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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민/비판과 논란/참여정부 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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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울대 민간인 감금 폭행 고문 사건
1.1. 옹호1.2. 비판
2. 1980년 계엄사 자백진술서 공방
2.1. 심재철 주장에 대한 찬성 의견2.2. 유시민 주장에 대한 찬성 의견
2.2.1. 유시민, 심재철 그리고 김문수
3. '조개' 발언
3.1. 유시민의 해명
4. 호남, 민주당에 대한 원색적 비하발언 및 기회주의적 모습5. 16대 선거법 위반 논란

1. 서울대 민간인 감금 폭행 고문 사건

유시민의 흑역사이면서, 동시에 그의 항소이유서가 화제가 되어 일약 스타로 오르게 만들어준 사건. '서울대 프락치 사건'으로 부르기도 하지만, 당시 프락치로 몰렸던 당사자 전기동 씨의 언론중재위원회를 통한 중재 요청 등에 의해 일부 언론에서는 '서울대 민간인 감금 폭행 고문' 사건으로 변경해 부르기도 한다.

사건은 그가 복학한 후인 1984년 9월 17일 있었던 서울대 복학생협의회 창립총회(회장 경제 4학년 유시민)부터 시작된다. 총회 이후 이어진 술자리에서 한 학생이 자신이 '78학번 공법학과 출신으로 군에 강제징집되어 복학한 임신현'이라고 소개했는데, 당시 워낙 군에서 녹화사업이라는 명목으로 프락치를 많이 파견할 때라[1] 학생들이 수상히 여겨 심문 끝에 "나는 가짜 학생이다. 복협이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알아보러 왔다."라는 강제 자백을 얻어낸 것이다. 그 외에도 총 4명이 프락치로 몰렸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열흘 넘게 감금하였고 안기부 스타일의 고문까지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방식은 구타와 함께 입에 재갈을 물리고 코에 주전자 물을 들이부었다고 한다. 다시 말해 운동권 학생들이 평소 기관에 끌려갈 때마다 당하던 고문을 자신들이 행한 것이고, 독재정권에 항거하는 사람들이 독재정권과 똑같은 짓을 저지른 것이다.

손현구 씨의 경우, 당시 서울대 학생들에게 열흘 넘게 고문을 당하여 고문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신이 프락치였다고 자백하였다. 하지만 다른 피해자들은 자신들이 '가짜 대학생' 노릇을 한 점은 인정하면서도 프락치는 아니었다고 말했다. 그중 하나가 전기동 씨로 앰뷸런스에 실려서 관악병원 응급실로 갈 정도로 중상이었다.

이것이 서울시 경찰에 의해 '학생들이 임군을 감금, 기관원을 자백케하고 철야심문하며 구타했다."라는 내용으로 발표되었고, 재판 결과 유시민 등 3인은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았다. 당시 신문기사[2]

한편 항소이유서는 원래 변호사가 쓰지만 당시 사건을 담당하던 이돈명 변호사가 피고인 유시민에게 직접 작성을 권유하여 쓰게 된 것이라고 한다. 황호택 기자가 그 항소이유서를 작은 박스 기사로 신문에다가 기재했는데, 이후 독자들의 격려 전화가 많이 왔다고 한다. 우여곡절 끝에 대학교는 1992년에 졸업하였고, 이후 독일로 건너가 마인츠 대학교 대학원에서 경제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3] 석사 전공으로는 보건경제학을 택했고, 석사 논문은 「국제교역의 확대가 국내 임금격차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연구」 였다.

1.1. 옹호

"상부에서 유시민으로 엮으라고 지시. 민간인 폭행한 것은 다른 연루자들"
서울대 프락치사건(일명 서울대 린치사건)'의 수사 책임자의 인터뷰
2006년 2월, 당시 서울대 프락치 사건을 수사했던 관악서 수사과장은 앰뷸런스를 부르고 수습한 사람이 유시민이었으며, 피해자 중에는 유시민의 얼굴조차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이 있었고, 상부에서 유시민으로 엮으라고 지시했다고 밝혔다.
"임신현 씨의 경우 서울대복학생협의회 술자리에서 수상한 점이 발견돼 후배들이 당시 복학생협의회 집행위원장인 유씨에게 말했지만, 유씨는 단지 '학생과에 알아보면 되지 않겠냐'는 말만 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다음 날 유씨가 학교로 와 보니 이미 폭행사건이 벌어져 있었다."
이 주장에 따르면 유시민의 조종이 폭행과 린치 지시라고 보기는 어렵다. 더군다나 폭행을 가한 사람 중 한 사람이 유시민의 선배이자 총학생회장인 심재철 현 의원이라면 교묘하게 뒤에서 지시했다는 전기동 씨의 주장은 더욱 더 설득력을 잃는다. 서울역 회군도 유시민과 이해찬의 반대를 무릅쓰고 회군을 결정한 심재철이 후배인 유시민의 사주를 받아 폭행했다는 것은 어불성설에 가깝다.

아래 비판 문단에 발췌된 항소이유서일부 문장만 잘라온 황당한 민간인을 반민주, 불법적으로 감금한데 동참한 건 유시민이 스스로 밝히듯 사실이다 이다. 해당 단락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본 ​피고인 ​자신도 ​조사를 ​위한 '감금에' ​명백히 ​찬동했으며 ​또 ​잠시나마 ​직접조사에 임한 ​적도 ​있기 ​때문에 ​법률을 ​어긴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며 ​그에 ​따른 ​책임이라면 ​흔쾌히 감수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의 ​경우, ​가능한 ​한 ​짧은 ​감금과 ​비폭력이라는 ​원칙을 관철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으며 ​실제로 ​이 ​원칙이 ​관철되었으므로 ​본 ​피고인은 ​아무런 윤리적 ​책임도 ​느끼지 ​않습니다.''

즉, 유시민 개인의 고문 개입 여부 진실을 판단하자면, 그가 언급한 원칙 관철 여부에 대한 조사에 근거해야 한다. 본인이 본인의 폭력 가담을 인정했다는 왜곡된 정보를 증거삼아 확증할 사안이 아니다.

