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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할스테드

<colbgcolor=#dddddd,#000000><colcolor=#000000,#dddddd> 윌리엄 할스테드
William Halsted
파일:1000116901.jpg
본명 윌리엄 스튜어트 홀스테드
William Stewart Halsted
출생 1852년 9월 23일
뉴욕주 뉴욕시
사망 1922년 9월 7일 (향년 69세)
메릴랜드주 볼티모어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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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 의사
학력 예일 대학교
컬럼비아 대학교

1. 개요2. 생애
2.1. 어린 시절2.2. 전설의 시작2.3. 사망
3. 의학의 선구자
3.1. 현대 레지던트의 정립3.2. 수술용 장갑의 도입
4.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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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의사.

윌리엄 오슬러, 하워드 애트우드 켈리, 윌리엄 헨리 웰치와 함께 존스 홉킨스병원의 4명의 창립 의사 중 한 명이다.

마취제의 선구자이며 레지던트 제도, 무균 수술을 강조했으며 그 외 국부 수술을 고안한 인물이다.

외과의 아버지로도 불린다.

2. 생애

2.1. 어린 시절

1852년 뉴욕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건조 식품을 공급하는 조직의 사장이자 뉴욕 병원의 운영 위원이었다. 뉴욕 주에만 집을 두 채를 둘 정도로 매우 부유한 집안의 장남이었다. 1862년에 10살이 되던 해, 매사추세츠에 있는 기숙학교에 보내져 교육을 받았으나, 학교가 마음에 들지 않아 탈주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고 한다. 이후 필립스 아카데미에 등록하여 1869년에 졸업했고, 1년간 공부를 한 뒤에 예일대에 입학했다. 학교에 입학해서는 축구팀 주장을 맡거고 조정 경기에서 노를 저었으나 이후의 그 업적에 맞지 않게 학업 성취도가 평균 미만이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다 4학년에는 의술에 관심을 붙인 듯 해 의과대학에서 의학 강의를 들으며 해부학과 생리학을 주제로 한 책을 공부했다.

1874년에 예일대학교 뉴욕의과대학 (컬럼비아 대학교 의학부)에 입학하게 된다. 의과대학에 입학한 동기는 명확하지 않으나, 그의 아버지에게서 영향을 받아 입학했다고 추측하고는 한다.

그러나 입학 2년 뒤, 점점 지쳐가던 그는 로드아일랜드의 블록 아일랜드로 갔으며, 그곳에서 낚시와 항해와 같은 활동을 하며 지냈다고 한다. 그리고는 뉴욕 벨뷰 병원의 인턴십에 지원하였고,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하여 1년간 인턴으로 근무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병원의 매우 비위생적인 광경을 보게 된다. 이를 보자 할스테드는 1867년에 개발된 조셉 리스터의 방부제 사용 기술을 보았는데, 이게 발단이 되어 그것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고, 인턴십 기간 동안 감염 문제를 해결하는 데 열중했다고 한다.

이후 의과대학 수업에서 상위 10인 안에 들며 학업을 마쳤고, 의학 박사 학위를 받으며 졸업하게 된다.

2.2. 전설의 시작

할스테드는 당시 미국에서 받을 수 있는 의학 교육을 거의 다 수료한 상태였다. 그러나 교수들은 대개 독일이나 프랑스로 유학을 다녀온 이들이었고, 교수들 밑에서 과학적 접근성의 중요성을 받아들인 할스테드는 이후 저명한 외과의사들과 과학자들의 지도 아래 유럽으로 유학을 떠나게 된다. 유럽에서는 이제 막 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기 시작했다. 시기가 잘 맞았던 셈일수도 있겠다. 유학을 가서도 독일 여러곳을 돌아다니면서 유명한 강의와 진료소를 돌아다녔고, 외과학에 눈을 뜨게 된다.

1880년 다시 미국으로 돌아온 할스테드는 뉴욕시에서 유명한 외과의로 자리잡게 되고, 여러 병원에서 일하게 된다. 놀라운 수술 결과들로 이름을 날리며 실험을 계속하는데, 1884년, 아직 코카인의 효능과 중독성이 밝혀지지 않았던 시기, 오스트리아 안과 의사 칼 콜러의 보고서를 읽고서 그는 눈 표면에 코카인을 주입했을 때의 마취력을 설명하면서, 직접 자기 몸과 동료 의사들에게 코카인을 주입하며 코카인을 이용한 국소마취의 가능성을 확신하게 된다. 그리하여 1885년, 코카인을 이용한 마취 수술을 수천 건 진행한다. 그 과정에서 혈액의 흐름이 감소되면 해당 부위의 국소마취가 더 오래 지속된다는 것도 관찰하고, 환자에게 마취제를 주입하기 전 직접 자기 몸에 주입해보기도 했다 마취 부위를 고무로 묶는 방법 등도 활용했다. 그리고 척추마취에도 성공, 이후 차단마취를 개발해낸다.

