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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47a0> 출생 | 1901년 3월 13일 |
경상북도
상주군 장천면 송촌리 (현 경상북도 상주시 낙동면 상촌리 송촌마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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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38년 2월 24일 |
경상북도 안동시 | |
본관 | 풍산 류씨[1] |
호 | 낙보(洛甫) |
상훈 | 건국훈장 애족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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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유원우는 1901년 3월 13일 경상북도 상주군 장천면 상촌리(현 상주시 낙동면 상촌리 송촌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상주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대구고등보통학교에 진학했으나 1920년 동맹휴학을 주동했다가 대구경찰서에 체포되어 3개월간 구금되었고, 학교로부터 퇴학 통보를 받았다. 이후 경성으로 상경해 보성고등보통학교에 전학해 졸업했다.졸업 후 일본으로 유학가서 와세다대학 정치학과에 입학했으며, 신간회 동경지회의 초대총무간사로서 도쿄에 유학 중인 조헌영· 전진한 등과 함께 반일사상을 고취하고 지하조직을 통한 항일운동의 선봉으로 활동하였다.
1929년 도쿄에 있는 조선인 유학생의 모임인 학우회(學友會)의 대표로 피선되어 일본 전국에 신간회를 조직하다가 동경시경시청에 붙잡혀 3개월간 구금되었다가 보석 방면되었으나 요시찰 인물이 되어 항상 일경의 감시를 받았다.
1930년 와세다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했으나, 조선총독부 경찰국의 요시찰 인물로 지정되어 행동 제한을 받았다. 1935년 전진한·김한옥(金漢玉) 등과 함께 영남지구의 농민자금으로 한국 농민협동조합체의 효시인 상주군 함창협동조합(咸昌協同組合)을 창립하여 책임지배인인 이사(理事)로서 농민수탈기관인 금융조합 및 동양척식회사(東洋拓殖會社)와 맞서 농민의 권익보호와 농민계몽운동을 이끌었다.
이후 각지에서 강연 활동을 하며 농민 계몽을 일으키려 노력했으나, 1938년 2월 24일 안동농민회의 주최로 열린 강연회에 참석하 강연하던 중 뇌출혈로 졸도해 병원으로 실려갔으나 곧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6년 유원우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1]
25세 우(佑) 묵(默) 훈(勳) 항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