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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4 19:43:26

윌리엄 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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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1353b4><colcolor=#fff>
영국 하노버 왕조 제5대 국왕
윌리엄 4세
William IV
파일:William_IV_in_1833_by_Shee_cropped.jpg
출생 1765년 8월 21일
잉글랜드 런던 버킹엄 하우스
사망 1837년 6월 19일 (향년 71세)
잉글랜드 버크셔 윈저 성
묘소 윈저 성
재위기간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 & 하노버 국왕
1830년 6월 26일 ~ 1837년 6월 19일
서명 파일:윌리엄 4세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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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1353b4><colcolor=#fff> 가문 하노버 가문
이름 윌리엄 헨리
William Henry
아버지 조지 3세
어머니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의 샤를로테
형제자매 조지 4세, 프레더릭, 샬럿, 에드워드 ,어거스타, 엘리자베스,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1세, 어거스터스 프레더릭, 아돌푸스, 메리, 소피아, 옥타비우스, 알프레드, 아멜리아
배우자 작센마이닝겐의 아델하이트 공녀 (1818년 결혼)
자녀 조지(사생아), 헨리(사생아), 소피아(사생아), 메리(사생아), 프레더릭(사생아), 엘리자베스(사생아), 아돌푸스(사생아), 어거스타(사생아), 어거스터스(사생아), 아멜리아 캐리(사생아), 샬럿, 엘리자베스[1]
종교 성공회 ( 잉글랜드 국교회) }}}}}}}}}
1. 개요2. 작위3. 생애
3.1. 왕위 계승 전3.2. 즉위 후
4. 가족관계
4.1. 조상
5.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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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국-하노버 동군연합의 마지막 왕. 1765년 8월 21일 조지 3세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조지 4세의 동생이다.

영국 해군(Royal Navy)에서 복무한 탓에 항해왕이란 별명으로 불렸다. 13살에 입대했으니 소년병이었다. 미국 독립전쟁 당시에 장교가 아닌 수병으로 복무했으니 더더욱 소년인 셈. 스페인과의 전쟁에도 참가해 군기를 빼앗아 아버지 조지 3세에게 바쳤는데 어째 후대의 윤색 느낌이 난다. 훗날 제독 지위를 받긴 했지만 명예직이었다.

2. 작위

3. 생애

3.1. 왕위 계승 전

유럽의 복잡한 정치판에서 확실하게 동맹을 맺을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는 왕가 간의 혼인이었다. 그래서 제정된 법률이 '1772년 왕실혼례법(Royal Marriage Act of 1772)'. 요지는 왕의 허락이나 추밀원의 동의 없는 결혼은 무효이며, 혹 그 결혼에서 아이가 태어나도 그 아이에게는 왕위 계승권이 없다는 것이다.[2][3] 이 결정에 반발해 윌리엄 4세를 비롯한 조지 3세의 몇몇 아들들은 허락받고 결혼하느니 차라리 사랑하는 사람과 살겠다고 동거에 들어간다.

이 법이 제정될 때엔 조지 3세의 후계가 확실하게 정해져 있었던 터라 자식이 많았던 왕실에서는 아들들이 그냥 제멋대로 살게 내버려 두었다. 윌리엄 4세, 당시 클래런스 공작 윌리엄이 동거한 사람은 연극배우 ' 도로시 블랜드(Dorothea Bland)', 혹은 '조던 부인(Mrs. Jordan)(1761-1816)'이었다.[4] 20년간 동거하면서 자녀를 10명이나 두었다. 후임 군주인 빅토리아 여왕이 자녀가 매우 많다고 하는데 윌리엄 4세가 낳은 자녀 수는 그 빅토리아 여왕보다도 많다. 게다가 요절 및 사산된 적자녀 5명까지 합치면 15명으로 아버지인 조지 3세의 자녀 수와 같다. 이쯤되면 윌리엄 4세도 아까웠을 듯. 물론 생물학적으로는 대를 이었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위로 젊은 형들이 둘이나 있어 왕위 계승과는 거리가 있었고, 그래서 위엄 있는 왕족 행세보다는 졸부 귀족급 정도의 그냥 부유한 생활을 영위했던 것으로 보인다. 윌리엄이야 타고나길 금수저이니 씀씀이가 좋고, 덩달아 이 조던 부인의 씀씀이가 너무나도 헤펐는지 거기에 질린 윌리엄은 1811년 이별을 고한다.[5]

거기까지라면 윌리엄 왕자나 그 사생아들이나 그냥 영국의 한 귀족 가문으로 그냥 평범하게 남았을 텐데, 갑자기 영국 왕위 승계가 삐그덕거리기 시작한다.