게다가 취조를 한 적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가 구속된 사유, 그러니까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을 위반한 적은 없음에도 구속되었다. 폭행을 하지 않은 사람을 그 자리에 잠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폭행죄로 구속을 했고, 그래서 유시민은 저 항소이유서를 쓰게 된 것이다. 위에 링크된 당시 관악서 수사과장 김영복의 주장을 봐도 이 점이 드러난다.
"본 피고인이 가장 먼저 연행당한 것은 미리 도피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도피하지 않은 것은 필요를 느끼지 않았기 때문이고, 필요를 느끼지 않은 것은 도망칠만큼 잘못한 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유시민의 항소이유서가 주장하는 바도 바로 그것이다. 당시는 독재정권에 찬동하는 자는 불법적이고 비도덕적인 명백한 폭력 행위를 하여도 법의 보호를 받았던 반면, 독재정권에 항거하는 자는 불법적인 행동이 아니라도 불법으로 날조 당하거나 일부 불법 행위에 대해서 사법부의 침소봉대로 인해 강하게 처벌받던 시대였다. 이에 유시민은 민주주의 형장으로써 사용되었던 그 시대 법정이라는 장소에 대한 환기와 민주주의 수호자로 법관들이 제대로 기능해주기를 읍소할 생각으로 펜을 들었던 것이다. 항소이유서 중 그 당시 합법적 행위와 도덕적 행위의 모순점을 지적한 부분은 다음과 같다.
"이 사건은 누적된 정권과 학원 간의 불신 및 적대감을 배경으로 하여 수명의 가짜학생이 행한, 전혀 비합법적이라 할 수 없지만 명백히 부도덕한 정보수집행위가 본질적으로 부도덕하지 않으나 명백히 비합법적인 학생들의 대응행위를 유발함으로써 빚어진 사건입니다.

지난 수년 간 현 정권이 보여준 갖가지 부도덕한 행위들―학원 내에 경찰을 수백 명씩이나 상주시키면서도 온 국민에게 거짓증언을 한 치안당국자의 행위, 소위 자율화조치라고 하는 아름다운 간판 위에서 음성적인 학원사찰을 계속해 온(이에 관해서는 법정에서 상세히 밝힌 바 있음) 수사기관의 행위, 불순한 정치적 목적을 위해 이 사건조차 서슴지 않고 날조·왜곡한 행위 등―은 같은 뿌리에서 돋아난 서로 다른 가지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이 재판은 사건의 진정한 원인을 규명하여 그에 대한 처방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의 행위 중 비합법적인 부분만을 문제 삼아 처벌하기 위한 것입니다. 아마도 사법부 자체는 이처럼 부도덕한 정권의 학원 난입 행위를 옹호하려는 의도가 없을는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사태의 전후 맥락을 모조리 무시한 채 조사를 위한 연행·감금마저(폭행 부분이 아니라) 형사처벌의 대상으로 규정한 1심의 판결은, 지금 이 시간에도 갖가지 반사회적 목적을 위해 교정을 배회하고 있을 수많은 가짜학생 및 정보원의 신변안전을 보장한 ‘가짜학생 및 정보원의 안전보장 선언’이 아니라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1.2. 비판

"그러나 본 피고인 자신도 조사를 위한 감금에 명백히 찬동했으며, 또 잠시나마 직접 조사에 임한 적도 있기 때문에 법률을 어긴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며, 그에 따른 책임이라면 흔쾌히 감수할 것입니다."
본인의 항소이유서 중에서. 자신이 민간인 감금과 조사에 찬동했다고 시인하는 부분이다.
한참 후인 2006년, 유시민이 보건복지부 장관에 임명된다고 하자 전기동씨는 "자신을 프락치로 몰았던 사람이 장관이 되면 안 된다"며 1인 시위를 하여 보수 언론과 한나라당에서 이 사건을 대서특필하며 매우 좋아하였다. 한나라당에서는 전기동을 유시민 인사청문회 증인으로 신청하였는데, 거부당하자 대신 기자실에서 기자 회견을 열었다.

당시 전기동의 주장은 "자신은 (서울대에서 수업받으며 고시를 준비하던 방송통신대학교 학생이었지) 프락치가 아님에도 여러 사람이 자신에게 폭행을 가했고, 유시민은 폭행이 일어날 때마다 자리를 피했다가 끝나고 나타나는 등 교묘하게 뒤에서 지시하였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 나타나 자신을 보고 미안하다며 사과하고, 폭행 가담자들에게 자신은 돌려보내라 지시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볼 때 폭행을 뒤에서 조종한 자가 유시민이 확실하다" 는 것이었다. 다만 직접 폭행을 가한 사람은 현직 한나라당 의원이자 '서울역 회군' 당시 서울대 총학생회장인 심재철이라고 밝혀버리면서(...) 당황한 한나라당 이성구 의원이 즉시 기자 회견을 중단시키고 전기동을 돌려보내며 어영부영 끝나버렸고, 보수 언론의 관심이 급속히 냉각되었다.[4]

유시민의 항소이유서 주장과 전기동의 주장이 서로 일맥상통한다. 유시민도 자신이 무고한 민간인에 대한 감금과 조사에 가담하였고, 폭력행위를 알면서도 방치했다고 시인했다.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1. 복학생 협의회에서 전기동 씨 등 가짜 대학생 4명을 적발하였다.
2. 그리고 손현구 씨는 열흘이 넘는 고문을 견디지 못 하고 프락치라고 자백했다. 다만 전기동 씨를 포함한 3명의 경우 '가짜 대학생'은 맞지만, 프락치는 아니라고 주장했다.
3. 이 과정에서 심재철 등이 전기동 씨에게 폭행과 고문을 자행했고, 유시민은 직접 폭행에 가담하지 않았지만 폭행과 고문이 있음을 알면서도 이를 막지 않았다.

민주화운동가들이 옳은 가치를 위해 투쟁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그렇기에 민주주의를 신봉한다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무고한 민간인에 대한 납치, 감금, 폭행은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할 수 없다.
유시민은 17대 총선의 홍보책자에서 이 사건 관련자들이 '민주화 유공자'로 인정받아 명예회복을 했다는 허위사실을 유포했다하여 검찰에 기소되었다. # 판결 자체는 무죄가 났으나, 이는 '사실을 객관적으로 확인했어야 하나 이 내용을 기재할 당시 허위일 가능성을 인식하지 못했을 것으로 보인다'라는 이유로 무죄가 뜬 것이다. #

또한, 누구도 당시 군사정권 시절의 만연한 불법적인 법 집행을 옹호하지 않는다. 또한 유시민의 폭행여부는 확실히 피해자들 증언으로도 확인되지 않았기에 경찰이 그를 엮기 위해 일부러 뒤집어 씌운 정황도 분명 있다.

그러나 이 사건에서 사람들이 유시민을 비판하는 것은 폭행에 직접 가담했건 아니건 그가 민간인에 대한 불법적인 감금과 폭행, 고문이 이뤄지고 있다는걸 알았고, 심지어 직접 조사에 참여하며 이 행위를 방조했다는 사실 때문이다. 이것은 유시민 본인도 인정한 빼도박도 못한 사실이고 모든걸 떠나 이것 자체만으로도 비판의 소지는 충분하다.

