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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30 00:25:11

우파 철도 참사


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이 문서는 실제로 일어난 사건·사고의 자세한 내용과 설명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파일:우파 철도 참사.jpg

1. 개요2. 사고의 전개3. 사고 이후

1. 개요

Железнодорожная катастрофа под Уфой
Ufa Train Disaster

1989년 6월 4일[1] 소련 우랄산맥 부근에서 발생한 가스 폭발 사고.

2. 사고의 전개

사고 당일 새벽 1시 15분 우파역에서 50km 정도 떨어진 지점에서 두 여객열차(제211 열차, 제212 열차)가 바시키르(현 바시코르토스탄)의 이글린스키 구역을 지나면서 서로 마주쳤다. 두 열차는 노보시비르스크와 아들레르를 오가는 중이었고 승객 총 1,284명, 승무원 총 86명이 탑승했다. 승객의 대부분은 당시 휴일을 맞아 흑해로 휴양을 떠난 휴양객이었다. 그런데 그 지역 인근에 있던 천연가스관이 파열되어 엄청난 양의 가스가 새어나왔는데 하필 바람이 철도 방향으로 불어 일대에 가스가 고여 있었다. 공식 보도에 따르면 기관사는 당시 가스 냄새를 맡았다고 하지만 대처하기엔 너무 늦었다.[2] 열차가 지나가면서 열차 바퀴와 레일 사이서 불똥이 튀었고 불똥이 가스에 불을 붙이면서 대형 폭발이 일어났다.

폭발 당시 충격량은 무려 TNT 300톤 정도였다. 폭발로 열차 2대는 순식간에 불길에 휩싸였고 250만 제곱미터가 불타 버렸다. 폭발의 충격으로 차량 11대가 탈선했고 그 중 7대는 전소됐다. 충격파는 13km 떨어진 아샤에 있었던 건물 유리창을 깨부술 정도로 강력했다. 100km 밖에서도 불기둥을 목격했을 정도로 폭발이 매우 컸고 전방 2km의 나무들은 충격을 못 이기고 전부 부러졌다. 26대의 차량도 불길에 휩싸였다. 폭발로 인해 인근에는 큰 산불이 일어났고 불길이 너무 거셌다. 생존자들은 산불을 피해 사고 현장에서 멀리 도망쳤다. 부상자를 구하러 온 의료진과 수습하러 온 소련군들은 조각난 채 다 타 버린 시신들을 수습하고 멀리 도망친 부상자를 찾으러 다녀야 했다. 부상자를 옮기기 위해 구급차 100대에 헬기와 비행기까지 동원됐는데 헬기 수가 모자라서 훈련용 헬기까지 써야 했다. 부상자들은 우파와 모스크바, 그리고 첼랴빈스크의 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았고 부상자가 너무 많아 부상자를 돕기 위한 헌혈 운동이 진행되기도 했다.

사고 소식을 접한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리슈코프 수상, 차조프 보건상, 야조프 국방상과 함께 사고 지역으로 달려가 "지옥이 따로 없다.(Real hell there.)"며 경악을 금치 못했고 희생자들에게 애도를 표했다.

결국 이 사고로 575명이 사망했고 800명이 부상을 입었다. 사망자 중 181명은 어린이였다. 기록에 따라서 사망자 수가 675명, 780명으로 오르기도 한다. 사망자 중 300명은 병원으로 이송된 뒤 치료를 받다가 숨졌다. 역대 철도 화재 참사 중 가장 많은 사망자를 냈으며 이 사고는 1944년 1월 24일 있었던 참사 #에 이어 소련 역사상 두번째로 가장 많은 목숨을 앗아간 철도 참사로 기록됐지만 이 사고가 일어난 날이 천안문 6.4 항쟁이 일어난 날과 겹친지라 다른 나라에는 많이 알려지지 못했다.

사고 원인은 주민들이 이상한 냄새가 난다고 신고했는데 신고를 받은 당국이 주민들에게 혼란을 줄 수 있다는 이유로 가스 공급을 중단하지 않고 새고 있는 만큼 공급했기 때문이다. 즉, 이 사고는 막을 수 있었다. 당국의 안일한 대처가 부른 사고였다. 게다가 일설에 따르면 폭발 규모가 10킬로톤이라고 한다.[3]

3. 사고 이후

고르바초프는 사고 다음날인 5일을 국가 애도의 날로 지정했다. 나라 곳곳에 조기가 걸리고 예능 프로그램 방영이 취소됐다.

사고와 관련된 가스 회사 인물들은 5년형을 선고받았다.

추모 행사는 사고 장소가 허허벌판이었다 보니 인근 Ulu-Telyak역에서 행해졌다. # 인근에는 추모비도 세워졌다. #

이 사고로부터 2년 후 소련은 해체되었다. 일각에서는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폭발 사고와 더불어 소련이 해체된 원인 중 하나로 꼽힌다. 왜냐하면 체르노빌 사고가 일어난 지 고작 3년만에 이 사고가 일어난 데다 가장 많은 목숨을 앗아간 대참사였기 때문이다.

[1] 공교롭게도 이 날은 중국에서 천안문 6.4 항쟁이 있었던 날이다. [2] 멈추는 데 오래 걸리는 열차 특성상 냄새를 맡자마자 브레이크를 밟았다고 하더라도 천연가스가 고인 지역에 들어갔을 것이다. 거기다 브레이크를 밟으면서 튀는 불똥 때문에 멈추더라도 폭발은 피할 수 없었다. [3] 히로시마 원폭이 15킬로톤이므로 얼마나 폭발 규모가 큰 지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