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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적 | 89.37㎢ | ||
인구 | 2,134명[1] | ||
인구밀도 | 23.88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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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경상남도 합천군의 면, 대병면, 가회면, 봉산면, 합천읍과 맞닿아 있다.2. 지명유래
2.1. 용지리
용지리는 황강변의 중간에 위치한 곳으로 서쪽으로 황매산 줄기가 뻗친 의룡산과 멀리 덕유산쪽에서 흘러운 물줄기가 황강이 되어 동쪽으로 흘러가고 있다. 서기 1400년경부터 용마리는 지금의 용주교 밑 황강바닥에서 동쪽을 바라보며 형성되어 있었으며 이천서씨들의 마을로 200년전까지 집성촌을 이루었다고 한다. 또한 마을 뒤편 황강천에 큰 평야지대에 쌀을 생산하고 있어 무척이나 살기 좋은 마을이다.
- 용지1구는 1915년 이전에는 용마리로 불리워졌으며 그 이후로는 용지리로 그리고 1960년 행정구역이 개편되면서 용지1구 (용마리, 우무실), 용지2구 (모단, 둔덕)로 새롭게 불리워졌다. 용마리는 용지리 동쪽 끝부분의 지리상의 형태가 용머리를 닮았다하여 용머리에서 용마리로 변천하였다. 용지1구는 동쪽으로부터 용머리인 사투산 안쪽이 서재골, 위쪽이 뒷골, 남쪽이 우무실로 형성되어 있다.
- 용마리: 마을 뒷산이 마치 용미 마루에 누워있는 것처럼 보여서 부르기 시작
- 우무실: 산이 오목하게 둘러싸고 있고 가운데 우물이 있는 넓은 곳이라 하여 부르기 시작
- 서젯골: 옛날에 서제가 있어 서젯골이라 명명
- 사두산: 산이 마치 뱀의 머리처럼 생겼다하여 명명
- 아홉골산: 마을 뒷산이 마치 용의 등처럼 생기고 골짝이 9개가 있어 명명
- 뒷골: 모단마을의 뒷산 너머에 넓은 골짝이 있어 뒷골이라 명명
- 바람골: 좁은 문짝에서 바람이 세차게 불어 명명
용지2구는 동쪽으로 모단, 서쪽으로는 2㎞떨어진 의룡산 아래에 위치한 둔덕마을로 형성되어 있다. 모단은 황강변으로 강가의 언덕이라서 물가언덕 모(모)자와 오목한 것이 소쿠리 모양이라서 둥글 단(團)자로 모團이라 불리워졌다. 둔덕은 의룡산 아래에 위치해 있는데 1500년경에는 의룡산 일대가 성터라 의병이 진을 치고 있었다. 이렇듯 의병을 모으고 나라에 덕을 쌓았다 하여 모일둔자와 큰덕자를 합쳐 마을이름을 둔덕이라 하였다
- 청주한씨 재실 (망송재)
- 남평문씨 재실
- 효열문: 김시준의 처 강양이씨가 시부모에게 효도하고 남편을 잘 받들므로 유림에서 조정에 건의하여 세운 것으로 87년 태풍으로 소실된 것을 88년 면사무소 앞에 설치하였다
- 도장골: 도장나무(회양목)가 많이 서생한다 하여 도장골이라 명명
- 둔답: 이곳에서 농사지은 것을 군량미로 사용했다 하여 둔답이라 명명
- 서당골: 문괴암선생이 서당을 지어놓고 글을 가르친 곳, 이룡산 3부 능선의 골짜기이며 둔덕동에서 북쪽으로 2번째 골짜기
- 부엉골: 옛 절터였으며 부엉이가 많이 있었고 지금도 탑의 아래부분이 남아있다.
- 작골: 작은 골이며 청주한씨 망송재가 있다.
- 큰골: 큰 골짜기로 옛 공동묘지가 있다.
- 사루봉: 상봉우리의 바위가 시루떡처럼 층이 있다 하여 명명
- 굴뜸: 정두뱅이 남쪽에 있는 바위더미
- 선바우: 선박골에 있는 바위
- 섶밭너매: 둔덕동에서 평산리로 가는 고개
- 돌고개: 못안 남쪽에서 평산리로 가는 고개
- 용의덤: 도장골 동쪽에 있는 산, 봉우리가 용처럼 생겼음
- 정두뱅이: 둔덕동 뒤쪽에 있는 골짜기
2.2. 평산리
평산리의 지명은 평평한 평야를 의미하는 들과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산이 조화를 이룬다고 하여 옛 지명으로 들뫼라고 하였다가 고종 30년경 평산이라고 칭하였다.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풍속은 검소하고 진솔함을 숭상하고 소박하여 인심이 후하고 예부터 시를 읊으며 학문을 탐구하는 선비가 많았으며 마을 입구에는 효자비가 세워져 있다. 지리적으로는 장전리와 평산리 사이에 위치하며 평산, 해곡이 한마을로 형성되어 있다.
- 평산마을은 용산과 국시봉이 둘러싸여 있으며 지금으로부터 400여년전 임난 때 문효굥 연의 후손 서호 자성이 주군에서 내려와 마을을 형성 하였다고 한다. 현재 평산마을은 음지담, 양지담 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마을 중앙을 가로지르는 하천이 흐르고 있는데 그 하천을 중심으로 음지쪽을 음지담, 양지쪽을 양지담이라 불렀다.
- 용연재: 진주 하재곤의 장수지소
- 용산재: 갑오동학난 때 전투를 벌인 것으로 보이는 성이 평산리 산76 장동산에 있고 그 주위에 당시 전투에서 목숨을 잃은 병사들의 무덤이 산재해 있다
- 국시봉산: 마을 동쪽에 높은 산이 우뚝솟아 있는데 옛날에는 국수봉 이라 명명되어 졌었다.