본인도 항소이유서에 당시 학생들의 조사과정에서 폭행이 일어날 것이라는 것을 충분히 짐작하고도 복학생협의회 대표였던 위치에도 불구하고 묵인하고 방조한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임신현, 손형구의 경우에도 본 피고인이 사건을 접했을 때는 이미 감금 및 조사가 진행 중이었으므로 어떠한 지시를 내릴 필요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나 본 피고인 자신도 조사를 위한 감금에 명백히 찬동했으며, 또 잠시나마 직접 조사에 임한 적도 있기 때문에 법률을 어긴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며, 그에 따른 책임이라면 흔쾌히 감수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의 경우, 가능한 한 짧은 감금과 비폭력이라는 원칙을 관철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으며, 실제로 이 원칙이 관철되었으므로 본 피고인은 아무런 윤리적 책임도 느끼지 않습니다."

위 반론의 내용은 'OOO가 잘못했으니 내 잘못도 변명의 여지가 있다'는 것인데, 그건 사건이 양자간의 분쟁일 경우에나 통용되는 것이지 이 사건의 피해자는 아무 연관이 없는 제3자였다는 점에서 비판의 여지가 있다.
그렇지만 사태의 전후 맥락을 모조리 무시한 채 조사를 위한 연행·감금마저(폭행 부분이 아니라) 형사처벌의 대상으로 규정한 1심의 판결은..."
즉, 폭행만 동반되지 않는다면 학생들이 행하는 민간인에 대한 연행, 감금, 조사가 아무 문제 없다는 입장이다. 대체 학생들에게 그럴 권한이 어디 있고 누가 줬단 말인가? 게다가 본인은 그런 비폭력 원칙을 지켰을지 몰라도 실제로는 다른 학생들에 의해 심각한 폭행과 고문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유시민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고 그걸 막을 만한 위치에 있으면서도 묵인했다. 그러면서 자신은 비폭력의 신념을 지켰으니 책임을 느끼지 않는다는 표현은 어긋난다.

2. 1980년 계엄사 자백진술서 공방

유시민이 KBS 예능 대화의 희열에 출연하여 자신이 1980년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에 연행됐을 때의 일화를 이야기하자, 자유한국당 심재철 의원이 이는 역사 왜곡이라고 반발하며 당시 유시민의 진술서를 공개하면서 벌어진 일이다.

“운동권 동료 이름 술술 적어내” 유시민 1980년 계엄사 자백진술서
유시민은 역사적 사실을 예능으로 왜곡해서는 안된다

심재철은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1980년 서울의 봄 이후 5월 17일 밤에 합수부에 연행된 후 고문을 당하는 과정에서 동지들의 이름을 팔았다고 주장했다. 특히 유시민의 진술 때문에 자신이 5년형을 선고 받았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심재철의 주장에 대해 유시민은 본인의 유투브 채널 알릴레오에서 해명을 하였다. 1980 서울의 봄, 진술서를 말할레오 해당 영상에서 유시민은 자신은 군부의 고문과 압박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이미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을 진술서에 반복해서 썼을 뿐이며, 심재철에 관련된 진술 또한 심재철의 진술서를 본 후 그것을 그대로 썼을 뿐이라고 해명하며, 공정하게 자신의 진술서와 심씨의 진술서를 날짜에 맞춰 자신의 메일에 보내달라는 제안을 하였다.

해당 알릴레오편에서의 유시민의 얘기에 대해 심재철이 이에 대해 재반박을 하는 글을 올렸다. 역사 앞에 서서 해당 글에서 심재철은 유시민의 진술서는 자신이 체포되기 이전에 작성된 것이라 밝히며 유시민이 다시한번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지적하며 유시민의 제안에 응하면서 이에 덧붙여 당시 공판 속기록까지 같이 공개하자는 제안을 하였다. 그러나 당시 재판의 공판 기록은 소실되어 있는 상태인데 심 의원이 이걸 알면서 이러는 건지는 의문이다.

유시민은 심재철의 재반박에 대해서는 설명할 책임을 느끼는 문제는 다 이야기했다며 논쟁에는 응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 한편 양측 이야기에서 모두 등장하는 이해찬 의원은 심재철의 주장은 일고의 가치가 없는 헛소리라고 일축했으며, 전우용 교수같은 경우는 유시민의 진술서는 당시 보편적인 관행의 수준이었다고 평가했다. #

이에 심재철은 자신의 블로그에 그 당시 유시민과 본인의 진술서 전문을 공개하였다. #, #, #, #

7월 중순 이후에 진술서를 작성했다[5]는 유시민의 말과는 달리, 심재철이 공개한 유시민의 진술서는 6월 12일날 작성된 것이고, 심재철은 6월 30일에 체포되었기에 시점에 대한 논란이 있다. DJ 내란음모 사건, 유시민 해명 틀렸다 심재철의 '유시민의 알릴레오' 팩트체크

재판 속기록과 판결문까지 공개하자는 얘기가 심재철과 유시민 사이에 오갔으나, 그러기 위해서는 당시 피고인들의 동의가 필요하니 피고인들과 친한 유시민이 피고인들을 설득해 동의를 얻어 달라는 심재철의 제안에 대해 2019년 5월 6일 현재, 유시민은 아직 구체적인 응답을 하지 않고 있다.

5월 7일 유시민은 연합뉴스와의 통화에서 심재철이 공개한 자신의 1980년 6월 12일자 진술서 내용에 대해 "학생들이 아무런 배후 없이 대규모 시위를 할 수 있었다는 것을 납득시키려고 애썼다"고 밝혔다.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의 피의자로 조사를 받고 있을 당시 김대중 전 대통령이 대학생을 사주해서 시위를 일으키고 그 혼란을 틈타 정권을 잡으려 했다는 게 당시 조작의 방향이었고, 때문에 김 전 대통령과 학내 비밀조직을 '배후'로 언급하지 않기 위해 오히려 이미 노출된 학생회 간부 등의 명단을 적극적으로 내세워 허위 진술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또한 유시민은 "진술서는 앞부분부터 다 거짓말이다. 내가 1980년 3월 심재철 의원을 처음 만난 대목부터 완전히 창작이었다"며 "합수부 수사관들이 '그럴 수도 있겠다' 생각하도록 성의있게 진술하는 것이 중요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시위를 할 때마다 신문에 났던 심 의원이 나 때문에 기소됐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며 "오히려 총학생회장이었던 심재철, 학생활동위원장이었던 이홍동, 그리고 나는 총학생회 간부 3역으로 진술서에 자주 나올수록 좋은 것이었다"고 부연했다. 당시 진술에서 이해찬 대표와 관련해 '민청협회장이고 김대중 씨와 관계한다고 소문이 돌던 이해찬'이라고 언급한 데 대해선 "이해찬 선배가 몇천명 보는 데서 내 멱살을 잡은 적이 있기 때문에 그것까지 진술하지 않기는 어려웠다"며 "다만 '그렇다'고 하지 않고 '그렇게 들었다'는 식의 표현을 썼다"고 말했다. 이어 "심 의원이 나한테 없는 진술서를 공개한 것은 잘했다고 생각한다. 그를 상대로 법적 대응을 할 생각도 없다"면서 "이 모든 일을 학생회 간부가 다 한 것으로 진술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 그 점만 이해해주면 된다"고 덧붙였다. 유시민 "합수부 수사관 속여야 했다…진술서 앞부분부터 거짓말"