첫째 형 조지 4세는 윌리엄 4세 못지않은 문란한 사생활로 많은 비난을 받았고 고종사촌인 브라운슈바이크볼텐뷔텔의 카롤리네 공녀와 결혼한 뒤에도 불화가 심했으며, 결국 카롤리네와의 외동딸 샬럿 공주가 태어나고 부부 사이는 완전히 파탄나 그 이후로는 대놓고 별거하며 정부를 들여놓고 살았다. 조지 4세의 후계자였던 샬럿 공주는 당시 살아있었던 할아버지 조지 3세, 아버지 조지 4세의 뒤를 이은 계승 순위 2위로 영국 국왕 승계 법률상 사실상의 왕세손이자 훗날 여왕으로 즉위할 게 확실했었다. 유아 사망률이 높았던 18세기에도 샬럿 공주는 건강히 잘 자랐고 또 영특해서 영국 왕실과 대중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았다. 당연히 그녀의 결혼도 엄청난 화두였는데 1816년 샬럿은 훗날 벨기에 국왕이 되는 레오폴드 1세[6]와 결혼했는데,[7] 결혼 첫 해에 임신을 했다가 유산하고 그 다음 해에 재차 임신해서[8] 이번에는 만삭은 채웠지만 난산 끝에 사내아이는 사산, 하루를 못 넘기고 임신중독증으로 사망했다.

유력했던 후계자가 사망하고 앞서 설명했듯이 조지 4세는 카롤리네와의 관계가 더는 돌이킬 수 없이 파탄나서 더이상의 후계자를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 불똥은 나머지 조지 3세의 왕위 계승권에 가깝고 아직 정식 결혼을 하지 않은 아들들에게 튀었다. 말 그대로 1817년판 정자왕 선발대회.

참고로 이 당시 영국의 왕위 계승 법칙으로는 왕 또는 한 계승권자에게 자녀가 있으면 그 자녀가 그 왕 또는 계승권자의 다음 순위를 차지하며, 부 또는 모가 같은 친형제 자매는[11] 같은 성별이면 태어난 순으로 우선권을 갖고, 성별이 다르면 남성이 우선권을 가졌다. 때문에, 조지 3세에게 딸들이 있긴 했지만 그들은 몇 번째 자녀냐에 상관없이 이 일곱 왕자와 그들의 자손들보다 계승서열이 밀렸다.[12]

조던 부인과 이별 후 혼자 지내다[13] 점점 부담이 되어가는 위자료에, 그렇다고 의회에서 받는 품위유지비만으로는 더 이상 씀씀이 감당이 불가능했던지 의회에서 빚을 대신 갚아주는 조건으로 추밀원이 추천한 작센마이닝겐의 아델하이트 공녀와 1818년 결혼한다. 결혼 당시 윌리엄 4세는 52살이었고 아델하이트는 25살로 윌리엄보다 무려 27살 연하였다. 자식뻘이나 다름없는 어린 신부를 들인 것에 미안했던 새신랑 윌리엄은 이후 외도를 하지도 않았고 씀씀이도 줄여 이후 만년적자를 면하게 된다.

아델하이트 왕비는 검소한 생활로 국민들에게 사랑받았지만 자식 복이 없어 윌리엄 4세와의 다섯 아이를 모두 잃었다. 첫째 샬럿 공주는 1819년 3월 27일에 태어났지만 몇 시간 후에 죽었고, 둘째는 1819년 9월 5일 사산하였다. 셋째 엘리자베스 조지아나 아델라이드 공주는 1820년 12월 10일에 태어나 2개월 22일 만에 죽었다. 넷째와 다섯째는 쌍둥이 아들이었는데 1822년 4월 8일에 출생 당시 모두 사산하였다. 그래도 윌리엄 4세가 즉위하고 아이를 가질 연령이 지나도 임신 소문이 끊이지 않을 정도로 윌리엄과 아델하이트 부부는 금슬 좋은 결혼 생활을 한 것으로 보인다.

