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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2-12-25 16:07:40

윌리엄 스넬그레이브



1. 개요2. 해적 포로 생활3. 노예 무역4. 출판5. 기타

1. 개요

William Snelgrave (1681~1743)

윌리엄 스넬그레이브는 영국 출신의 노예선 선장으로, 해적의 포로가 되었던 전적이 있다. 그 당시 노예 무역 연합장으로 회원 중에는 악명 높은 해적이 되기 전의 바솔로뮤 로버츠가 있었다. 그는 17세기 해적의 생활 상을 기록으로 남겨 후대의 호사가들에게 거한 떡밥을 던져주었다.

2. 해적 포로 생활

윌리엄 스넬그레이브는 아버지 윌리엄 소유의 이글호 일등항해사로 노예 이송을 시작했다. 아버지 윌리엄은 1704년 버지니아에서 사망했고, 아버지 죽음 이후로 스넬그레이브는 곧바로 수많은 항해를 하는 무역선의 선장이 되어 노예 무역 상아 무역에 종사하며 영국 무역 연합의 장으로 활동했다.

윌리엄 스넬그레이브(William Snelgrave)는 1719년 서 아프리카 해안을 항해하다가 라 부슈(La Buse)로 알려진 프랑스 해적 올리비에 르봐세르(Olivier Levasseur), 영국 출신의 토마스 콕클린(Thomas Cocklyn)과 사기꾼 해적 하웰 데이비스(Howell Davis) 해적 연합의 습격을 받았다. 배가 나포되어 항복하라는 경고를 듣지 않고 저항하다가 토마스 콕클린의 갑판수의 저격에 팔에 총상을 입고 시원하게 두들겨 맞다가 만신창이로 포로가 되었다. 해적 깃발을 보고 항복하지 않으면 잔혹하게 살해 당하는 것이 그 당시의 불문율이었기에 노예선 선장 스넬그레이브의 삶은 그렇게 마무리 되는 것 같았으나, 그의 부하들이 "제발(For God's sake), 우리의 선장을 죽이지 마십시오. 우리는 그보다 나은 사람을 이제껏 보지 못했습니다"는 집단 절규에 간신히 목숨을 부지하게 되었다.

그는 해적들에게 죽음을 무릅쓰고 저항하던 투지와 상인 특유의 친화력으로 해적들에게 호감을 사서 해적선을 비교적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었다. 그렇게 널널한 포로 생활을 겪으면서 해적의 생활 상과 그들의 의사결정 회의를 가까이서 기록했다. 그가 기록한 하웰 데이비스가 해적을 하게 된 경위를 보면 그 역시 노예선의 항해사로 근무하다가 해적 에드워드 티치에게 사로잡혔다고 한다. 유쾌한 데이비스가 에드워드의 마음을 얻어 산하로 들어갔다가 브라질에서 도주하여 부하 선원들과 바르바도스에 도착했지만 해적 혐의를 받아 3개월의 옥살이 했고 석방하는 그길로 빡쳐 해적이 되기로 결심했고 항해를 하다 선장에게 반란을 일으켜 해적이 되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덧붙이기를 "해적판에 뛰어드는 이유는 상인들과 잔인한 선장들에게 복수하기 위해서였다"고 주장했다. 그것이 스넬그레이브가 해적들에게 항복하지 않고 끝까지 항전했지만 목숨을 부지했던 이유였다. 해적들은 스넬그레이브에게 해적을 종용한걸로 보여지지만 시간이 흐른 후 거친 뱃사람의 기질이 그러하듯 해적 연합의 선장들이 술집에서 대판 싸우고 각자의 길로 가게 되었다.

당시 뱃사람들이 해적에 뛰어드는 이유에 해적에게 생포되어 해적질을 등용강요당해 들어서는 경우가 많았다. 앞서의 에드워드 티치 하웰 데이비스의 사건과 그렇게 해적이 된 데이비드가 노예선 선장 바솔로뮤 로버츠를 생포하여 해적으로 만들고 그가 죽자 선장으로 추대되는 등이 그렇다.