2.1. 심재철 주장에 대한 찬성 의견

유시민의 진술서 앞부분부터 창작이라는 두번째 해명은 고작 일주일도 되기 전 알릴레오에서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을 진술서에 반복해서 썼을 뿐이며, 심재철에 관련된 진술 또한 심재철의 진술서를 본 후 그것을 그대로 썼을 뿐이라고 해명한 것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말이다. "누구나 아는 사실"이 고작 일주일 만에 "창작"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무엇보다 이 두번째 해명이 사실이라고 하면 총학생회 간부 3명이 체포되고 기소되는 과정에 본인이 어느 정도 기여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유시민 본인은 굳이 자신 때문이 아니더라도 심재철 등이 기소되는 것이 어느 정도 예정된 일이었다는 식으로 변명하지만, 자신의 해명대로라면 자신의 창작 때문에 이들의 기소가 앞당겨졌다는 이야기가 되기 때문에 그다지 제대로 된 해명이라고 할 수 없다. 결국 지금까지 자랑스레 떠들어온 자신의 무용담 때문에 자신 스스로의 신뢰성에 타격을 입히게 된 상황이 된 것이다.

윤호중 , 유기홍 , 전우용 등 몇몇 이들은 유시민을 두둔하고 있다. 두 사람의 서울대 선배인 양민호 한반도광물자원연구센터 이사장 등의 의견에 따르면 관련기사 당시 수사기관 진술서를 갖고 서로 누가 옳고 그르다는 식으로 따지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일”이라며 “설사 그 당시 고문에 못 이겨 본의 아니게 진술을 강요당한 자들이라도 그 이후 올바른 행동을 했다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강조함으로써 당시 신군부의 고문과 협박 회유에 따른 자술서의 내용을 놓고 왈가왈부하는것 자체가 무의미한 일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또한 그들의 유시민 두둔에 대해 상기해야 할 점이 두가지 있는데 첫째는 이해찬, 전우용, 유시민은 공통적으로 자한당에 반대하는 입장의 정치적 성향을 띄었다는 점이며 둘째로는 심재철이 공개한 내용을 보면 다른 학생들의 자술서는 10페이지 안팎으로 쓰여진 데 반해 유시민의 진술서는 80쪽의 압도적인 분량이란 점이다. 일반적으로는, 엄청난 거짓말쟁이의 진술이나 불러 주는 대로 쓴 진술이 아닌 한, 사실에 가까운 진술일수록 구체적이고 상세하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이해찬의 유시민 옹호가 정치적 입장에서 나온 것인지 진심으로 나온 입장인지에 대한 판단과 80쪽 분량의 유씨의 진술서가 전우용이 말한 보편적인 관행에 속한 진술서인지는 각자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로 보인다

하지만 이번 논란의 시초는 유시민 본인이 당시 자신의 무용담을 공개적으로 과장하며 자랑하다 벌어진 일이다. 게다가 본인 해명대로라면 자신이 한 창작이 당시 운동권 인사들의 구속과 기소를 앞당겼다는 건데, 설령 고문과 압박에 굴복한 것이더라도 자랑스레 떠들만한 일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이걸 지적한 심재철 본인도 비슷한 상황에서 나온 본인의 진술서로 인한 파장으로 평생 욕을 먹어왔다. 그런데 유시민이 같은 행동을 하고도 자랑하는 건 괜찮고, 심재철은 안된다는 논리는 결국 진보측의 이중잣대만 강조하는 것이다.[6] 여기에 더해 처음에 유시민은 자신의 진술서가 심재철의 진술서를 베낀 거라고 책임을 심재철에게 떠넘기기까지 했는데, 그것조차 사실이 아니었다. 즉 이 일에 관해서 본인의 신뢰성을 무너뜨린 것은 유시민 본인인 것이다.

사실 심재철도 고문에 따른 자백이기 때문에 사실 비난받아야할 이유는 없었다.[7] 그래서 기존 전문가들도 심재철을 비난하지 않았다. 한인섭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그래서 심재철을 비난하지 않았다.
[유시민, 심재철, 1980]
전두환이 권력장악의 완성수순으로 5.17비상계엄 확대하고, 예비검속하여 재야, 정치, 학생들을 엄청 잡아갔고, 어마어마한 고문과 장기불법구금을 자행했다. 그때 조서도 작성하고, 자술서도 쓰게 한다. 말이 자술서이지, 강제타술서와 실질적으로 같다고 평가한다. 그래서 민주화된뒤에, 그때 자술서는 뭐라 썼던 법정증거로 배척된다. 고문과 강압에 의해 쓴 것이므로.
그런데, 그때 그 자술서에 뭘 담았느냐, 혹 동료를 고자질한게 아니냐고 뜬금없이 논란되고, 옆에서 불불이는 사람도 있다. 정리한다.

1. 그 자술서는 강제타술서임. 자발성 전혀 없음.
2. 어떻게 썼던 당시 학생, 정치, 재야운동의 동향은 전두환 군부의 정보망에 이미 다 들어 있었음.
3. 그 자술서대로 사건윤곽 잡은 게 아니고, 첨부터 군부가 짠 프레임에 억지끼워 맞추는 것이었음. 유. 심이 뭐라 주장하든 상관없음. 신군부집권에 가장 유리한 프레임대로.
4. 민주화이후 재심과정에서, 1980 서울의봄, 5.17, 5.18과 관련된 모든 구속.유죄건은 무죄판결로 바뀌었음. 그때 고문정권은 내란죄로 단죄된 것이고.
5. 그러니 거기서 뭘 썼던, 그런 것 갖고 상대 흠집내기나 비난할 게 전혀 못됨.

마지막으로 남는 건, 그때 한글자도 쓰지 않고 버텨야지, 동료 이름은 절대 쓰지 말아야지...그래야 투사이고, 민주화운동가라 할 수 있는게 아니냐는 그런 아쉬움의 찌꺼기 같은 것...그런데 그건 사람이 아니라 감각없는 좀비인간. 기계인간이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둘 다 극도의 폭력과 위축감 속에서 나름 최선을 다하려 애썼다고 본다. 몇십년뒤의 정치노선 갖고, 소급해서 그때 누가 잘못했니 하는 비난자료로 쓰지 말 일이고.