다른 형제들과 다르게 아버지로서는 상당히 살가웠는지 아버지 조지 3세가 붕어하고 형이 조지 4세로 즉위하면서 왕위 계승이 확실해지자 조던 부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사생아들을 위해 새로 귀족 가문을 하나 만들어주었다. 그게 ' 피츠클래런스(FitzClarence) 백작 가문'이다.[14] 아이가 없었던 아델하이트 또한 어머니가 없던 윌리엄 4세의 어린 사생아들을 잘 돌봐주었다고 한다.

결혼하기 전까지 확실하게 즐겼고, 군인으로 미국 독립 전쟁에도 복무했고, 결혼 후에는 부인에게 충실했으며 결혼 전 동거녀와의 사생아들도 확실하게 챙긴 걸 보면, 15명이나 되는 형제들 중 과연 백미라고 해도 되겠다. 그게 아니었다면 영국 총리를 지냈던 데이비드 캐머런이 윌리엄 4세의 후손을 자처할까?

3.2. 즉위 후

형이던 조지 4세가 후사 없이 1830년에 사망하자 64살의 나이로 즉위한다. 그는 찰스 3세가 2022년 73살의 나이로 즉위하기 이전까지 영국에서 즉위 시점 기준 가장 나이가 많은 왕이었다.

자신의 나이도, 왕비의 나이도 더이상 아이를 기대할 수 없게 되자 후사를 걱정하던 윌리엄 4세는 조카 빅토리아 공주에게 관심을 보이고 후계자로 내심 기대를 쏟았다. 그런데 그 중간에 끼어들어 훼방을 놓은 사람이 제수이자 빅토리아 공주의 모친인 켄트 공작 부인 빅토리아 공녀와 그녀의 내연남 존 콘로이(1786-1854)였다.

이 둘은 작당을 하고 이후 여왕 즉위가 확실한 빅토리아 공주를 자기네들 입맛에 맞게 조종하려 했다. 그 때문에 빅토리아 여왕이 상당히 어려서부터 조숙해지고 성격 또한 욱하는 쇠고집이 되었다. 윌리엄 4세가 가정교사를 소개해 줘도 필요 없다며 물리치고, 파티에 초청을 해도 바쁘다는 핑계로 윌리엄 4세와 빅토리아 공주를 일부러 떨어뜨려 놓으려 했다. 백부로서의 애정뿐만 아니라 후계자 수업을 하려면 당연히 윌리엄 4세와 빅토리아가 직접 만나야 할 일이 많은데, 이런 식으로 멀리하는 건 의도가 노골적인 간섭이었다. '후계자' 교육은 엄연히 국왕의 권한이므로 그 후계자를 만나지 조차 못하게 한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윌리엄 4세의 권한을 침해하는 것이나 다름 없었다.

여기에다 아델레이드 왕비도 조카 빅토리아 공주를 친딸처럼 매우 예뻐했는데 이런 식으로 만남을 거절당하자 매우 섭섭해했고, 이 꼴을 본 윌리엄 4세는 당연히 제수 켄트 공작부인 빅토리아와 내연남 존 콘로이 둘에 대한 반감이 더 강해졌다.

노골적으로 빅토리아 공주의 일거수 일투족을 간섭하고 후일 섭정 의지까지 내비쳤던 둘과 국왕이 대립하는 상황 속에서, 윌리엄 4세와 켄트 공작 부인의 관계가 파국에 이른 것은 1836년 윌리엄 4세의 생일 저녁 만찬에서였다. 윌리엄 4세는 빅토리아 모녀와 귀빈들이 모여 있는 저녁 담화에서 다음과 같은 폭탄 발언을 했다.
' 하느님께서 짐을 최소한 9개월은 더 살게 해줄 거라 믿소... 내 그렇게 되면 지금 내 옆자리의, 저 악마 같은 조언자에게 둘러싸여 상황도 제대로 제어 못해서 엉뚱한 곳에서 엉뚱한 짓이나 하는 내 무능한 제수씨가 내 조카의 왕위를 가지고 노는 일 없이, 잠정 왕위 계승자인 저기 앉아있는 젊은 아가씨에게 왕위를 넘겨주게 되는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이오!'

'I trust to God that my life may be spared for nine months longer ... I should then have the satisfaction of leaving the exercise of the Royal authority to the personal authority of that young lady, heiress presumptive to the Crown, and not in the hands of a person now near me, who is surrounded by evil advisers and is herself incompetent to act with propriety in the situation in which she would be placed.'

