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의 25대 외무부 장관 유엔 총회의 11대 의장 |
||
본명 |
วรรณไวทยากร Wan Waithayakon 완 와이타야콘 |
|
출생 | 1891년 8월 25일, 시암 방콕 | |
사망 | 1976년 9월 5일 (향년 85세), 태국 방콕 | |
정당 | 무소속 | |
국적 | 태국 | |
가족 | 아버지 와라완나콘 왕자, 어머니 아우디야 공주 | |
배우자 | 비부라야 벤창 키티야카라 공주 | |
자녀 | 아들 1명, 딸 1명 | |
서명 |
[clearfix]
1. 개요
태국의 왕족, 군인, 외교관, 정치인. 제11대 유엔 총회 의장을 지냈다. 라마 4세의 손자 중 한 명. 군인이었을 때의 최종 계급은 소장.2. 생애
1891년 8월 25일, 태국 방콕에서 몽챠오의 왕족으로 태어났다. 이후 영국으로 유학을 떠나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문학을 전공했고, 파리로 건너가 외교학을 전공했다.대학에서 학업을 마친 후, 주프랑스 태국 대사관에서 일하다가 귀국 후에는 외무성에서 일했다. 1926년에 유럽으로 파견되어 국제연맹 태국 대표단 대표가 되고 1929년 영국 대사로까지 근무, 1931년 쭐랄롱꼰 대학 교수와 외교 고문을 역임한다. 1932년 입헌혁명 당시 많은 태국 왕족들이 도망쳤지만 완 왕자는 온화한 성품이었기에 신정부에서도 지위를 유지했다.
그후 계속해서 열강과의 불평등 조약의 개정 등으로 태국 내에서 존경받는 사람이 되었고, 그 노력을 인정받아 쁠랙 피분송크람 내각에서 외무상을 역임하게 되고, 몽챠오의 왕족에서 왕으로 그 지위가 격상당하는 폭풍성장을 하게 된다. 1941년 일본 제국의 중재로 프랑스와 국경협상에 나선 도쿄 회담에서 활약한다.
특히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1943년 열린 대동아 회의에서 쁠랙 피분송크람 총리가 병을 이유로 참석을 거부했을 때 태국 대표단의 대표 겸 총리 대리로 참석했다. 오른쪽에서 세번째 사람이다. 그곳에서 바모, 장징후이, 왕징웨이, 도조 히데키, 호세 라우렐, 찬드라 보스 등 일본 제국과 그 괴뢰국들인 버마국, 만주국, 왕징웨이 정권, 필리핀 제2공화국, 자유 인도 임시정부의 지도자들을 만났다.
전후 1947년 미국 대사와 유엔 대사를 겸임하며, 제11대 유엔 총회 의장이 된다. 1952년부터 1958년까지 외무부 장관이 되며, 라마 5세에게 나라팁 폰프란팡 친왕 작위를 얻게 된다. 1959년 군사 쿠데타를 겪으면서도 부수상 직위를 끝까지 지켜냈고, 1971년에는 타마삿 대학의 총장으로 지냈다. 1976년 9월 5일에 자신이 태어났던 방콕에서 사망했다. 그의 나이 향년 85세였다.
3. 업적
한국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는 태국어를 시민들에게 보급하며 문맹퇴치를 적극적으로 나섰으며, 문맹률 감소에 기여해 많은 시민들의 존경을 받았다. 특히 완 와이타야콘 왕자는 영어에서 따와 일부 태국어 단어를 만들었는데, 그가 만들어낸 태국어 단어는 이렇다.- prachathipatai (민주주의)
- ratthathammanoon (헌법)
- thanakarn (은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