나는 독재시대 재판자료, 변론자료 많이 정리하고 책도 내고 했다. 자술서도 자주 들여다봤다. 그러면서 자술서에 타인에게 불리한 내용이 가득 들어 있으면, 그 사람도 별수 없네, 이렇게 독해하지 않는다. 그 분이 얼마나 고초에 시달렸으면, 안쓰고 견딜 수 없었구나. 이 고문한 나쁜 놈들...이렇게 판독하면서, 그때 그의 고통을 같이 느껴보려 애쓴다. 자술서의 내용은 고문의 심각성을 재는 바로미터다. 유, 심의 강제타술서에 뭔가 마뜩잖은 몇 줄을 찾아낸다 해도, 그건 고초/고문의 정황증거이지, 그들이 밀고자라는 증거는 될 수 없다.

그리고, 그 자술서 다 공개해서 대중에게 판단받으라는 말도 한다. 30년전의 타술서를, 당시의 공포스런 수사환경도 잘 모르면서, 사건 맥락도 모르면서, 정치공격용으로만 악용될 그 자료를 호기심의 먹이로 줄 수는 없는 것이다. 양심에 반해 강제로 쓴 글로 당시 피해를 봤는데, 다시 30년뒤 반양심분자로 공격하기 위해 그자료를 공개하라고? 이중의 참혹함이요, 안될 말이다.

난 1980년 때 대학4학년이었고, 대학신문 기자였으므로, 유/심의 활동을 일상적으로 볼 수 있었다. 둘 다 훌륭했고, 멋있었고, 닥쳐올 고난의 불안 속에서도 각오하고 임한 학생리더였다. 1980.5.17 이전의 그들의 행적은 존중받아 마땅하다. 그리고, 이후 수사.법정에서의 태도에 대해서는 그 고초에 대해 함께하지 못했음에 미안하고, 그리고 이후의 정치행적은 각자 판단받을 대목이다.

요컨대, 1980년 정보부,보안사에서 쓴 강제타술서는 개개인의 인간됨 여부를 평가할 자료 자체가 될수도 없는 것이고, 타술서를 강제한 군부집단들이 얼마나 비인간적이고 참혹한 인권유린자였음을 확인하는 자료로 정리되어야 할 것이다.
한인섭, 유시민, 심재철, 1980 #

한인섭 교수는 “전두환은 어마어마한 고문과 장기불법구금을 자행했다. 그때의 자술서는 강제타술서로, 자발성이 없다”며 “유시민과 심재철의 강제타술서에서 마뜩잖은 몇 줄을 찾아낸다 해도, 그건 고초·고문의 정황증거이지, 그들이 밀고자라는 증거는 될 수 없다” 그리고 “자술서를 어떻게 썼든, 당시 학생, 정치, 재야운동의 동향은 전두환 군부의 정보망에 이미 다 들어 있었다”며 “자술서대로 사건 윤곽을 잡은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군부가 짠 프레임에 억지로 끼워 맞추는 것”이었다고 밝히고 “둘 다 극도의 폭력과 위축감 속에서 나름 최선을 다하려 애썼다고 본다”며 “둘 다 훌륭했고, 멋있었고, 닥쳐올 고난의 불안 속에서도 각오하고 임한 학생 리더였다”고 평했다. 한국일보에선 한인섭이 유시민의 손을 들어줬다고 잘못 묶어버렸는데 한인섭 교수는 심재철도 비난하지 않았다. # 한인섭 교수는 양 진영에 대한 양시론 혹은 양비론에 가까운 의견이고, 둘다 고문에 의한 자백이니 잘못이 없다가 그의 주장이다. 그리고 인권적으로 이게 옳은 것이다. 결국은 애초에 심재철은 비난받아야할 이유가 없었는데 친유시민세력에서 자꾸 억지를 부린 것.

5.18 민주화운동의 대표적 권위자인 김영택 박사의 저서인 '5월 18일, 광주 - 광주민중항쟁, 그 원인과 전개과정'에서도 김영택 박사는 서울역 회군은 비판하지 않고 오히려 신군부의 음모를 피한 것으로 서술하기도 했고 심재철을 전혀 배신자로 서술하지 않았다. 이미 한인섭, 김영택 등 관련 전문가들은 심재철을 비난하지 않았음에도, 진보세력과 비전공자들이 심재철에게 억지를 부려온 것이 애초에 문제였다. 결국 그 부메랑이 유시민에게 돌아간 것이다.

2.2. 유시민 주장에 대한 찬성 의견


이번 논란이 시작인 대화의 희열 방송 장면을 보면 앞서 심재철을 옹호하는 측에서 주장하는 유시민의 무용담 자랑과는 한참 거리가 멀다. 특히 80년 5월 17일 합수부 연행 당시에 유시민의 행적에 대해 처음 제대로 알려진 것은 유시민 본인이 이야기 해서가 아니라 유시민의 서울대 동창이었던 한홍구 교수의 2005년 칼럼이 시작이었다.
밤 10시가 다 되어 학교를 나오다가 유시민 군을 만났다. 빨리 나가자는 말에 뜻밖에 그는 자기는 학교에 남겠다고 했다. 어떻게 군인들에게 텅 빈 학교를 내줄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래도 그렇지 일단 피해야지 무슨 얘기냐는 내 말에 유시민 군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본의 아니게 양치기 소년이 됐던 그날, 학생회의 책임 있는 위치에 있지 않았던 나는 그저 민망한 일로 여겼던 반면, 대의원회 의장인 그는 군인들이 의기양양하게 텅 빈 학교에 주둔하는 광경을 그렸던 것이다. 망해가는 나라에서 황현과 같은 선비가 목숨을 끊은들 그게 대세에 무슨 영향이 있겠냐마는, 황현처럼 목숨을 끊는 선비 하나 없었다면 조선의 망국이 얼마나 더 참담했을까? 유시민 군을 남겨두고 통금이 다 되어 집에 들어와 텔레비전을 켜니 긴급 뉴스로 비상계엄 전국 확대의 소식이 나오고 있었다. 그 뒤로 나는 현실에서건 역사에서건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일을 보게 될 때면, 광주 학살의 전야에 그 넓은 관악캠퍼스의 불 꺼진 학생회관에 홀로 남은 유시민을 떠올렸다. 스물두 살 어린 나이의 그는 다가오는 카타필라의 굉음을 들으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한홍구 교수의 유시민처럼 철들지 맙시다

이 방송에서도 패널들이 이 칼럼을 언급하며 유시민의 행적을 무용담처럼 꺼내자 오히려 유시민 본인은 그것은 한홍구 개인의 기억이라며 잘라 말한다. 만약 무용담처럼 말하고 싶었다면 충분히 그럴만한 멍석이 깔렸음에도 본인이 거부한 것이다.

심재철 의원이 재기한 자백진술서에 대한 내용도 시작은 자신의 글쓰기의 재능을 어떻게 발견했는가에 대해 말하면서 너무 매질을 당해서 글을 쓰면 안 때리니 조금이라도 덜 맞으려고 최대한 많이 썼고, 그 과정에서 고문하던 조사관이 자신의 글을 칭찬했다고 말하면서 시작된 이야기일 뿐이다. 그리고 이 에피소드는 저 방송에서 처음 한 것도 아니고 유시민이 글쓰기 강연에서 숱하게 언급한 일화다. 무용담이라는 단어가 애초에 유시민의 의도를 왜곡하고 있는 것이다.