- 용출골: 용산에서 용이 하늘로 승천하였다 하여 용출골이라 한다
- 진골: 골짜기가 하도 길어 진골이라 명명
- 구무골: 바잘리굴, 동굴 등 굴이 여러개가 있어 명명
- 서재골: 골짜기에 서재가 있었는데 빈대가 너무 많아 재실을 철거했다 함
- 안창골: 남쪽에 있는 들
- 몽동골: 서재골 북쪽에 있는 골짜기
해곡은 1960년에 노름밭과 박실이라는 자연마을을 합하여 해곡이라 명명하였으며 바다처럼 많은 박실늪의 물을 가리켜 산속의 바다라하여 해곡이라 부르게 되었다. 해곡마을은 뒷산을 배경으로 하여 앞으로 넓은 들이 형성되어 있고 황계천이 흘러와 12만평의 박실지를 거쳐 흐르고 있으며 서남쪽에 노름밭이라는 지명의 마을이 형성되어 있고 남쪽에는 박실이 계곡을 끼고 형성되어 있다. 해곡마을은 남쪽으로는 노리, 서쪽으로는 용지리, 북쪽으로는 손목이 위치하고 있다.
- 용호정: 절재 광산 김질의 부인 박씨와 자 영모재 양의 묘각이다.
- 백조도래지: 마을 입구에 “백조도래지”라는 표지판이 있는데 일제 시대에 경찰서장이 관내를 순방하다 해곡리 박실지에 백조가 많이 있는 것을 특이하게 생각하여 최사훈이라는 사람에게 백조 한 마리를 잡아오게 해 나라에 바쳐 표지판이 세워지게 되었다고 한다.
- 숲골: 박실의 아래쪽에 숲이 무성하다 하여 숲골이라 명명
- 옛터: 박실지의 가장자리에는 많은 경지와 사람들이 살고 있었으나 대홍수가 있어 마을과 경지가 한꺼번에 매몰되어 없어지고 지금의 박실과 노름밭으로 이주하여 마을을 형성하였다. 옛날에 거주하던 곳이라 하여 옛터라고 명명
- 새미골: 박실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노리와 팔산의 경계를 이루는 지점이다. 골이 깊어서인지 한 여름에도 시원한 약수가 솟아 나는 곳이 여러곳 있는데 샘이 여러곳 솟아 나므로 새미골(샘골) 이라 명명
- 박곡지: 박실에 있는 큰 못
- 박실재: 박실 동남쪽에서 팔산리로 가는 고갯길
2.3. 노리
지금의 노리마을은 예전에 사슴록 자와 마을동 자를 합하여 녹동이라 불렀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녹리라고 부르기엔 어색하여 중국의 노나라가 국태민안하고 살기가 좋아 노나라 노자를 머리글자로 명칭을 정했다 함. 노리 마을은 위쪽으로 국수봉을 북으로 두고 마을 앞은 평품들을 안으로 한 공골산이 있으며 서쪽으로는 황계천이 흐르고 있다.
* 녹명재: 노리 뒷골에 있는 파평윤씨 재실로 충위 윤수의 제각이다.
* 고현재: 노리 위담에 있는 남평문씨 재실이며 고려 판도판서 문근의 묘각이 있다.
* 영모재: 중담에 있는 파평윤씨 재실
* 공골산: 마을에서 바라보면 산 형태가 공(公)자와 같이 생겼다 하여 명명
* 염재(고현, 고티): 노리 동남쪽에 있는 고개, 대양면 도리로 넘어가는 재
* 녹두바우: 공골산 안에 녹두모양의 바위
* 논잇골: 색동골 북쪽에 있는 골짜기
* 다리목: 땅골 동쪽에 있는 산
* 들맷골: 장때먼당 동남쪽에 있는 산
* 딩기실: 진골 서남쪽에 있는 산
* 땅골: 노리 동남쪽에 있는 산
* 삼밭골: 딩기실 북쪽에 있는 산
* 서잿골: 장때먼당 동쪽에 있는 골짜기
* 싱잇골: 노리 동쪽에 있는 골짜기
* 엉골: 진골 남쪽에 있는 산
* 용남 굼텅이: 엉골 남쪽에 있는 골짜기
* 황새골: 진골 북쪽에 있는 골짜기
* 병풍덤: 노리 북쪽산에 있는 병풍같은 바위더미
2.4. 팔산리
팔산의 지명은 팔뫼라고 하였는데 마을 입구에서 보면 산의 형태가 여덟팔자와 뫼산자형으로 형성되어 있다하여 팔산이라 불렀다. 팔산마을은 예전에 옹기골이 있었는데 의령-거창간 옹기상인들의 육로교통의 중심지였다. 팔산마을은 북쪽으로 버리실, 서쪽으로 노리실, 동쪽은 이삿골로 이루어져 있다.
* 창선재: 윗담에 있는 의성김씨 재각
* 절골: 옛날 절이 있었던 골짜기
* 이사골재: 대양면 이계리로 연결되는 재
* 박실재: 용주면 해곡리와 성산, 손목으로 연결하는 재
* 도롱골: 팔산 서북쪽 골짜기
2.5. 장전리
장전리의 지명은 이전부터 장밭이라 불리워 왔는데 장(章)은 학문을, 전은 터를 뜻하는 것으로 선비의 글 읽는 소리가 끊이지 않는 마을 이란 뜻으로 장전이라고 명명하였다고 한다. 이 마을의 앞산과 장전산 사이는 넓지 않으나 토질이 비옥하고 수원이 풍부하여 농작물이 잘 자라는 곳이며 지리적으로 공암, 황계 마을 중심에 위치하고 있으며 현재 본동과 사기동, 금곡동, 창동으로 자연마을이 나뉘어 있고 5개반으로 구성되어 있다.
- 여산재: 의성김씨 서재로 우은 김동수 후학과 김씨문중 도학자들이 건립, 서당으로 사용하다 퇴락하자 1960년경 김씨문중에서 재건하여 현재에 이른다.
