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소개
루프트바페 소속으로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출격횟수 600회, 격추수 126대를 기록한 에이스 파일럿이며 그 혁혁한 무공을 인정받아 곡엽기사철십자 훈장까지 서훈받았으나, 종전까지 살아남지는 못했다. 루프트바페에서 그 정도 전공을 쌓은 조종사가 비교적 흔한 탓에 요제프 츠베르네만이라는 이름은 그다지 유명하지는 않지만, 항공 전사상 최고의 에이스인 에리히 하르트만이 한때 그의 윙맨으로 함께 비행하며 츠베르네만에게서 실전적인 조종과 전술을 익혔던 사실을 헤아려 보면 결코 흔해 빠진 에이스는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2. 해군에서 공군으로
독일 제국 시대 말기인 1916년 3월 26일에 제국 중부 튀링겐 왕국의 키르츠보르비스(Kirchworbis)라는 시골 깡촌 마을에서 태어났다. 공군에서 조종사가 되긴 했지만, 내륙 지방 출신이었던 그는 원래 어렸을 때부터 바다로 나가고 싶어했기 때문에 해군에 지원 입대했었다. 많은 독일 에이스들이 자원해서 공군에 입대했던가, 혹은 글라이더 조종 경험을 밑천삼아 조종사가 되었던 것과는 달리 츠베르네만은 비행기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전혀 없는 젊은이였다. 게다가 또래나 그보다 어린 청년과 소년들까지 나치즘에 광적으로 빠져 18세라는 징집 연령제한을 속여가면서까지 군대에 자원 입대했던 것과는 달리, 조용히 살고 싶었던 그는 징집 영장을 여러차례 연기하며 늦게 군대를 가게 된 것도 사뭇 다르다. 24살까지도 군입대를 미루고 있던 그는 결국 1940년 초에는 해군 훈련소를 통해 입대하게 되었고, 3월 1일에 신병 훈련소를 나온 그는 곧바로 공군 비행병으로 소속이 바뀌었다. 이른바 헤르만 괴링이 루프트바페 창설 초기부터 써먹던 수법인 "양 염색하기"에 걸려든 것이다.3. 공군의 첫 자대
군대를 가기가 끔찍하게 싫었던 츠베르네만의 입장에서 그의 첫 자대는 최악의 배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가 공군의 첫 자대로 가게 된 곳은 항공 역사를 통틀어서 가장 많은 전투를 치르고 제일 많은 격추수를 기록한 제52전투항공단(JG52)이었다 ! 괴링의 양 염색하기를 받아들이는 대신 하사 계급장을 얻게 된 그는 거기서 제7비행중대원이 되어 2달 후부터는 말단 편대원으로 프랑스 침공 작전에 참가했다. 기본 비행 훈련만 마친 그였지만, 숨겨져 있던 비행에 관한 재능이 꽃피우기 시작한 것은 그때였다. 그는 일어나서 잠이 들 때까지 어떻게 하면 멋지게 비행을 하고 적기에게 승리를 거둘까하는 생각에만 골똘히 빠져드는 비행 매니아로 거듭나게 되었다. 자기 전에는 꼭 다음 출격에서 적기가 자신의 코 앞에 나타나기를 기도했다. 같은 해 7월에는 영국 공군의 최강 전투기 수퍼마린 스핏파이어를 격추하면서 첫 전과를 보고하게 된다.4. 지중해 전역에서 동부전선으로
1941년 5월부터 츠베르네만은 지중해 전역의 크레타 전투에 참전했다. 6월부터 독일이 소련를 침공하면서 동부전선이 열리자 이 전역에 참가하면서부터 그의 전과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부사관 조종사였지만 요제프 츠베르네만은 얼마 안가 전투비행단(Jagdgruppe)에서 눈에 띄는 존재가 되었다. 20대를 격추한 후인 12월 12일에는 공군 명예컵을 받았다. 이듬해인 1942년 5월까지 그의 스코어는 30대를 헤아리게 되었고, 5월 25일에 그의 오른쪽 포켓 아래에는 금빛찬란한 독일 황금십자장이 달리게 된다.이제 상사가 된 그는 이런 서훈이 무색하게도, 6월 23일에 57기 격추의 무공을 인정받아 기사철십자 훈장도 수여받았지만 그 순간에도 츠베르네만의 격추 행진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었다. 같은 해 9월에는 1개월간 무려 30대 이상을 격추해낸 그는 10월 1일에 4대를 가뿐하게 해치우면서 103기라는 엄청난 스코어를 기록하게 되었다. 이제 그의 기사철십자 훈장에는 은으로 만들어진 떡갈나뭇잎이 달리게 되었고, 요제프 상사는 장기 휴가와 장교 진급 대상자가 되었다.