유시민이 진술서에 관해 일관되게 주장하는 것은 조금이라도 덜 맞기 위해 진술서의 일부를 창작했으며, 심재철과 관련된 진술은 합수부에 연행되기 전부터 심재철을 비롯한 집행부와 철저히 약속된 부분이라는 것이다. 방대한 진술서 전부가 창작 아니면 누구나 아는 논리 둘 중 오직 하나라는 것은 유시민의 주장을 악의적으로 왜곡하는 말장난에 불과하다. 유시민은 알릴레오에서 이렇게 밝혔다.
"그때 학생회장이나 대의원회 의장은 늘 잡혀간다는 것을 전제로 활동했다. 처음에 학생회 간부를 맡을 때 잡혀서 진술하게 되면 무엇을 감추고 무엇을 노출할지 이미 사전에 얘기가 됐다"
이 당시 학생회장이 심재철이고 대의원회 의장이 유시민이었다. 심재철 의원은 유시민의 이 주장에 대해 그렇게 말 맞춘적이 없다고 반박하지 않았으며, 오로지 유시민이 자신과 동지를 팔아서 자신이 실형을 살았다고 주장했다.

재미있는 사실은 두 사람 모두 그 사건 이후 강제징집이 되어 군대로 끌려갔다. 유시민은 강원도 화천에서 심재철은 전라도 광주에서 복무했다. 유시민은 군대에서 첫 휴가를 받은 후 심재철이 복무하는 부대를 찾아갔다. 그리고 유시민의 요청으로 심재철의 부대 막사 안에서 바로 옆에 누워 함께 자며 심재철이 근무설 때도 함께 일어나 섰다고 한다. 그리고 이 에피소드는 심재철이 자신을 유시민이 팔아넘겼다는 사건 이후에 일어난 일이다. 유시민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심재철은 자신을 밀고한 유시민이 휴가나와서 군대에 면회를 오자 보기 싫다고 돌려 보낸 것이 아니라 막사에서 같이 자고 근무도 같이 섰다는 말이 된다. 심재철은 이 에피소드를 뭐라고 반박할 것인가.

또한 위에 심재철을 옹호하는 글에서는 윤호중, 전우용, 이해찬 등 자한당에 반대하는 몇몇 사람들이 유시민을 옹호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이 주장이야 말로 진실을 왜곡하는 주장이다. 그러한 주장대로 유시민 측 옹호자들을 정치적 입장 때문에 신뢰할 수 없다면, 현업 정치를 떠난 유시민보다 당장 현업 정치에서 활동하고 있는 심재철 측이 더 정치적 의도로 사실을 왜곡할 동기가 다분하다고 인정해야 한다. 몇몇이 아니라 그 당시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에 연루되고 목격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른바 자한당의 뿌리인 전두환과 민정당에 반대해 고문을 당해가며 민주화 투쟁을 해왔던 사람이다. 유일하게 심재철만이 자신을 고문한 전두환 일당의 민정당이 뿌리인 신한국당으로 정치입문한 것이다. 그리고 이 일로 심재철이 김문수와 함께 민주화 운동가들에게 오랜 세월 변절자 취급을 받은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런데 심재철 한 사람이 아니라 나머지 모든 사람을 자한당에 반대하는 몇몇으로 표현하는 것 자체가 역사적 사실을 오도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심재철을 비난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한인섭만 전문가라는 타이틀을 붙이는 것은 도대체 누구의 기준인가?
김대중 이하 피고인들이 차례로 취조과정의 폭행과 고문 사실을 폭로하며 '내란음모' 사실을 부인하자 신군부의 법정은 곤혹스러운 처지에 빠지게 되었다.
그때 신군부 법정을 곤혹스러움에서 구해준 사람이 있었다. 그(심재철)는 김대중씨로부터 이해찬을 거쳐 돈을 받았던 혐의를 비롯, '내란음모'에 관한 대부분의 공소사실을 인정했다. 그의 진술로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은 '사실'이 되었고 관련자 대부분이 사형 이하 중형을 선고받았다.
그가 진술하는 도중 법정은 시끄러웠다. 그의 공소사실 인정이 가져올 엄청난 결과에 생각이 미치자 방청하고 있던 가족들은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고 한다.
"너 미쳤어? 너 왜 그래?"라며 울부짖던 이는 이해찬 총리였다고 한다. 조성우씨도 그의 허위진술에 대해 포효했다. 그러나 김대중 전 대통령만은 "심 동지, 고생 많았지?"하며 그를 위로했다는 전언이다.
80년, 심재철 의원이 한 일을 알고 있다

이 당시 심재철이 함께 운동했던 동지들에게 변절자 취급을 받게된 전모를 설명하는 칼럼이다. 심재철은 이 칼럼을 쓴 최민희 의원 뿐만 아니라 자신을 공개석상에서 변절 운운한 사람들을 모조리 고소하고 있지만 고소를 한다고 해서 역사적 사실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심재철을 옹호하는 측이 주장하는 고작 몇몇이 아니라 그 당시 연루된 사람들 중 그 누구도 심재철이 맞고 유시민과 나머지가 다 틀렸다고 말하는 이는 없다. 오로지 심재철만 자가기 억울하다고 고소를 남발하고 는 것이다.
2.2.1. 유시민, 심재철 그리고 김문수