- 동막골: 마을의 동쪽 끝에 위치한 곳
- 골짝: 아래나무 골, 우메나무 골, 피리댐 골, 황새 골 등
- 바위: 탕건바위, 기림바위, 시림듬 바위, 용의 엄바위 등
- 들: 기림들, 탕건바우들, 섬안들
- 샘: 새터발 새미, 큰 새미, 서재 새미
- 보: 기림바우 보, 새 보, 댐보, 섬안 보, 안산 보, 아랫 보
- 고개: 독골재 (사우실-대양면 도리), 먹골재(사우실-쌍백면 백역리)
- 하마비: 마을 서쪽 탕건바위 위에 음각하여 만들어진 비가 있었다고 전해지나 현재는 찾을 수 없음
- 가마터: 동막골에 위치한 옹기 가마터. 1950년대 옹기가마를 설치하여 대구 등지까지 옹기를 출하 하였다. 현재는 터만 남아 있다.
- 공개동 만당: 안산 꼭대기에 위치해 있다. 임난시 왜군을 물리치기 위해 쌓았다는 돌무더기가 지금도 남아있다.
- 탕건바우: 장전리의 서쪽 500m 지점에 탕건바위가 있는데 바위 모양이 양반들만이 착용했던 탕건과 모양이 비슷하다. 이 바위에는 하마비(下馬碑)가 새겨 있으며, 이 마을앞을 지날때는 말을 타지 않는 것은 무론 정중한 태도를 취했다고 전해져 온다
- 기림바우: 탕건바위의 100m 서쪽에 높이 50m, 넓이 200m의 병풍과 같은 아름다운 바위가 절벽으로 이루어져 있어 그림바위라고 불리워졌다고 한다.
- 우메나무골과 바리더굴: 기림바위 위 100m 거리에 있는 산과 산 사이의 좁은 골짜기를 우메나무골이라 하고 마주보는 건너편의 산과 골짜기를 바리덩굴이라 하는데, 이 두 산 사이에 작은 개울이 흐른다. 우메산골 동굴에서 불을 놓으면 바리덩굴에서 연기가 나왔다고 하며 신선이 사는 영지란 풍수설이 전해오고 있다.
- 사림듬: 해발 700m의 산정에 위치한 넓적한 바위로 그 모양이 시루떡과 같다해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서당 학동들이 공부에 지치면 산책하면서 이 바위에서 서로의 의견을 나누고 때때로 스승의 강론을 들었다고 하는데 이 바위 위에서는 배고픔을 못 느꼈다고 한다.
- 비둘기 만당: 시림듬 옆 봉우리 명칭이며 해발 800m 높이다. 시림듬 학동들의 강론과 토론이 너무나 진지하여 비둘기들도 모여들어 함께 들었다는 전설이 전한다
2.6. 공암리
임진왜란 때 권옥강이라는 분이 공자 위패를 모시려고 자리를 물색하던 중 바위가 넓적하고 아래에 공간도 있으며 비가 와도 물이 들어오지 않아 이곳이 좋겠다고 여겨 공자 위패를 모셨다고 하여 공암이라 불렀다고 한다. 지금도 마을 입구에 권옥강씨의 공적을 기린다는 뜻에서 후손들이 비를 세워 후세에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 당산제: 정월 대보름 날 새벽에 지내오다 중단
- 효열문: 김녕김씨 문중 소유로 셀마 태풍 때 산사태로 소멸된 것을 용주면 소재지로 복원하였다.
- 영모재: 충의공 백촌 김문기의 재각
- 철마산: 쇠로 만든 말을 바위에 올려 놓았다 하여 철마산이라 불렀다.
- 시정자골: 산결기와 들이 만난 지점을 시정지라 부른다
- 절골: 옛날 큰 사찰이 있던 곳이라 절골로 부른다
- 병막골: 병 만드는 공장이 있었다 하여 병막골로 불린다
- 매봉: 산의 형상이 매가 앉아 있는 것 같다고 붙여진 이름
- 남은골: 한해 농사를 지어 동네 사람들이 먹고 남았다고 남은골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꿀덤: 토종벌이 바위속에 많이 자생하여 붙여진 이름
- 골짝: 전골, 성지골, 불따골, 깊은골, 개장지골, 새총골, 삼거리골 등
- 정자목: 잎이 한번에 피면 모내기 때 비가 알맞게 와서 모내기가 수월했고 잎이 여러번 나뉘어 피면 모내기가 힘들었다고 전해 오는 마을 가운데 있는 정자목
- 나뭇골: 새청골 북서쪽에 있는 골짜기
- 달분재: 음실 서북쪽에서 택계로 가는 고개
- 더운달 골: 음실 동남쪽에 있는 골짜기
- 돌 찜짓골: 밤나무골 남쪽에 있는 골짜기
- 마당재: 음실 남쪽에서 쌍백 삼리로 가는 고개 (장터고개)
- 상거리: 음실 동남쪽에 있는 등성이
- 서낭당: 음실 서남쪽에 있는 고개
- 약새미: 큰복골에 있는 약샘
- 양지: 새터
- 잣살고개: 양지 동남쪽에 있는 고개로 쌍백으로 가는 길이 있다
- 장구배미: 조산들에 있는 논
- 장등령: 진등재
- 조산껄: 보의 개울 남쪽에 있는 골짜기
- 짭짭골: 점골 북서쪽에 있는 골짜기
- 참새미: 나뭇골에 있는 찬샘
- 횟대등: 음실 남서쪽에 있는 등성이
2.7. 황계리
마을이 형성될 당시에 구황계곡이라 불리었으며 아침을 짓기 위해 쌀을 씻으면 쌀뜨물이 노리앞까지 퍼졌다 한다. 황계마을은 합천읍에서 서북방향 12㎞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지방도 1026호선이 마을앞을 관통하고 있다.
- 백촌부조묘: 충의공 백촌 김문기의 신주를 모신 곳으로 앞에는 충효문이 있고 곁에 경의당이 있다. 황계폭포: 황계천에 연기가 날때마다 용소에서 용이나와 황계 마을에 많은 피해를 주므로 마을의 김녕김씨가 1810년경 자연정이라는 정각을 지어 여기서 영제를 지냈다 하며 계곡 주변의 자연 경관이 수려하고 12.7㎞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폭포수가 절경을 이루고 있다.