3. 노예 무역

16세기 초 당시의 노예 수급은 알려진 것처럼 납치가 아니라 지역 토후국의 정복전쟁으로 인해 발생한 포로와 이미 그들의 노예인 자들을 정당하게 구매하는 방식이었다.

1727년 윌리엄 스넬그레이브 선장은 베냉의 노예 해안(Slave Coast)을 돌며 노예를 수급하다 다호메이 왕국에게 의해 막 정복당한 우이다에 도착했다. 안티구아로 이송하기 위한 아프리카인 화물(...)을 모으는 중 놀랍게도 아르드라 지역의 아프리카 토후국 추장의 초대를 받았다. 무역상이자 모험가였던 그는 미래의 노예 공급원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감히 거절하지 않아야 하는 것과 또 한편으로는 추장과 그의 무리가 잔인하고 야만적이며 적들의 섭취하여 강해지는 믿음을 가진 식인종이라는 사실에 딜레마에 빠졌다. 결국 야만인들이 두려워할 만한 소총과 권총으로 잘 무장한 선원 열 명을 호위로 데려가서 방문하기로 한다.

강 상류를 400미터 정도 거슬러 올라가자 그늘진 나무 아래 의자에 앉아서 오십여명의 몸종과 전사들에게 둘라싸여 있는 추장이 있었고, 활과 검, 미늘창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스넬그레이브는 추장에게 선물을 진상하는 동안 무장한 선원들은 그 반대편에 스무 걸음쯤 떨어져 서서 호위 위치를 지켰다. 잠시 후 스넬그레이브는 작은 흑인 아이가 말뚝에 다리르 묶여 땅속에 박혀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두 명의 아프리카 제사장이 근처에 서 이었는데, 그 아이는 18개월 정도 되어 보이는 잘 자란 아이였지만, 몸에 파리와 해충이 뒤덮여 있어 고통스러워 보였다. 마음의 동요를 느낀 노예선 선장은 추장에게 아이가 이런 식으로 묶여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라고 물었다. 추장은 에그보 신의 번영을 위해 오늘 밤 이 아이가 희생되어야 하기 때문이다고 대답했다. 이 대답에 분노를 느낀 스넬그레이브는 재빨리 한 선원에게 아이를 땅속에서 꺼내서 보호해 주라고 명령했다. 그러는 동안 추장의 호위 중 하나가 선원에게 달려와서 창을 휘둘렀다. 스넬그레이브가 일어서서 권총을 꺼내자 그 남자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고 장 내에 한바탕 소동이 일어났다. 질서가 회복되자 스넬그레이브는 추장에게 호위의 위협 행동에 대해 불만을 제기했다. 추장은 스넬그레이브 자신도 선원에게 추장의 재산인 아이를 붙잡으라고 명령한 것이 잘한 것은 없다고 대답했다. 선장은 자신의 종교에서 연약하고 순수한 아이를 죽음으로 내모는 일과 같은 끔직한 일은 허락되지 않는다고 설명하며 양해를 구했다. 또한 그는 인간 본성의 대명제는 타인에게 행함에 있어 타인이 우리에게 행하기를 원하는 행동으로 행하는 것이라는 황금률을 덧붙였다. 이 갈등은 결국 신학적 방식으로 해결되지 않았고 스넬그레이브는 아이를 사겠다는 제안을 함으로써 현금으로 해결되었다. 그는 2.5실링 정도 하는 하늘색 구슬을 제시했고 추장은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스넬그레이브는 매우 싼 가격에 놀랐고 무역상으로서 생각하기를 추장과의 거래는 어떤 상황이든 자신들에게 이득이 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나머지 알현 시간은 스넬그레이브가 그들을 위해 가져온 유럽의 음식과 럼주를 먹고 마시는 것으로 채워졌다. 아프리카 야자수 탁주도 있었지만 스넬그레이브 자신은 교묘하게 독을 탔을 수 있다는 생각에 그것을 마시지 않았다. 선원들은 그런 생각 없이 열심히 퍼마셨다. 이별의 순간이 되자 추장은 이번 방문에 대한 기쁨을 표했고, 이는 더 많은 노예를 보내주겠다는 의미였다. 배로 돌아 오늘 길에 스넬그레이브는 한 선원에게 이미 승선한 노예 중 가엾은 아이를 돌봐줄 수 있는 어미다운 여자에게 아이를 데려자 주라고 했다. 선원은 벌써 젖을 줄 수 있을 만한 여자를 봐두었다고 대답했다. 스넬그레이브가 배에 오르자마자 그들이 이야기했던 여자가 그들을 보고는 달려와 엄청난 기세로 백인의 팔에서 아이를 낚아채 안아들었다. 그 아이는 놀랍게도 그 여자의 친아이였다. 스넬그레이브 선장은 그 관계를 모른 채 이미 여자를 샀던 것이었다. 노예선의 선장이었던 스넬그레이브는 그 모습을 보고 엄마와 아들, 이보다 더 감동스러운 모습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배의 언어학자가 그 여자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야기해 주었고 스넬그레이브의 기록에 따르자면 제물로 바쳐질 뻔한 아이를 그가 구해 주었다고 말해 주었다. 이 이야기는 배에 탑승해 있던 367명들에게 널리 알려졌고 그들은 박수와 찬양 노래를 부르면 스넬그레이브에 대한 감사를 표했다. 스넬그레이브에 따르면 감사는 거기에 그치지 않았다. 이 일은 우리에게 큰 도움이 되었고 백인에 대한 좋은 개념을 갖도록 해 주었다. 그래서인지 우리 배에서는 전체 항해에서 반란도 없었다. 스넬그레이브의 자선 행위는 안티구아에 도착해서도 계속되었다. 노예 주인 스터들리 씨(Mr. Studley)는 스넬그레이브가 그들의 이야기를 전해 주자마자 아이와 아이의 어머니를 같이 사들이고 친절한 주인이 되어 주었다.