앞서 언급한대로 유시민은 군대 휴가를 나와 심재철의 면회를 갈만큼 친형제처럼 가까웠던 사이였다. 뿐만 아니라 유시민은 당시 노동운동계의 전설이었던 김문수와도 형제만큼 가까운 사이였다고 전해진다. 김문수와 유시민의 여동생이 함께 노동운동을 하다 연행되었을 때 두 사람을 구하기 위해 유시민이 발벗고 나선 에피소드는 유시민과 김문수가 경기도지사 선거에서 맞붙었을 때도 TV 토론에서도 유시민이 덕담으로 언급한 적 있다.
서울역 회군의 주역이자 총학생회장이었던 심재철과 노동운동계의 전설로 불리는 김문수 두 사람 모두 1990년대 중반 신한국당에 입당하며 금뱃지를 달게 된다. 그리고 두 사람은 민주화운동시절 자신들의 높았던 위상만큼 더 많이 변절자로 손가락질 받았다. 재미있는 것은 그들과 친형제만큼 가까웠던 유시민은 단 한 번도 두 사람을 변절자라고 비난한 적이 없었다. 그들의 관계에 대해 알고 있던 사람들이 두 사람에 대해 유시민에게 숱하게 질문했지만 그 때마다 유시민은 그들에 대한 언급을 최대한 자제했다. 김문수가 태극기 부대에 참석해 극우적인 발언을 쏟아냈을 때 '김문수의 변화는 신경세포의 문제'라고 말한 것은 김문수의 과거 행적에 비춰 봤을 때 지금의 그의 행동을 웃프게 말했을 뿐이다.
(김문수가) 그 때 어느 인터뷰에서 "(신한국당에) 취직하러 갔다." 그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어요. 그 한마디로 제가 모든 것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나이 40대 중반에 돈도 없고 재산도 없고 명예도 없고 누가 알아주지도 않고 그렇게 되면 사람은 누구나 흔들리게 되어 있습니다. (중략) 그것을 저는 '그 사람의 삶에 관한 선택이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이것이 이상과 현실 사이의 괴리를 매우 잘 보여주는 것이고, 지나친 이상에 휩쓸리다보면 깊이 좌절하게 되고, 깊은 좌절에 빠지게 되면 ... 네... 변절이라고까지 안하겠습니다. 전향 이런 것들이 일어나게 되지요.
지나친 이상에 휩쓸려 깊은 좌절에 빠지게 되면 전향 일어나
두 사람은 당시의 ‘안개 정국´에서 반독재를 모토로 학생운동에 전념하다 80년 ‘서울의 봄´을 맞았고 10만여 학생의 집회를 이끌었다. 이른바 ‘서울역 회군’의 주역이었다.
유 의원은 ‘한길’에 대해 말하기를 주저했다.“그저 같은 시기 같은 대학에 다녔다는 동일한 상황에서 같은 방식으로 고민하고 행동한 거죠.”
거듭 물었더니 “현재의 모습에 대한 실망 때문에 ‘아름다운 시절’ 기억의 편린을 일그러뜨리고 싶지 않습니다. 심하게 말하면 생물학적으로는 같은 심재철 선배이지만 사회학적으로는 다른 ‘심재철’이라고 생각합니다.”
유 의원에게 심 의원은 ‘인식론적 단절’의 대상인 셈이다. 그만큼 심 의원의 ‘딴 길’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듯하다.
두 사람이 다른 길로 접어드는 계기의 하나가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으로 보인다. 당시 사건 관련자들이 모두 군 법정에서 군 검찰의 고문에 자백이라고 진술했지만 심 의원만은 자백 내용을 인정했다. 유 의원은 심 의원에게 “왜 그렇게 진술했냐? 관련자들에게 빌어라.”라고 말했다고 회고한다.
이후의 행보는 확연하게 달라진다. 심 의원은 MBC 기자로 활동하다가 1995년 신한국당(한나라당)에 입당,2000년 16대 총선에서 당선된다. 입당 전 독일에 유학하던 유 의원에게 자문하자 유 의원이 “왜 그런 당에 가려느냐?”며 말렸다고 한다.
[어제는 한길 오늘은 딴길] (2)유시민 vs 심재철

유시민은 김문수가 민중당 운동을 할 때도 그랬듯, 심재철이 신한국당에 입당할 때도 유학 중이던 독일에서 전화를 걸어 "왜 그런 당에 가느냐"며 만류했다고 한다. 이후에도 심재철은 국회의원이 되어서도 유시민이 주최한 토론회에 참석하거나 유시민이 자신을 팔았다는 주장은 하지 않았다.
그러다 언제부턴가 그를 변절자라고 언론에 말한 사람들을 고소미 시전하기 시작했고, 그 이후에 자신은 언급도 안한 방송에서 혼자 자기를 팔았다며 수십년이 지나 폭로 아닌 폭로를 한 것이다. 그렇게 심재철이 고소는 시전해도 그 당시 민주화운동을 했던 이들 중 심재철의 말이 다 맞다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고소는 고소일 뿐, 고소를 한다고 해서 있던 일이 없어지는 것은 아닌 것이다.

3. '조개' 발언

2002년 대선 기간 후보 단일화가 이루어지던 시기 개혁국민정당 지역 당원들이 함께 한 MT에서 남성인 가해자가 여성인 피해자를 차 안으로 데리고 가서 키스하는 등 성추행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개혁국민정당여성회의 의장 명의로 성폭력 특위가 구성되고 개혁국민정당 내부에서 가해자 실명공개 서명운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런데 당시 개혁국민정당 집행위원이던 유시민이 해일이 일고 있는데 조개 줍고 있다[8] 는 발언을 함으로써 논쟁을 일으켰다. 유시민 저열한 性의식

이어 유시민은 "여성회의 동지들께 한 말씀만 드리겠습니다"라는 제목의 글을 썼다. 유시민씨는 "여성회의가 당이 아니라 여성들의 '권익'만을 중시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저는 개혁당 여성회의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개혁당의 여성회의인지, 개혁당 안에서 여성의 권익을 찾는 여성회의인지, 다시 말해 당이 먼저인지 여성이 먼저인지 모르겠습니다."(2003. 02.28. 개혁당 여성위원회 게시판) #

' 조개'라는 표현이 여성 혹은 여성의 성기를 지칭하는 은어로 흔히 사용된다는 점과, 성폭력 사건의 공론화를 주장하는 당내 여성주의자들을 오히려 비판하고 나섰다는 점에서 유시민이 2차 가해자로 지목되기도 하였으나 결국 유시민에 대한 징계 조치 등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2006년 6월 7일 열린 보건복지부 인사청문회에서 민주노동당 의원 현애자가 '조개' 발언에 대하여 질의하자 유시민은 해당 발언은 한 적이 없다고 부인했다.

3.1. 유시민의 해명

인사 청문회에서 유시민이 해당 발언에 대해 부인하는듯하자, 민주노동당 현애자 의원은 구체적인 날짜를 적시하며 재차 물어왔다. 그러자 유시민은 "사실을 부인하는게 아니라 그런 발언을 그런 맥락에서 한 적이 없다"고 대답하면서 “당시 개혁당의 최고의결기구인 집행위원 회의에서 당내 여론에 대한 회의를 했는데 임박해 있는 여러 일정을 제쳐두고 당내의 작은 일로 회의 시간이 소모되는 것에 대해서 (본인이) '우리가 해변에서 조개껍질 들고 놀고 있는 아이와 같다'고 했는데 그게 어느 분에 의해서인지 모르겠으나 왜곡된 것에 대해서 속이 상한다"고 주장했다.

이후 19년이나 지난 발언에 대해 사과를 한답시고 하필 대선을 며칠 앞둔 시기에 말을 하긴 했는데...

'당시 다가올 노무현 대통령을 어떻게 지켜야 하는가에 관심이 쏠려서 그랬다'는 변명과 함께, "19년 전의 일을 돌아보면서... 나는 내가 1번남이라고 생각해왔는데, 2번남이 아니었을지는 모르지만, 1번남이라 주장할 수 없는 생각들을 한 게 아니었나..."라는 말을 하는 등, 황당하게도 본인의 잘못을 이용하여 상대 진영을 공격하는 4과를 해버리기에 이르렀다.