- 열녀문: 정유재란 당시 샘실에서 광산 김씨 성을 가진 분이 베를 짜고 있는데 왜놈이 입을 맞추니 혀를 자르고 우물에 투신 자살하였으니 후손인 진주 정씨들이 그 뜻을 기리기 위해 샘실에 열녀문을 세웠다. 현재는 황계리 안골 입구에 열녀문을 다시 세워 제를 지내며 후손들에게 그 뜻을 기리 전하고 있다.
- 막수동 계곡과 막소의 전설: 황계폭포에서 물줄기를 따라 올라가게 되면 병풍처럼 둘러싸인 기암 절벽이 눈에 들어온다. 여기서 부터가 막수동 계곡입구로 2㎞쯤 들어가면 방울폭포라는 조그만 폭포가 하나있고 폭포 바로 위에는 제비덤이라는 유명한 절벽이 제비 주둥이처럼 내밀고 있다. 옆에서 흐르는 지류에 예전 폭포라는 폭포가 하나있고 바로 안에는 막소폭포라는 폭포와 수심이 아주 깊은 소가 있다. 옆 절벽에서 보면 조선조 중기 사화가 심할 무렵에 성명 미상의 유학자가 피신하여 살면서 새겨놓은 막수동이라는 글자가 몇백년 풍산에 시달리면서도 아직 또렷하게 남아있다. 막소폭포의 절벽 모퉁이에서 수심을 내려다 보면 까마득히 깊은 곳에 용이 살았다는 굴이 희미하게 보인다. 옛날 사람들의 말을 들으면 명주실 한 꾸러미를 다 풀어도 수심이 닿지 않는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곳은 지금도 날씨가 가물어 비가 오지 않을 때에 기우제를 지내는 곳이기도 하다. 지금으로부터 약 80여년전 가회면 월계리 산두마을 사람들이 이곳에서 기우제를 지내기 위해 물을 며칠 동안 퍼내고 많은 고기들을 잡았는데 갑자기 물속에서 용의 꼬리가 소 전체를 흔들면서 잡아 놓은 고기들을 전부 물속으로 끌여들이고 사람들이 벗어 놓은 옷가지들을 갈갈히 찢어 놓았다는데 그순간 청둥이 치면서 먹구름이 몰려오더니 굉장한 소나기를 내려 부었다는 설이 여러 주민들의 입으로 전해지고 있다.
- 탁풍재: 의성김씨 정록의 제각. 1977년도 건립
- 황산재: 연안차씨 강열공의 제각. 1944년도 건립
- 작은촌: 황계 입구의 산골짜기로서 철을 생산하고 철물을 가공해 왔다고 전해진다. 그 중 전쟁무기인 칼과 창도 이곳에서 대량 생산 되었다고 전해진다.
- 큰촌: 작은촌 옆 골짜기로 옹기를 대량생산하고 기와까지도 생산한 흔적이 있으며 지금도 땅을 파면 파편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대규모 옹기 및 기와를 생산한 것으로 추측된다.
- 가마바위: 재궁골에 있는 바위
- 가맷소: 구릿소 밑에 있는 소 가마솥 안처럼 둘러 패여 있음.
- 각싯소: 자연정 옆에 있는 소
- 구릿소: 폭포골 서쪽에 있는 소. 구렁이가 많았다고 함
- 너븐등이: 상황계 서쪽에 있는 넓은 등성이
- 두터기: 택계 동쪽에 있는 고개
- 둥글등: 하황계 서쪽에 있는 등성이
- 못골재: 상황계 서쪽에서 대병면 성리 못골로 가는 내. 박실령이라고도 함
- 상사덤: 택계 남쪽에 있는 더미
- 여시골: 상황계 서쪽에 있는 산. 여우들이 많이 살았다고 함
- 진모리: 여시골 서쪽에 있는 긴 모퉁이
- 초내: 하황계 남쪽에 있는 골짜기
- 톳곡: 산환동에서 대병면 성리로 넘어가는 고개
- 자연정: 황계 폭포골 입구에 있는 정자
2.8. 고품리
고품리는 마을 앞의 산에서 보면 마을내에 바위와 돌이 없는 낮은 평야지대이기 때문에 땅이 강해지라는 의미에서 뼈골자를 써서 골품리라고 불러왔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변형되어 고품리라고 불리게 되었다. 고품 마을은 원래 강쪽에 형성되어 있었으나 강물이 범람하고 수해의 위험이 많아 현재의 위치로 옮겨 왔다. 고품 마을은 지금도 곳곳에서 고대 유물이 출토되는 등 옛부터 이름난 고장인데 남쪽으로 황강을 끼고 있으며 평풍덤을 앞에 두고 있고 서쪽으로는 호롱산이 있으며 북쪽으로는 우산이 위치하고 있다.
- 풍호정: 1950년 건립
- 죽광재: 별야 남평 문위도의 강학 장수한 곳
- 덕인재: 1678년 건립
- 호랑정: 1735년 건립. 한 집안에 효자가 여섯이나 되어 마을지명이 효리로도 불리워짐'
- 골짝: 대밭골, 못안골, 달비골
- 들: 새들, 웃들, 너운정들, 광평들
- 청용등: 풍수학적으로 볼 때 지형이 청용의 형상이어서 부르게 되었음
- 돌박실깽문: 소를 이용하여 연자방아를 찧었다해서 유래
- 글촌골: 옛날의 고려장터를 일컬음
- 다빗골재: 망골에서 서지마로 가는 고개
- 용의덤: 망골 서남쪽에 있는 더미. 용처럼 구불구불하게 생겼음.
- 장구덤: 망골 남쪽에 있는 더미. 장구처럼 가운데가 잘록함
고품2구는 100년전 윤씨성을 가진 사람과 석씨성을 가진 사람이 신기터를 이루어 살며서 처음 형성되었다. 그후 시간이 지나면서 11개의 성씨를 가진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오늘날의 마을을 형성하게 되었다.
