잘 알려진 '글별과 술별' 이야기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윤회가 하도 술을 좋아하자 건강을 걱정한[1] 세종대왕이 "앞으론 하루에 딱 석잔만 마시도록 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그런데 얼마 후 윤회가 꽐라가 되어 집현전 경연에 불참하는 일이 생기자 화가 난 세종이 윤회를 불러 어찌된 일인지 캐물었는데, 어명을 거역하지 않으면서도 술을 잔뜩 마시기 위해 윤회는 평범한 술잔 대신 놋자배기[2] 에 술을 담아 마셨던 것이다. 어명은 지켰(?)지만 어쨌든 경연에 불참하였으므로 벌을 받아야 할 상황이었으나, 만취한 상황에서도 유학에 대한 세종의 질문[3]에 옛 고사를 줄줄 읊으면서 정확하게 답하자 결국 세종도 웃으면서 "글별과 술별이 모여 어진 이를 나았다."라고 감탄하였다는 이야기. 실제로도 윤회는 술을 매우 좋아해서 수차례 세종에게 지적을 받은 적이 있다. 이는 실록에도 기록된 사례.[4]이 술과 관련된 야사는 조선 성종 때의 문신인 손순효(孫舜孝), 선조 때의 문신이자 전국 고교생들의 공공의 적인 송강 정철의 얘기로도 알려져 있다. 손순효도 술 좋아하기로 유명한 인물이었고, 정철은 술 마시고 꽐라가 되어 물의를 일으킨 것이 한두 번도 아니었으면서 장진주사[5]를 지을 정도로 술이라면 껌뻑 죽는 인물이었다. 어쨌든 윤회와 손순효, 정철 모두 능력이 뛰어나고 임금에게 신임을 받으면서도 술을 지나칠 정도로 좋아하는 공통점이 있어서 비슷한 야사가 붙은 모양. 야사라는게 해당 인물에 대한 인지도와 평가를 반영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아주 이상한 점은 아니다.
' 진주(혹은 구슬)를 삼킨 거위'라는 야사도 유명하다. 윤회가 어느 시골길을 가던 도중 한 주막에 들렀는데, 방이 다 찼다고 하여 별 수 없이 마당에서 밤을 보내려 했다. 그런데 주막 주인의 아들[6]이 진주를 가지고 오다가 마당에 떨어뜨렸고, 잠시 후 거위가 대뜸 그걸 삼켜버렸다. 진주를 잃어버린 아들은 대성통곡을 하였고, 주인은 아무리 찾아도 진주가 보이지 않자 이내 윤회를 의심해 불같이 화를 내며 꽁꽁 묶어놓고 다음 날 관가에 고발하겠다 했는데, 윤회는 순순히 묶이면서 저 거위를 자기 옆에 같이 매어놓아 달라는 좀 쌩뚱맞은 부탁을 했고, 주인은 뜬금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부탁을 들어 주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이 되자 관가로 가자고 하자 윤회는 먼저 거위의 똥부터 함 살펴보라고 하였고, 놀랍게도 그 거위가 싼 똥에서 진주가 나왔다. 주인은 윤회를 풀어주며 사과하면서 왜 진작에 저 거위가 삼켰다고 말하지 않았냐고 묻자, 윤회는 그렇게 말했으면 거위의 배를 갈라서 진주를 찾으려 하지 않았겠냐며 그러면 진주는 금방 찾았겠지만 거위는 죽었을 거라면서 거위를 죽이지 않기 위해 치욕을 견뎠다고 답했다.[7] 물론 사실일 가능성은 낮다. 조선 초기는 주막이 발달된 시기도 아니었을뿐더러, 설령 있었다 한들 일개 주막 주인이 사대부, 그것도 개국공신의 아들을 묶어놓는 간큰 짓을 저지를 수 있을리가...[8]
4. 대중매체
