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정부시대의 전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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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링포드 공방전 영어: Siege of Wallingfor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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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 | 1152년 ~ 1153년 7월 | |
장소 | 잉글랜드 왕국 월링포드 | |
원인 | 마틸다의 핵심 기지인 월링포드를 공략하려는 스티븐 왕의 공세. | |
교전국 | 스티븐 왕 지지 세력 |
마틸다 지지 세력 앙주 백국 |
지휘관 | 스티븐 왕 |
브라이언 피츠카운트 헨리 플랜태저넷 |
결과 | 월링포드 평화 협약 체결. | |
영향 | 무정부시대의 종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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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무정부시대 시기인 1152년 ~ 1153년 7월, 스티븐 왕이 정적인 마틸다 세력의 요충지인 월링포드를 포위하면서 벌어진 공방전. 무정부시대가 종식될 계기를 마련한 전투이다.2. 상세
월링포드 성은 영국 옥스퍼드셔 월링포드에서 템스 강에 인접한 평원에 세워진 중세 성이다. 이 성의 주인이었던 브라이언 피츠카운트는 브르타뉴 공작 알란 4세의 사생아였고, 헨리 1세의 사생아인 글로스터의 로버트와 절친한 친구였다. 그는 1139년 로버트가 지지를 표한 마틸다에게 가담했고, 그 결과 그의 근거지인 월링포드 성은 마틸다 세력의 동쪽 끝 지점으로서 스티븐 왕의 침공을 저지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그 해 월링포드 성을 포위한 그는 성의 방비가 너무 견고한 데다 상당한 양의 보급품이 성에 쌓여 있어서 공략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공성용 성 2개를 인근에 세워서 월링포드를 봉쇄한 뒤 서쪽으로 이동했다. 1140년, 헤리퍼드 백작 글로스터의 마일즈가 월링포드 외부의 공성용 성 중 하나를 공략한 뒤 파괴했다.그 후 스티븐 왕과 마틸다 사이의 내전은 소모전으로 이어졌고, 월링포드 성은 양측이 템스 강 계곡을 확보하려는 노력을 벌일 때 중요한 역할을 했다. 1142년 옥스퍼드 공방전에서 스티븐 왕에게 포위되었던 마틸다가 월링포드로 피신하면서, 이 성의 중요성을 계속해서 커졌다. 브라이언은 생포한 자들을 가둬놓고 고문을 원을 뽑아내기 위해 성내에 "브라이언의 철창(Brien's Close)'으로 알려진 악명 높은 감옥을 세웠다. 1143년 윌튼 전투에서 생포된 스티븐 왕의 집사 윌리엄 마르텔은 이 감옥에 수감된 유명한 죄수 중 한 명이었다. 당대 연대기 기록에 따르면, 브라이언의 철창에 갇혀서 고문을 당한 죄수들의 비명이 매일 벌어져서 월링포드 마을 주민들을 공포에 떨게 만들었다고 한다.
1145~1146년, 스티븐 왕은 월링포드를 다시 공략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와서 월링포드 맞은편 동쪽인 크로마시 기포드에 공성용 성을 세웠고, 월링포드 서쪽인 브라이트웰, 사우스 모튼, 콜시에 잇따라 공성용 성을 세웠다. 그러나 이번에도 성을 공략하지 못하고 물러나야 했다. 1152년, 스티븐 왕은 더 많은 병력을 이끌고 돌아와서 크로마시 기포드에 세웠던 공성용 성을 재건하고, 월링포드 다리를 내려다보는 또 다른 성을 건설한 뒤, 병력을 재배치해 월링포드 성내에 보급품이 전달하지 못하게 했다. 브라이언은 어떻게든 봉쇄를 돌파하려 했지만 모조리 격퇴되었고, 이내 식량이 바닥나면서 굶주림에 시달렸다.
그러던 1153년 7월, 마틸다의 아들 헨리 플랜태저넷이 이끄는 앙주군이 구원군을 이끌고 월링포드로 진군해, 공성용 성 하나를 포위했다. 당시 옥스퍼드에 있던 스티븐 왕은 이 소식을 접하자 군대를 이끌고 가서 헨리를 쳐부수려고 진군했다. 그 후 양측은 템즈 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했다. 이제 전쟁이 곧 벌어지려 했을 때, 오랫동안 이어지는 내전이 지긋지긋해진 귀족들이 협상하자고 간청했고, 성직자들도 휴전을 중재하겠다고 제안했다. 스티븐 왕과 헨리 모두 자신들을 위해 싸우길 바라지 않는 귀족들의 태도에 화가 났지만, 그들의 호응 없이는 전쟁을 이어갈 수 없기에 어쩔 수 없이 협상하기로 했다. 양자는 일단 휴전을 맺고 공방전을 중단하기로 했다.
스티븐 왕의 아들 외스타슈는 휴전이 체결된 것에 분노해 전쟁을 지속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아버지를 떠나 케임브리지로 이동한 뒤 새로운 원정을 벌이기 위해 자금을 끌어모으려 했다. 그러던 1153년 8월 중순, 그는 버리 세인트 에드먼즈 인근의 교회 영지를 약탈하던 중 급사했다. 후계자로 정해뒀던 아들의 급사로 깊은 슬픔과 충격에 빠진 스티븐 왕은 평화 협상에 적극적으로 응하기로 마음먹었다. 스티븐 왕의 동생인 윈체스터 대주교 블루아의 앙리와 켄터베리 대주교 테오볼드의 중재하에, 스티븐 왕과 헨리 왕자는 월링포드에서 다시 만나 긴 협상을 벌인 끝에 11월에 평화 협약을 체결하고 윈체스터 대성당에서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협약 내용은 아래와 같다.
1. 스티븐 왕은 헨리 왕자를 후계자로 인정하며, 헨리는 스티븐 왕에게 경의를 표한다.
2. 스티븐 왕은 왕으로서 모든 권력을 유지하되 헨리의 조언을 따른다.
3. 스티븐 왕의 남은 아들 기욤은 헨리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왕위에 대한 주장을 포기하는 대가로 자기가 소융한 영지의 안보를 약속받는다.
4. 헨리의 주요 왕궁은 보증인들이 보관하고, 스티븐 왕은 헨리의 성에 접근할 수 있다.
5. 수많은 외국 용병들은 동원 해제되어 고향으로 돌려보낸다.
2. 스티븐 왕은 왕으로서 모든 권력을 유지하되 헨리의 조언을 따른다.
3. 스티븐 왕의 남은 아들 기욤은 헨리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왕위에 대한 주장을 포기하는 대가로 자기가 소융한 영지의 안보를 약속받는다.
4. 헨리의 주요 왕궁은 보증인들이 보관하고, 스티븐 왕은 헨리의 성에 접근할 수 있다.
5. 수많은 외국 용병들은 동원 해제되어 고향으로 돌려보낸다.
그 후 스티븐 왕은 권력을 재건하기 위해 노력하다가 1154년 여름 플란데런 백작 티에리를 접견하기 위해 도버로 갔다가 위장병으로 쓰러진 뒤 10월 25일 도버의 지역 수도원에서 사망한 뒤 왕비 불로뉴의 마틸다와 아들 외스타슈가 묻혀 있던 파버샴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그 후 잉글랜드 국왕으로 등극한 헨리 2세는 1155년 투쟁에 도움을 준 월링포드 시에 보상하고자 왕실 헌장을 수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