- 영도사: 절골에 있는 절
- 영덕재: 고려판사 재사사 강양군 이약의 묘각
- 부엉덤: 부엉덤 산에 있는 바위. 부엉새 집이 있음.
- 샛깨-팽전: 부흥동 북쪽에 있는 비덩.
- 텃골: 사리실 북쪽에 있는 골짜기
- 텃골재: 부흥동에서 월평리 연촌으로 가는 재
- 사리실: 부흥동 동쪽에 있는 골짜기
- 너운지: 용덕골 앞에 있는 들
- 강신들: 용덕골 동남쪽에 있는 들
고품3구는 고품리 하위 마을이다.
- 삼락재: 1870년 건립한 의성 김응일의 제각
- 영사재: 1974년 건립한 의성 김극형의 제각
- 백원당: 1700년 건립하여 봉산면 노파리에 소재하다가 댐건설로 수몰될 지경에 이르러 1981년 고품으로 이전
- 매학정
- 달비골: 땅골 서북쪽에 있는 골
- 당곡동: 땅골
- 동자듬: 서지마 남쪽에 있는 산, 아기동자가 서 있는 모양을 한 바위더미
- 불미골: 달미골 북쪽에 있는 골짜기
- 송골: 중촌 남쪽에 있는 산. 지형이 좁다하여 붙여진 이름
- 불미골재: 땅골에서 서지마로 가는 고개
대박리는 2019년 황강전원마을이 조성된 이후 고품1구에 포함 되어있었으나 별도 마을로서의 기능이 요구되어 행정구역 개편을 추진.
2021. 8. 6. 공포됨.2.9. 봉기리
봉기리는 새 봉(鳳)자와 터 기(基)자를 따서 봉기라고 명명하였으며 합천읍으로부터 약8㎞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북으로는 우곡마을, 서로는 가호리를 경계로 하고 있으며 합천댐(보조댐)이 자리잡고 있는 전형적인 농촌마을로 관광지인 합천댐, 용문정을 잇는 군도12호선이 마을옆을 휘감고 있다.
- 덕원정: 봉호 강문협의 장수지소. 야성 “송준필”이 기문을 지었다.
- 우천정: 지용 광산 김상덕의 장수지소
- 수안골: 가뭄이 심했을 때도 이곳은 물이 있어 작물경작에 어려움이 없어 붙여진 이름
- 죽방골: 흉년이 들어 먹고 살기 힘들때에 흰죽 한그릇과 논 한배미를 맞바꾸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
- 보리봉: 보리밭에 보리가 자라고 있는 형상이라 붙여진 이름
- 등잔설: 먹뱅이 있는 거성 최씨의 무덤
- 맹성이 부묵골: 봉기 남쪽에 있는 들
- 먹뱅이: 새탑 북쪽에 있는 골짜기. 대낮에도 어둡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
- 입석: 선돌, 먹뱅이 북쪽에 있는 돌, 높이 3m
- 약새미: 선돌꺼리 북쪽에 있는 약샘
2.10. 가호리
가호마을은 용주면 소재지에서 서북간 4㎞ 정도에 위치한 마을로 진주류씨가 99% 집단 거주하고 있는 특이한 고을이다. 아름다울 가(佳)자와 호수 호(湖)자로서 아름다운 호수가 있는 마을이라는 뜻인데 옛날부터 산간벽지에 호수라고는 없는 마을에 어떻게 이런 지명이 붙여졌는지 알수 없지만 진주류씨의 선조들은 이 지명을 자랑스럽게 사용해 왔다. 그런데 일제가 이땅을 침략하여 일본인 산실이라는 자가 제 마음대로 안 내(內)자와 가사 가(袈)자로아무 뜻과 의미도 없는 내가리로 표기하여 그때부터 용주면 내가리로 호칭되어 오면서 내가리 1,2구로 분동되어 2개의 마을이 형성되었다. 1990년부터 1993년에 걸쳐 동민들의 숙원인 내가리에서 가호리로 환원을 건의한 결과 1995년 12월 7일부로 합천군 의회 조례제정에 의하여 명칭변경 통과로 지금 현재 가호리로 사용되어 오고 있다. 1984년 국가적 대사업인 합천댐이 완공되어 그야말로 상전벽해의 기적이 일어나 이 고을앞에 조정지댐이 생겨났다.
- 용문정: 가호리 용문산에 있으며 군수 유수정의 행완서돈한 곳이다.초계 정황규가 찬기문하고 후손 종원이 찬량송하였다.
- 율수정: 참봉 진주 유사춘의 장수지소이다. 월성 최영조가 기문을 짓고 종후손 원가 중수가 기문을 지었다.
- 용호정: 월평에 있고 용호처사 진주 유대진의 추모지소이다. 후손 원중이 찬기문하고 원수가 찬량송하였다.
- 도연정: 참봉 진주 유여철의 장수지소이다. 후손 팔원이 찬량송하였다.
- 서호정: 매학헌 진주 유여길의 장수지소. 후손 상대가 찬량송하였다.
- 회로정: 오류헌 진주 유동벽의 강학지소. 유상대가 찬량송하였다.
- 동산재: 군수진주 유수정의 모각이다. 교리 전봉희가 찬기문하고 후손 종원이 찬량송하였다.
- 가산재: 죽포 진주 유정룡의 강학지소, 진산 유원중이 찬량송하였다.
- 용문탄: 용문탄은 고을 서쪽 가호리에 있으며 유씨의 용문정이 있고 정자 북쪽 왕동골에 동산제가 있다.
- 제시석: 제시석은 용문탄 위에 있고 문경암의 제시가 있다
- 용바위: 용바위는 용주면 가호리 용문정 앞, 황강천 가운데 있으며 용의 형태와 같다고 해서 용바위로 불리고 가뭄이 계속되면 온 주민들이 이곳에서 기우제를 지내며 비를 내리게 해 달라고 기원하기도 했다.