여전히 본인이 추구하는 것이 '대의'이고, 다른 문제나 의견들은 표가 되지 않는 이상 사소한 것으로 치부하여 무시하는 권위주의적이고 정치공학적인 사고방식을 고수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캡션




4. 호남, 민주당에 대한 원색적 비하발언 및 기회주의적 모습

노무현 대통령이 진보 진영 내에서도 정적이 많았던 이유와도 어느정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새천년민주당 노무현 당시 후보로써 뭉쳐있을 당시에는 영남권 출신 친노세력들 대부분이 분당전에는 "민주당은 전국당","민주당은 민주화의 법통을 이은 정당"이라고 했다가 분당을 하면서 민주당을 반개혁 정당이며 호남당이라고 비난하고 노무현 대통령은 "전라도 사람하고 정치 못하겠다"라고 말한바도 있다.단순히 영남권 친노세력들의 호남차별이 이라기보다 유시민은 정계 출마 이전시기부터 김대중과 민주당 세력에 대해 비난해왔다. 90년대 동아일보 칼럼니스트 활동시기나 제15대 대통령 선거당시부터 김대중의 대통령선거 출마를 막으려 <97 대선 게임의 법칙>라는 책을 출판해 DJP연합, 정확히 김대중의 대선 필패를 점치며 지속적으로 호남,민주당세력을 비난해왔다.
그가 '지역등권론'과 '지역간 수평적 정권교체론'을 통해 '전라도 지도자'를 자칭했기 때문에 이 유권자들은 모두 전라도민과 전라도 출신으로 전라도 이외의 지역에서 사는 유권자라고 할 수 있다. (p. 172)
호남에서 민주당과 연대하면 일당독재가 된다. 2010년 국민참여당 창당대회중 발언
"민주당 호남에서 큰 정치인 안나와" 2012년 전남대 강연중 발언
2002년 오마이뉴스 인터뷰에서 "김 대통령 차라리 하야해야 한다" "분수를 알아야 한다"[9]라고 까지 발언을 한적이 있으나 정작 2010년 경기도지사 선거 앞두고는, 이희호 여사를 찾아가 "나의 첫 대통령은 김대중"이라 발언한 바도 있다.
과거 정의당 당원일 당시 썰전에서 전원책변호사나 가끔씩 다른 방송에서 민주당 안가냐고 하면 스스로 "거기는 저를 싫어 하는 사람이 많아서..."라고 답변을 하며 피하는 모습을 보였다.
물론 지역주의에 대한 반감으로 민주당을 비판할 수도 있다. 이념과 지지여부에 관계없이 민주주의 국가라면 얼마든지 합리적인 논리를 가지고 비판 할 수 있다.그러나 "대한민국은 지역주의 '암' 환자"라고 표현하면서도 본인은 호남과 호남에 지지기반을 둔 민주당을 비난하고 2019년 황교안 당시 자유한국당 당대표가 5.18기념행사에 참석하려고 하자 "얻어맞으려고 광주에 온다","눈도 마주치지말고 말도 붙이지 말고 악수하지도 말고 뒤돌아 서 있어야 한다"라고 발언하는것은 이중잣대에 가깝다. 19대 대선이후, 본인 스스로 진보 어용인을 자칭하며 완전히 친 민주당, 친문세력으로 자리잡을것에 대해서도 결국 기회주의자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10][11]

5. 16대 선거법 위반 논란

유시민은 과거 16대 총선 당시 사전선거기간 전에 자신을 지지해달라는 홍보를 했다가 선거법 위반으로 피소되었다. 노무현 정부 시절, 정확히 말하면 2006년 유시민은 곽치영 민주당 의원이 의원직을 상실해 열린 4·24 재선거에서 개혁국민정당 후보로 출마했다. 그리고 공식 선거운동기간 (2006년 4월8일부터 23일까지) 전인 3월 29일 자신의 홈페이지를 통해 '덕양 갑 전황보고'라는 제목으로 "지금 (한나라당) 이국헌 후보가 10% 넘게 앞서고 있다"며 "선거지역에 살고 있는 친지들을 찾아내 전화를 걸고 직접 방문, 저를 도와달라"는 등 지지를 호소했다. 그러나 이것이 화근이 되어, 16대 국회의원 총선 당시의 선거법 위반 혐의에 대해 대법원 1부(윤재식 대법관)는 25일 판결문을 통해 "피고인은 선거운동 기간 전에 지지율을 공개하며 자신의 지지를 호소하는 내용의 글을 인터넷 홈페이지에 게시했는데, 이는 선거에 관한 단순한 의견 개진 및 의사표시, 정당의 후보자 추천에 관한 단순지지 또는 반대의견 개진 범위를 명백히 벗어난 것으로 당선을 위한 적극적 선거운동에 해당한다"고 밝혔다. 대법원은 또한 "지난 3월 개정된 선거법은 선거운동기간에 관계 없이 인터넷 홈페이지를 통해 선거운동을 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지만, 개정법 전 행위에 대해서는 벌칙에 대해 개정 전 규정을 따라야 한다"고 덧붙였다. 기사 1 기사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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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시민도 군에서 프락치 권유를 받은 적이 있었다고 한다. 물론, 말로 권유하는 게 아니라 코렁탕과 함께. [2] 여담이지만, '서울대 110여명 징계' 기사 왼쪽에 사진과 함께 나오는 기사는 대한민국의 첫 전동차 사고로 알려진 휘경역 열차 사고이다. [3] 당시 독일 유학은 양질의 교육과 저렴한 유학 비용으로 가성비가 좋은 선택이었다. 있는 집 자식들은 도미해서 미국 대학에서 석박을 땄겠지만... [4] 이후 2004년에는 유시민이 폭행, 고문을 현장에서 지시했다고 다시 인터뷰를 했다. # [5] 본인의 정확한 워딩은 "추측된다."는 것이다. [6] 물론 두사람의 이후 행보는 평이하게 다르지만 그건 그 행보들 자체를 가지고 따질 일이다. [7] 심재철은 서울대 총학생회장이라는 가장 상징적인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가장 심각한 고문을 당해야 했다. [8] 다르게 말하자면 정권교체란 대의(해일)를 위해 성추행 문제 해결이란 소의(조개)를 희생시켜야 된다는 뜻이다(...) [9] 인터뷰 영상 [10] 문재인 대통령도 경남, 비호남출신이기 때문에 친 민주당 성향을 띈다고 해서 호남에 대한 생각을 접었다고 볼 수는 없다. [11] 이후 알쓸신잡에서 과거 김대중대통령의 정치철학인 상인의 현실점 감각과 서생의 문제의식에 대해서 어느쪽을 받아들여도 나머지부분이 대중들에게 받아들이기 힘들어 평가 매우 극단적으로 나뉘어졌다 라고 발언한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