이는 '난 내 조카가 성인이 될 때까지 살 테니 네놈들은 섭정 따위는 꿈도 꾸지 마라!'고 대놓고 일갈한 것이다.

기록에 의하면 당시 빅토리아 공주는 충격에 눈물만 흘렸고 어머니 켄트 공작 부인 빅토리아 공녀는 표정 관리가 안 돼서 붉으락푸르락했다고. 이 장면은 2009년 에밀리 블런트가 여주인공을 한 영화 ' 영 빅토리아(The Young Victoria)'[15]에 잘 나와있다.

왜 이렇게까지 켄트 공작부인에게 사자후를 날렸냐면, 영국에서는 18세부터 성년으로 봤고 왕위의 경우 18살 이전에 즉위하면 6년 간의 섭정을 거치는 법률이 정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켄트 공작부인과 그 내연남은 나이가 많은 윌리엄 4세가 혹시 빅토리아 공주가 성년이 되기 전에 사망하면 그 6년의 기간 동안 섭정을 맡을 야심을 품었고, 어릴 적부터 빅토리아를 열심히 조이고 갈궈댔다. 그런 막후 사정을 자세히 알고 있는 윌리엄 4세로서는 더이상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국왕의 공언대로 윌리엄 4세는 약 10개월 후 빅토리아 공주가 18살로 성인이 된 지 26일 후에 사망하여 켄트 공작부인과 내연남 존 콘로이는 섭정이 되지 못했다. 빅토리아 여왕은 콘로이에게 적당한 연금만 지급하며 강제로 퇴직시켜 버렸고, 켄트 공작 부인도 거처를 변두리로 옮기게 해서 궁정 일에 간섭하지 못하게 했다. 이런 관계는 빅토리아 본인이 자식을 낳고 어느 정도 국왕으로서 자리를 잡아 나간 이후, 남편인 앨버트 공이 열심히 중재한 뒤에야 조금 나아졌다.

한편 빅토리아 여왕의 즉위로 인해 영국과 하노버 왕국의 동군연합은 해소된다. 하노버 왕국은 살리카법에 따라 여성의 왕위 계승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윌리엄 4세가 사망한 후 하노버 왕국의 왕위는 윌리엄 4세의 동생인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1세에게 돌아갔다.

4. 가족관계

4.1. 조상

본인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윌리엄 4세
(William IV)
<colbgcolor=#fff3e4,#331c00> 조지 3세
(George III)
<colbgcolor=#ffffe4,#323300> 웨일스 공 프레더릭
(Frederick Louis, Prince of Wales)
조지 2세
(George II)
브란덴부르크안스바흐의 카롤리네 공녀
(Princess Caroline of Brandenburg-Ansbach)
작센고타알텐부르크의 아우구스타 공녀
(Princess Augusta of Saxe-Gotha-Altenburg)
작센고타알텐부르크 공작 프리드리히 2세
(Frederick II, Duke of Saxe-Gotha-Altenburg)
안할트체르프스트의 막달레나 아우구스타 공녀
(Princess Magdalena Augusta of Anhalt-Zerbst)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의 조피 샤를로테 공녀
(Princess Charlotte of Mecklenburg-Strelitz)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의 카를 루트비히 프리드리히 공작
(Duke Charles Louis Frederick of Mecklenburg-Strelitz)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 공작
아돌프 프리드리히 2세
(Adolphus Frederick II, Duke of Mecklenburg-Strelitz)
슈바르츠부르크존더스하우젠의
크리스티아네 에밀리 공녀
(Princess Christiane Emilie of Schwarzburg-Sondershausen)
작센힐트부르크하우젠의
엘리자베트 알베르티네 공녀
(Princess Elisabeth Albertine of Saxe-Hildburghausen)
작센힐트부르크하우젠 공작
에른스트 프리드리히 1세
(Ernest Frederick I, Duke of Saxe-Hildburghausen)
에어바흐에어바흐의 조피아 알베르티네 여백작
(Countess Sophia Albertine of Erbach-Erbach)

5. 여담

산업혁명 당시에 심각했던 아동노동을 금지시키고 노예제를 폐지하고 선거법을 개정하여 투표권을 넓혀 영국의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한 왕이기도 하지만 영국 왕 가운데 마지막으로 의회의 반대를 무릅쓰고 총리를 임명한 인물이기도 하다.