- 봉서: 가호리 소룡산 하단에 있는 고을인데, 이 고을의 봉이 알을 품은 형태와 같다해서 봉서로 불리고 있다.
- 회동: 회동은 도롱골이라고 불러왔다. 옛날 물레가 돌아가는 곳이라 해서 도롱골이라고 불러왔고 현재는 합천댐 발전소의 터빈이 돌아가고 있는 장소이다.
- 가리사터: 신촌 뒤쪽에 있는 옛 절터
- 갈곡재: 신촌에서 봉기리로 가는 고개
- 구시덤: 서쪽 뒷산 구유처럼 생긴 바위
- 당산재: 대병면으로 가는 고개
- 도둑놈굴: 용문정 옆에 있는 굴, 도둑이 소를 잡아갔다 하여 붙여진 이름
- 먹방재: 신촌에서 우곡으로 가는 재
- 불당골: 동쪽에 있는 골짜기. 불당이 있었음.
- 사모바위: 신촌 남쪽에 있는 바위
- 진살미: 신촌 남쪽에 있는 산
- 칼덤: 서촌 앞에 있는 바위더미
- 흰죽배미: 황새배미 위쪽에 있는 논
- 대냇재: 월평 서쪽에서 죽죽으로 가는 고개
- 서운재: 월평 서북에서 봉산으로 넘어가는 재
- 소룡산재: 서촌에서 소룡산을 넘어 봉산저포로 가는 재
2.11. 죽죽리
죽죽리는 신라시대 대야성을 지키다 순절한 죽죽 장군이 탄생한 곳으로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일제때 봉산면으로 편입되었다가 1987년 1월 1일자로 합천군 용주면 죽죽리로 새롭게 편입되었다. 죽죽리는 평지마을, 서운마을, 양지마을, 화남마을 등 4개의 마을로 구성되어 있었으나 합천댐으로 인하여 평지마을과 서운마을은 수몰지구가 되었으며 현재는 양지마을과 화남마을만이 존재하고 있다. 죽죽리는 뒤로는 문가말랑봉, 동쪽으로는 호롱산, 북쪽으로는 서원봉, 서쪽으로는 무덤봉으로 둘러싸인 곳으로 남쪽 신방봉 아래로는 황강이 유유히 흘러 낙동강으로 유입되며 마을 뒷산 너머에는 악경산이 우뚝 서 있다.
- 용암서원: 남명선생이 건립하여 후학을 양성하던 곳
- 죽양정: 능성구씨 구치평의 재각 (1949년 건립)
- 화강재: 구성희의 재각 (1955년 건립)
- 경선재: 구성림의 재각 (1994년 건립)
- 죽산재: 남평 문덕성의 재각 (1956년 건립)
- 삼발재: 삼면이 경계지에 있기 때문에 삼발재라 불린다.
- 절터: 옛날에 절이 있었다하여 절골이라고도 불리운다.
- 무덤재: 죽죽장군의 무덤 때문에 무덤재라 불리워짐
- 왕바위: 바위가 무척 크기 때문에 왕바위라 불리워짐
2.12. 우곡리
우곡리는 소룡산과 논덕산 줄기에 위치한 마을로 안담, 새담, 계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앞산 골짜기가 가마골로 불리며 소 죽통모양으로 생겨 소가 가마솥에 있는 죽을 먹고 있는 형국이라 소 우(牛)자와 골 곡(谷)자를 따서 우곡리라 불리게 되었다. 도로가 발달되기 전까지는 봉산면 일대 저포, 계산 사람들이 합천시장에서 생필품을 운반하는 곳으로 역할을 하였다. 우곡리는 논덕산 뒤편으로 합천호가 펼쳐져 있고 우편으로는 소룡산 너머 합천읍 인곡리가 자리잡고 있다.
- 군위방씨 성지: 군위방씨 “방감사”의 치적을 기리기 위해 모신 곳
- 논덕재: 은열공 진주 강민첨을 위한 추모지소
- 효자비: 군위방씨인 방덕조의 증조부의 효심을 기린 비
- 모우재: 무사당 군위 방유녕이 살던 곳
- 용바위: 용과 같이 생겼다 하여 용바위라 불림(뱀이 하늘로 승천하기 위해 바위에서 준비 중 왕바위가 승천을 못하도록 방해를 하자 겁을 먹고 설사를 한 흔적이 우곡에서 고품까지 있다고 전함(차돌바위))
- 왕바위: 우곡에서 제일 큰 바위
- 채석장: 우곡리 계성 뒷산에 화강암 채석장으로 일본 등 외국에 수출 하였으나 현재는 폐광되었다.
- 허부리기 고개: 이곳에만 오면 허기가 든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 비듬재(비재): 하늘로 날아갈 듯이 생겨 붙여진 이름
- 조산껄: 수온장 역할을 하며 액운을 막는다고 하는 작은 돌로 모아진 무덤형태
- 덕대골: 사람이 죽으면 덕대(나무로 만든 사발) 위에 시체를 안치, 살이 빠지면 뼈만 묻는 골
- 부처골: 바위 밑에 부처를 모시고 있었으나 부처옆에 가면 각종 질병을 앓는다고 접근을 금함
- 절터: 약 600년전에 절이 있었으나 빈대 때문에 망하고 현재는 기초석으로 사용했던 돌만 남아 있다.
- 내민바우: 계성 동쪽에 있는 바위
- 당재: 우실 북쪽에서 봉산면과 합천읍으로 가는 고개, 서낭당이 있었음
- 아리랑재: 우실 동북쪽에 있는 고개
- 큰음달: 당대 동남쪽에서 방곡리로 가는 고개
2.13. 방곡리
방곡1구는 상봉을 뒷산으로 하여 방곡천이 마을앞을 흐르고 있으며 상촌, 하촌 2개마을로 형성되어 있으며 마을이 남서쪽을 향하고 있다.
- 관음사지: 관음동 위 북쪽 약1.0㎞ 지점 세룡골, 구멍골에 관음사라는 사찰이 있었으며 언제 창건이 되어 사라졌는지 유래는 알 수 없으며 현재 축대 및 기와 파편 등이 있어 절터가 있었다는 흔적을 짐작할 수 있는 상태이다.