이렇게 윌리엄 스넬그레이브는 아프리카인은 잔인하고 야만적인 식인종이며 자신은 윤리적이고 문명화 된 구원자이고 좋은 성품의 가톨릭 신자로서 야만인들조차 이를 알아보고 환호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스스로 파괴됐던 가족의 구세주가 된다고 여겼다. 아프리카 피 지배자들에게 예고 된 잔혹한 결말에서 그나마 노예로 살아갈 수 있게 구원해준다는 의미였다. 그는 이미 수백 명의 노예를 끝없는 노역과 갑작스러운 사망이 기다리는 농장으로 보냈기 때문에 이 두 모자의 인간적 결말도 충분히 상상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가 주장했던 정당성과 앞서 운운했던 황금률은 아이러니 하게도 결국 반 노예제 운동의 핵심 주장이 된다.

4. 출판


이렇게 노예 운송을 하며 겪은 일을 기반으로 1734년 그는 기니 만에 관한 새로운 보고와 노예 무역이라는 책을 출판한다.

챕터 1에서는 서아프리카 베냉 다호메이 왕국에서 1726년에서 1730년 사이에 일어난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고.
챕터 2에서는 아래와 같이 노예 무역의 정당화가 주된 내용이고, 노예의 선상 폭동과 그를 기반으로 하는 노예 무역의 규칙을 적고 있다. 챕터 3에서는 1719년 자신이 겪었던 해적 포로 생활과 다른 항해에서 발생할 수 있는 위험에 관한 내용이다.

이렇듯 책은 노예 무역의 정당화가 주된 내용이고, 노예 무역에 양심에 가책을 느끼던 아프리카의 노예 상인들에게 헌정됐다.

스넬그레이브는 1743년에 사망했다. 그가 겪은 일련 사건에 대한 기록과 출판은 많은 현대 역사가들에게 박사 논문의 주요 출처가 되었다.

5. 기타

영화 컷스로트 아일랜드의 미스터 스넬그레이브(Mr. Snelgrave)의 이름은 이 인물을 차용한 것으로 여겨진다.
파일:Snelgrave.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