아내와 사이가 완전히 틀어진 형 조지 4세가 아내 캐롤라인 왕비를 대관식에 참석하지 못하게 한 것처럼 그도 대관식 관련 기행을 남겼다. 그냥 하기 싫다고 한 것이다. 당황한 관료들이 규모를 축소해 검소하게 치르자고 해서 겨우 응했다고 한다. 가끔 격정적인 면이 드러나기도 했지만 보통 때는 선량한 품성이라 친근한 (나쁘게 말하면 얕보이는) 왕이었다. 64살의 나이에 왕위에 올랐고 젊은 시절에 런던을 자주 돌아다닌 기억이 있어 런던 시내를 그냥 돌아다니며 시민들과 인사하다가 아는 사람을 만나면 거리낌 없이 마차에 태우곤 해 호위를 맡은 주변 사람들이 골머리를 썩게 했다. 대관식 외에도 사치스럽고 복잡한 의례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이런 성격과 젊은 시절부터 행한 한량 짓들을 연결해보면, 나이 먹어서 검박하게 지내겠다고 생각을 바꾸었다기 보다는 처음부터 그냥 복잡하고 형식적인 걸 싫어한 성격인 모양이다.

선거법 개정 문제 때도 이와 관련된 에피소드가 있다. 1832년 선거구를 개편하는 선거법 개정을 위해선 상원의 의회해산이 필요했다. 당시 상원은 이 선거법 개정을 반대하는 농촌 기반의 귀족들이 대다수였기 때문이다. 당시 총리인 찰스 그레이는 윌리엄 4세에게 이를 요청했고 윌리엄 4세는 이를 받아들였다. 그런데 의회 해산을 하려면 국왕이 직접 국회의사당으로 와야 했다. 그러나 국왕의 행차를 위해서 거리를 정리하고 방문 의전을 진행하는데 필요한 절차가 너무 복잡해졌다. 그러자 윌리엄 4세는 "마차 말고 그냥 승마용 말을 타고 가버립시다."라고 말한 뒤 진짜로 말 타고 갔다. 의회 입구에 도착해서는 직접 걸어서 상원에 들어가서 의회 해산령을 선포하였다. 굳이 현대로 비유하면, 쓸데없이 경호 의전 차리는 게 귀찮다며 왕이나 대통령이 직접 자가용 운전대를 잡고 혼자서 국회에 출석한 격이다.

그리고 조지 3세의 아들들을 귀찮게 만들었던 '1772년 왕실혼례법(Royal Marriage Act of 1772)'은 빅토리아 여왕의 자식 복, 그리고 여왕 부부의 야심과 국회의 지지로 '유럽의 할머니'라는 별명을 가져다 준다.

이 왕의 재위기간이었던 1832년 영국의 상선 암허스트호가 조선에 상륙해 통상을 요구한 최초의 이양선으로 기록되었다. 당시 조선의 국왕은 순조. 이 때 조선왕조실록 순조실록에는 위(씨)(威(氏))라고 음역되어 기록되었다.

위에서도 나왔지만 오랫동안 영국 역사상 즉위 시 최고령(64살)인 국왕이었다. 그러다가 2022년 9월 8일 찰스 3세가 73살의 나이로 즉위함으로써 이 기록은 깨지게 되었다.