- 세경사: 언양김씨 부사 증참의 김경장의 추모지소로서 1960년대 건립
- 용호정: 관음동에 소재하며 매헌 언양김씨 김광연의 추모지소로서 광산 김두현이 찬양송하고 후손 동석이 찬기문하였다.
- 간운정: 관음동에 소재하며 어모장군 파평 윤시형의 추모지소로서 교하 노재수가 찬기문하였다
- 구명골: 마을 위 약 1.0㎞지점에 있는 골짜기로서 과거 천지 개벽때 물난리가 나서 온천지가 홍수가 졌을 때구명골이라는 곳에 사람이 정착하여 생명을 구하였다 하여 구명골이라 한다.
- 배늠: 천지개벽당시 홍수가 졌을 때 배가 이곳에 와서 닿은 곳이라 하여 배늠골이라 한다.
- 진등재: 방곡1구에서 합천 인곡으로 가는 재로서 과거 도로가 없을 때 거창, 봉산, 묘산으로 시장을 보기 위해 다니던 재
- 탕건바우: 관음동 남쪽에 있는 탕건처럼 생긴바위
- 참 샘: 참시막골에 있는 얼음처럼 찬 샘
방곡2구는 큰 마을, 중촌(신방), 새터(신기) 3개 마을로 형성되어 있으며 큰마을은 충주지씨가 고려가 멸망하고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할 시에 역적으로 몰리어 피신차 내려와 정착을 하였다 하며 중촌은 밀양손씨가 약350여년 전에 정착하여 마을을 형성하였고 신기는 약300여년전 파평윤씨가 정착하여 마을을 형성하였다. 방곡2구는 무봉산(물봉산)을 뒷산으로 하여 3개마을로 형성되어 있으며 방곡천이 마을앞을 흐르고 있다. 그리고 우곡으로 가는 말곡지역 (매봉산 밑) 중촌마을에서 약2㎞지점에 양지마, 음지마 2개마을이 있었다.
- 기와막터: 신방에서 우곡쪽 방향 약 500m 지점에 1960년 초반까지 기와를 굽던 기와막터가 현재 고무실 지역에 있었으나 현재는 흔적을 찾을 수 없다.
- 양조장터: 큰 마을앞에 1950년경까지 양조장이 있었다.
- 방산재: 어회장군 지한동의 추모지소
- 주막거리: 중초남을 삼거리에서 우곡쪽으로 약50m거리의 지점을 주막 거리라고 하는데 1940년대까지만 해도 주막이 3채가 있었다.
- 질매재: 월평2구와 방곡2구의 경계지점으로서 일제시대 때 공동묘지 터였으며 골짜기가 소질매(짐틀)와 비슷하다 하여 질매재라고 한다.
- 무봉산(물봉산): 마을 뒷산에서 과거 천지개벽시 온 천지가 물에 무봉산이 전부 물에 잠기고 꼭대기만 마치 우산처럼 되었다 하여 무봉(물봉)산이라 하였다고 한다.
- 말골: 중촌마을에서 우곡쪽으로 약2㎞지점에 말골이라는 골짜기가 있어 말골 또는 두곡이라 하는데 이는 골짜기가 말과 같이 생겼다 하여 말골이라 한다.
- 도장골: 말골 옆에 있는 골짜기로서 골짜기가 도장(곡식을 저장하는 뒤주)과 같이 생겼다고 하여 도장골이라고 한다.
2.14. 월평리
평리의 지명은 월암산의 월자와 들평의 평자를 따서 월평리라 불리어졌다. 월평1구는 연촌으로도 불리워지게 되었는데 경기도 양주에 유적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연산군의 폭정으로 말미암아 벼슬을 뿌리치고 함양 안의로 피신하였다가 다시 거창군 월곡으로 이주를 하였다. 그 뒤 그분의 자제인 유해인이 340여년 전에 구리동(월평2구)으로 입향하게 되었으며 유해인의 자제인 유여림이 연촌이라는 마을에 새로 입향하여 살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 남호정: 송암문화 유여림의 장수지소
- 여우바위: 여우굴이 있었는데 그 위의 바위를 말함.
- 가마바위: 가마같이 생겼다해서 가마바위라 불리워 짐
월평2구 마을은 앞으로는 월암산이 버티고 있으며 그 아래로는 황강이 남, 동으로 흐르고 뒤로는 큰골, 깊은산이 있다. 동으로는 메봉재 등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곳으로 마을 중앙에 우뚝선 당산과 큰골, 절골, 생양골, 엔당, 상정 등의 골짜기로 이루어져 있다. 고려시대부터 마을이 형성되었다.
- 망월재: 신라 충신 강양군 이개의 묘각
- 마을솔밭: 150여년전 마을에서 황강이 내려다 보이기 때문에 황강이 보이지 않도록 소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 닭벼슬 바위: 닭 벼슬같이 생겼다 하여 닭벼슬 바위라 불리운다
2.15. 성산리
성산이란 마을은 삼국시대 신라, 백제 두나라가 황강을 경계로 하여 싸울 때 갈마장군이란 백제의 장수가 현 마을의 동쪽 400m지점에 갈마산성이란 성을 쌓아 나라를 지켰는데 그후 산성이 있다하여 산성의 성(城)자와 산 밑에 동네가 있다하여 뫼 산(山)자를 따서 성산이라고 마을명칭을 명명하였다. 원래 마을은 현 위치에 있었던 것이 아니고 현마을의 북쪽 2㎞의 황강변 독산이라고 하는 곳에 있었으나 1592년 임란시 수파로 인해 이곳으로 옮겨 왔으며 현 마을앞 느티나무는 약500여년 전에 독산동에 사는 초군들이 심었다는 설이 있다. 성산마을은 갈마산성이라는 삼국시대의 옛성터가 동쪽에 있으며 큰골, 작은골, 성산골이라는 골짜기가 있다.