대왕 세종에서는 이원종이 배역을 맡았다. 세종이 충녕 때 처음 만나 이후 세종의 측근이자 스승으로 활약하는데 이수가 충녕대군일 시절부터의 세종을 가르친 스승이라면 윤회는 정치스승이자 세종의 유일한 벗의 역할을 해준다. 정도전이 태조 이성계의 벗 역할이고 하륜이 태종 이방원의 벗 역할인것과 같은 위치라 볼 수 있다. 위에 서술된 야사의 이야기도 묘사되었고[9] 극중에서는 술이 원인이 되어 병을 얻었다. 정황상 간암이나 간경화로 보인다. 이후 훈민정음 창제를 위한 연구 중 밤이 늦어 탁자에 엎드려 자고 있는 세종에게 자신의 관복을 벗어 덮어주었는데, 그 때 병세가 도져 세종을 깨우지 않게 간신히 자리를 피해 주저앉아서는 자고 있는 세종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사망한다. 이후 그때 관복을 벗어준 것은 그의 손주 사위인 신숙주에게 세종이 용포를 벗어주는 것으로 이어진다. 또한 장례식에서 세종이 직접 술을 올릴 때에는, 앞서 나왔던 세종에게 받아서 얇게 편 잔을 신숙주가 가져오더니 '자신이 죽은 후 술을 올릴 때에는 이 잔에 올려달라고 했다'는 유언을 전해주자, 세종이 "더 큰것...더 큰 것으로 가지고 오시오..."라고 눈물을 흘리며 슬퍼한다.한편 이후 나온 드라마 정도전에서 그의 아버지 윤소종이 비중있게 등장하고 아버지의 졸기에서 그의 이름이 짤막하게 등장하는데, 윤소종 역을 맡았던 배우 이병욱은 이 드라마에서 김종서 역을 맡으면서 윤회와 어울리는 모습을 한다.
여담으로 대왕 세종에서는 박영지가 연기한 박은의 아버지 박상충[10]도 정도전에서 짧지만 굵게 등장해 비교해보면 묘해진다. 그리고 극(대왕 세종) 중 하륜이 박은에게 마지막으로 일갈한 대사가 "나 하륜이야!!"(...)
[1]
중요 문서(예를 들면
명나라에 보내야 할 문서라든지)를 써야 할 사람으로 그 외에는 없어 급히 찾았지만, 술마시는 중이라 행방이 묘연하다 사방팔방 뛰어다닌 사람들 덕분에 간신히 찾았는데, 술에 떡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훌륭하게 잘 썼기 때문에 왕이 크게 감탄하면서 재능을 아끼는 면모가 드러나는 버전도 있다.
[2]
자배기는 옹기로 만든 큰그릇이나 항아리를 말한다. 놋자배기는 한마디로 대형 놋그릇
[3]
원래 경연은 왕이 신하들에게 배우는 자리이지만, 역대 조선 국왕들 중 딱 두 사람, 세종과 정조만은 예외적으로 경연을 자신이 신하들을 가르치는 자리로 썼다. 조선에서 가장 학식이 뛰어났던 왕들이기 때문. 세종의 아버지 태종도 고려의 과거시험에 급제한 엘리트였기에 경연에 굳이 안 나가도 된다면서 자주 불참했고 어쩌다 나가도 신하들과 대등하게 논쟁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4]
윤회는 신장(
신숙주의 아버지), 남수문(이쪽도 윤회처럼 하루 석잔 고사가 있다.)과 친분이 있었는데 셋다 당대의 기재였지만 주당으로 워낙 유명해서 세종은 물론이고 원로대신들도 술을 삼가라고 경고했지만 요지부동이였다. 결국 셋다 술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특히 남수문은 35에 사망해 당시로도 단명한 편에 속했다. 이들의 죽음을 듣고 대신
허조가 술이 그들을 망쳤다며 탄식했다.
[5]
'한 잔 먹세그려 또 한잔 먹세그려, 꽃가지 꺾어놓고 무진무진 먹세그려'로 시작하는 사설시조로, 말 그대로 '주사'다.
[6]
판본에 따라 딸.
[7]
실질객관동화에서 이 이야기가 패러디된 적이 있는데, 여기서는 위산에 진주 구슬이 녹아버려 윤회가 결국 옥에 갇히고 만다.
[8]
그래서인지 주막이 아니라 일반 여염집에 묵었다는 식으로 내용이 바뀌기도 한다.
[9]
세종이 은으로 만든 아주 작은 술잔을 주면서 "이걸로 하루에 세 잔만 마셔라"라고 어명을 내리고, 조금이라도 더 마시기 위해 그 잔을 얇게 펴서 용량을 늘렸다.
[10]
여담으로 정도전에서 해당 배역을 맡았던
김승욱이 이 드라마에서는 고려 부흥 세력의 2인자인 전행수(전판석) 역을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