[1] 자식이 이렇게나 많았지만 모두 왕위를 계승할 수 없었던 이유는 적자녀들은 이미 일찍 죽었고 나머지 자식들은 모두 도로시 조던이 낳은 사생아들이었기 때문이었다. 영국을 포함한 유럽 왕실에서 사생아는 절대로 왕이 될 수 없었다. [2] 이 법이 제정된 데에는 왕실 집안 사정도 크게 작용했는데, 시초는 1771년에 조지 3세의 동생인 컴벌랜드와 스트래선 공작 헨리 왕자가 멋대로 평민 출신 하원의원의 딸이자 과부인 앤 호튼과 결혼한 것이었다. 동생이 왕족에 안 어울리는 결혼을 하자 이에 화가 난 조지 3세는 이걸 무효화하려고 왕실혼례법을 추진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조지 3세의 또 다른 동생(헨리에게는 형)인 글로스터와 에든버러 공작 윌리엄 왕자가 로버트 월폴의 차남의 사생아이자 어느 백작의 자녀 딸린 과부인 마리아 월폴과 이미 몇 년 전에 형에게 말하지도 않은 채 비밀리에 결혼했다는 사실까지 조지 3세가 알게 되고 조지 3세는 더욱 노발대발해서 윌리엄의 결혼까지 무효화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법안 성립 전에 적법하게 이루어진 결혼이었기 때문에 소급적용금지의 원칙에 따라 이들의 결혼은 해당 법의 영향권 밖이었고 조지 3세는 뜻한 바를 아무것도 이룰 수 없었다. [3] 2015년 3월 26일에 와서야 폐지되었다. [4] 실명이 아닌 예명. 블랜드는 동거는 했어도 평생 동안 결혼은 하지 않았다. [5] 거의 결혼한 거나 마찬가지였던 조던 부인은 연극 무대에 더 이상 오르지 않는 조건으로 딸만의 양육권과 1년에 £4000 파운드(2015/12 기준 한화 약 3~4억)의 위자료를 받았지만 다시 무대에 오르락 내리락하다 딸들의 양육권도 빼앗기고 결국 쓸쓸하게 영국도 아일랜드도 아닌 타지인 프랑스에서 1816년 사망했다. [6] 벨기에 국왕으로 즉위하기 전의 신분은 작센코부르크잘펠트의 공자였다. [7] 야망이 넘치다 못해 온 몸에 도배를 한 것으로 유명했던 레오폴드 1세 때문에 여론은 이 결혼을 비관적으로 봤지만 남겨진 기록으로 보아 행복했던 결혼으로 보인다. [8] 이 임신은 당시 영국 증시를 들썩이게 할 만큼 엄청난 관심을 받았다. [9] 프레더릭의 증조할아버지 조지 2세와 프리데리케의 증조할머니 조피 도로테아가 남매 지간이다. [10] 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와 첫 번째 아내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의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 공녀의 딸. 참고로 프리드리히 빌헬름과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 둘 다 프리드리히 대왕의 조카들로 사촌간 혼인이었다. 그러나 부부 사이가 굉장히 나빠서 서로 대놓고 맞바람을 피우다가 끝내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는 궁정 악사와의 사이에서 사생아를 임신하고 야반도주 계획까지 세웠다가 발각되었고, 그 사태에 단단히 분노한 프리드리히 대왕과 프리드리히 빌헬름에 의해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는 뱃속의 아이를 낙태당한 뒤 남편에게도 이혼당하고 슈체친에 감금되었다. 그나마 이후 프리드리히 대왕의 기분이 풀어지면서 처우는 상당히 개선되었고, 이혼 이후에는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와의 사이도 완화되어 여러 편의를 봐줘서 슈체친에서 유유자적하게 살다가 사망했다. [11] 같은 왕 또는 계승권자를 부모 중 하나로 둔 이복형제 자매나 이부형제 자매일 경우 친형제 자매에 준해서 본다. [12] 지금은 2010년대에 법칙이 바뀌어 친형제 자매는 성별에 상관없이 태어난 순으로 우선권을 갖는다. 법칙이 바뀌기 전에 태어난 사람들에게는 구법이 적용되는데, 직계와 직계에 가까운 왕족들 기준으로 대략 윌리엄 왕세자의 자녀와 조카 항렬부터 개정된 법칙이 적용되고 있다. [13] 이때도 데리고 다니던 여인들이 있어서 지금도 윌리엄 4세의 후손임을 내세우는 사람들도 있다. [14] 윌리엄 4세의 사생아들은 모두 피츠클래런스를 성씨로 달았다. '클래런스의 아들들'이란 뜻으로 윌리엄 4세 즉위 전 작위이던 클래런스 공작(Duke of Clarence)에서 따왔다고 한다. 서장자(庶長子) 조지는 1831년 윌리엄 4세로부터 먼스터 백작 작위를 받았지만, 7대 백작 앤서니 피츠클래런스가 사망한 2000년 12월 30일에 후계자 없이 단절되고 만다. [15] 2010년 오스카 의상상 수상. 빅토리아 여왕이 즉위하기 바로 전부터 신혼 초까지를 다룬 영화. 호화스런 의상과 배경이 아름다운 영화이다. 고증은 상당히 잘 되어 있는데 일부 세부 묘사와 엔딩이 실제와 좀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