- 연계정: 고령박씨의 재실
- 담부랑고개: 소나기가 담부랑고개에 오면 폭우가 온다는 설이 있다.
- 못안골: 큰 벼루골, 작은 벼루골, 노루목골, 야씨골, 숫돌이마골, 광산골, 임시골, 대추나무골 등 많은 골짜기가 있다.
- 불뫼골: 등잔골, 쳉리(키)골이 있다
성산2구는 일명 버러실 이라고 하는데 450여년 전부터 밀양박씨가 집단으로 거주하였으나 1700년경 대질병으로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으며 버러실은 합천 및 인근에서 생활이 어려운 사람이 들어와 살기만 하면 살림이 벌어 진다고 하여 많은 사람이 이사해와 한때는 안버러실 안쪽까지 살았다고 한다. 조선 말엽부터 인근 팔산이란 마을에서 옹기도공이 넘어와 일제 시대에는 황도홍이란 창원 황씨의 도공이 일본왕에게 상을 받았으며 옹기의 전성시에는 200여명의 일꾼들이 일을하여 남한 일대에는 제일 큰 옹기 도요지 마을이었다. 그러나 60년 말부터 세월의 변천에 밀려 지금은 그 자취가 없다. 성산2구는 합천 깃점으로 서쪽으로 지방도 1026호선 주변 용주면의 관문마을이다. 갈마봉을 뒤로하고 앞으로 남쪽에는 시루봉이 있으며, 옆으로는 함안, 거창에서 시작하여 흘러온 물줄기로 대 황강천을 이루고 있다.
- 고려장터: 고구려, 고려 때의 장사 양식으로 노쇠한 산사람을 깊이 약10m, 넓이 3m가량의 묘실에 옮겨 두었다가 죽으면 그 자리에 안치하고 금, 은, 보화를 넣은 다음 돌로 쌓아 봉토하는 것인데 성산2구에 거주하고 있는 장광수의 집 안에 고려장터가 있다
- 말무덤골: 옛날에 어떤 장수가 부하를 거느리고 이 골짜기를 지나가는데 갑자기 적군이 공격을 해와 도망을 갈 때 말을 골짜기에 묻어 놓고 갔다하여 지금까지 말무덤골이라 부르고 있다. 갈마(매)산: 옛날 천지 개벽시 갈매산이 물속에 잠겨 끝부분이 갈매기 만큼 남았다 하여 갈매산이라 불렀으며 또한 옛날 갈마산에서 말이 한가로이 풀을 뜯다 목이 말라 물을 찾다 물을 찾지 못하고 말이 목이 탄 산이라 하여 갈마산이라고도 한다.
- 시루봉: 시루봉은 마을 남산으로서 돌의 형태가 떡 시루처럼 생겼다 하여 시루봉이라 명하였고 천지 개벽시 떡시루 만큼 남았었다 하여 시루봉이라 한다.
- 큰 골: 성산2구에 있으며 골짜기가 크고 험준하여 옛날에는 산 짐승들이 많았다고 한다.
- 배나무골: 성산2구에 있으며 아름드리 배나무 한 그루가 있었는데 이 배나무가 재래종이라 가을이 저물어 갈 때 서리를 맞고 그 맛을 냈으며 머슴들의 나뭇길에 청량음료가 되었다고 한다.
- 옷나무골: 몰래 숨어서 옻이 오를 것을 겁내는 사람에게 욕심을 부려 옮겼다고 하여 명명
- 부싯골: 성산2구 깊은 골에 있으며 옛날 조상들이 불을 생산할 때 이 골짜기에서 주워온 돌로서 불을 붙였다고 하며 골짜기가 너무 깊어 걸인들이 밥을 얻어 먹으러 갔다가 가도 가도 끝이 없어 굶고 되돌아 왔다는 설이 있다
2.16. 손목리
합천읍에서 남으로 10㎞ 지점에 위치한 손목1구 마을은 지방도 1024호선이 마을앞을 통과하고 황강과 황계천에서 내려오는 물줄기가 서로 만나는 지역으로 조선조 효종때에는 마을의 지명을 독산이라고 불렀다. 동으로 갈마산, 서로 소룡산, 북으로 망월산, 남으로는 팔산을 경계로 하고 있다.
- 침호정: 광산김씨 재실
- 갓골: 손목 남쪽에 있는 골짜기
- 건방 모퉁이: 손목에서 조동으로 가는 모퉁이
- 광대바우: 손목 남쪽에 있는 바위
- 밴드래: 조동 남쪽에 있는 마을. 옛날 이 근처에 배를 매었음.
- 서원갓: 손목 동남쪽 칠봉산 일대의 산, 용연서원의 산으로 주민들이 이 산에서 땔감을 구했다고 함
동으로 갈마산, 서로 의룡산, 북으로 망월산이 있으며, 서쪽에서 유유히 흐르는 황강을 끼고 갈마산이 날개짓하는 끝자락에 1500년경 고령박씨 17대조 박관공이 지금의 손목2구에 안주하면서 형성되어진 것으로 짐작된다. 본래 지명은 조동이라 하였는데 서쪽에서 흐르는 황강천과 남쪽에서 흐르는 황계천 즉 이수와 사수가 만나는 지역에 소가 형성되어 있으므로 자연히 고기가 많아 조동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 벽한정: 고령박씨 문중에서 세운 재실(경상남도 지정문화재 233호) 무민당 박인이 학문을 가리치던 곳이다.
- 조계정사: 조계 고령 박수종의 추모지소
- 용연사: 박수종, 박인 위의 제사 모시던 곳
* 솔땟등: 손목 서쪽에 있는 등성이
* 산짓등: 밴드래 남쪽에 있는 등성이
* 독 산: 조동 북쪽에 있는 산, 광산김씨의 집성촌이였으며 손목의 옛마을 이름이기도 하다.
* 제월암: 벽한정 앞 강가 바위, 선비들이 모여 시를 짓던 곳
* 풍광대: 벽한정 서편 정자, 선비들이 글을 읽던 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