5. 장교가 되다
1943년의 봄에 츠베르네만은 소위로 승진하며 JG52 제9중대로 옮겨졌지만, 그의 활약은 계속 이어졌다. 4월 15일에 113대째, 5월 7일에는 117대째 적기를 격추시켰는데, 그중에서 113대째 제물이 된 P-39에는 15대의 독일공군기를 떨궈 소비에트 연방 영웅이 된 디미트리 글링카(Дмитрий Борисович Глинка : 1917~1979) 중위가 몰고 있었다.그 후, 잠시 동부 예비전투비행단에 배속되어 비행교관 노릇을 하던 그는 가을에 다시 전선에 돌아왔다. 제77전투항공단(JG77) 제3비행중대원이 되었다가 같은 해 12월 15일에 다시 제11전투항공단( JG11) 제1비행중대로 소속이 바뀌었지만, 그 사이에도 9대를 더 잡아먹어 전사한 지크프리트 짐슈 대위 대신 중대를 지휘했다.
츠베르네만은 사병으로 입대한지 4년만인 1944년 4월 1일에 대위로 승진했고, 이제 그가 싸워야 할 곳은 동부전선이 아니라 조국의 하늘을 지켜야만 했다. 1944년 4월 8일, 로텐부르크 기지에서 JG11 제 II 비행단 대원들과 함께 이륙한 그는 P-51을 엄호 전투기로 앞세운 대규모의 B-24 폭격기 편대와 조우했다. 이 날의 교전에서 부대는 6대의 P-51과 8대의 B-24를 격추했지만 JG11 부대원들도 11명이나 전사하고 몇 개월간 입원해야만 하는 중상자만도 3명이나 되었다. 그 전사자 중에는 전쟁 동안 600회나 출격을 하면서도 살아남았던 요제프 츠베르네만 대위도 포함되어 있었다. 디브리핑에서 그의 편대원이 증언한 바에 따르면, 츠베르네만은 격추 당한 후에 곧바로 낙하산으로 탈출하는데 성공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에게는 1기의 P-51이 달려들면서 기총 세례를 퍼부었다는 증언도 이어졌다.
6. 서훈
2급 철십자 훈장 (1941년 4월)1급 철십자 훈장 (1941년 8월)
공군 명예컵
독일 황금십자장
지그프리트 라인 메달(Deutsches Schutzwall-Ehrenzeichen)
기사철십자 훈장 (1942년 6월 23일)
곡엽기사 철십자 훈장 141호 (1942년 10월 31일)
제2차 세계 대전 전투기 에이스 일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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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156b94> ▲ 31~50위 | ||||
순위 | 이름 | 국적 | 격추 수 | 비고 | |
52위 | 아돌프 보르허스 | 독일 | 132대 | ||
아돌프 티크펠트 | 독일 | ||||
에르빈 클라우젠 | 독일 | ||||
55위 | 빌헬름 렘케 | 독일 | 131대 | ||
56위 | 게르하르트 호프만 | 독일 | 130대 | ||
하인리히 슈테어 | 독일 | ||||
58위 | 프란츠 아이제나흐 | 독일 | 129대 | ||
59위 | 발터 달 | 독일 | 128대 | ||
프란츠 되어 | 독일 | ||||
61위 | 루돌프 라데마허 | 독일 | 126대 | ||
요제프 츠베르네만 | 독일 | ||||
63위 | 디트리히 흐라박 | 독일 | 125대 | ||
64위 | 볼프-우도 에텔 | 독일 | 124대 | ||
65위 | 헤르베르트 일레펠트 | 독일 | 123대 | 스페인 내전에서 9기 격추 | |
66위 | 볼프강 토네 | 독일 | 122대 | ||
▼ 67~84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