그러나 할스테드와 동료들은 코카인에 중독되었고, 1886년과 이듬해 중독 치료를 위해 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당시 그가 이러한 행위에도 명성을 유지하던 건 마약 중독에 대해 아직 사람들이 많이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결국 그로 인해 더는 뉴욕시에서 일할수 없게 되었고, 볼티모어로 떠나게 된다. 그곳에서 그는 1889년 5월 개원한 존스 홉킨스 대학병원에서 외래과장으로, 병원 외과의 대행이 된다. 그의 명성에도 불구하고 이런 낮은 입장이 된 이유는 마약에 대한 행정부의 불신도 한 몫 했다. 1890년에 외과의로 임명받고서 1892년, 존스홉킨스 대학의 빅4 강사로 임명히게 되고, 초대 외과 교수로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그의 교육방식은 고전적인 방식에서 크게 벗어난 교육이었다. 학급에서 상위권을 차지하던 학생만을 위해 이론과 실습이 결합된 실재적인 교실을 만들게 된다. 그러나 상위권 학생들만을 위한 수업이 주를 이루게 되었고, 하위권 학생들은 수업에서 내쳐지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2.3. 사망

이후 노스캐롤라이나의 하이햄튼 산악 휴양지에서 지내던 그는 담석과 담관염 수술 합병증, 기관지 폐렴으로 인해 1922년 9월 7일에 사망하게 된다.

3. 의학의 선구자

그는 국부 수술, 유방 절제술, 마췌제 이외에도 여럿 수술을 직접 처음으로 도입하여 시행했는데, 여기에는 미국 최초의 담낭 제거술과 응급 수혈도 있다.

1882년, 그는 미국 최초의 담낭 수술 중 하나인 담낭 절제술을 본인의 어머니에게 새벽 2시에 자신의 집 식탁 위에서 시행하였으며, 담석 7개를 성공적으로 제거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여동생이 출산한 뒤 여동생을 보러 갔는데, 출혈로 빈사상태에 빠진 그녀를 보고는 자신의 혈액을 여동생에게 수혈하고는 여동생을 직접 수술하여 목숨을 구해냈다고 한다.

3.1. 현대 레지던트의 정립

그는 존스 홉킨스 대학 외과학부를 이끌며 외과학 레지던트 제도를 고안하게 된다. 기존과는 다르게 책임의 등급이 나뉘고, 상당히 긴 수련 기간이 필요하며, 직접 병원에서 일하고 아주 제한적인 생활 규칙을 따라야만 했으며 급여는 아주 적었고 정상적인 일상생활이 불가능했다. 그래서 병원에서 살다시피 했기 때문에 Resident, 즉 거주자라는 이름이 붙게 된다.

이 방식은 곧 미국 전역으로, 내과 등 다른 계열의 분과에도 퍼져나가게 된다. 그러나 이것이 세계적인 표준이 된 것은 그의 사후인 2차 세계대전 이후가 되었다. 사람이 죽어나가는 판에 의사가 필요했지만, 충분한 훈련 없이 외과의가 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3.2. 수술용 장갑의 도입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수술 기법을 강조했던 그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또 있었는데, 바로 무균술이었다. 상시 무균 상태여할 의사의 손을 만들기 위해 고민했다. 당시의 손 씻기 규정은 매우 가혹했는데,
1. 비누로 손을 씻는다
2. 과망가니즈산칼륨용액에 손을 세척한다.
3. 뜨거운 옥살산에 손을 담근 다음,
4. 독성 염화수은 용액[1]에 다시 한 번 세척한다.
이런 정신나간 규칙은 본인 뿐 아니라, 의사, 전공의, 간호사들에게도 적용되었다.[2] 그러던 어느날, 병원에 신입 간호사가 들어오게 되는데, 미래의 아내 캐럴라인 햄프턴 되시겠다. 뛰어난 실력과 수려한 외모를 갖춘 그녀는 할스테드와 일하는 사람들 중 드물게 '뛰어난 능력을 갖춘 간호사' 라는 찬사를 받을 정도였다. 항상 심술궂었던 그의 표정이 햄프턴 앞에서는 친근한 표정으로 바뀌기도 했다.

그러나 1889년 겨울, 햄프턴은 사의를 밝히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저 위의 손 세척 규정 때문이었다. 평소에도 민감한 피부인데, 저런 과격한 규정을 따르자니 심한 피부염처럼 피부가 부어오르고 습진이 발생했던 것. 처음에는 콜로디온이라는 젤라틴 물질을 발라보았지만 금이 가는 경향이 있었다. 이대로 햄프턴을 포기할수 없었던 할스테드는 그녀의 손을 석고로 본따 깁스를 만들어 굿이어에 보냈는데, 요청 사항은 이러했다.
최대한 얇은 고무 장갑 두 켤레 만들어 주셈. 비용은 얼마가 들어도 상관 없음.
햄프턴만을 위해 특별히 고안된 장갑은 할스테드가 휴가를 마치고 와 보니 수술실의 다른 직원들도 고무장갑을 끼고 있었다. 어쨌든 장갑은 의료진의 손을 보호해 주었으며, 수술 봉합용 실과 같은 미세한 물체의 질감까지 느낄 수 있었고, 탄성도 좋았으며 증기로 살균도 가능했다고 한다. 1889년, 수술 중 장갑을 착용하는 것이 수술 후 감염률이 17%에서 2% 미만까지 줄어든다는 놀라운 결과가 발표되었으며, 이것이 현대 수술용 장갑의 시작이 되었다.

4. 여담



[1] 염화제1수은 [2] 그래서 이걸 버티지 못하고 도망간 전공의들이 상당히 많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