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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3-24 16:53:59

오인정

1. 개요2. 생애3. 가족관계


吳仁正
(1100~1155)

1. 개요

고려의 관료. 한림학사를 지낸 오학린의 증손이다. 아버지 역시 한림학사를 지낸 오질이다.

2. 생애

본관은 고창. 오인정의 집안은 5대에 걸쳐 문장을 업으로 삼았는데, 청렴했기에 가난했다. 25세에 과거에 급제해 원흥진판관에 임명된다. 지공거는 김부식. 판관에 임명됐을 때는 유능하다는 평가가 있었으나, 그 뒤로 10년동안 임용되지 못한다. 자신을 뽑아준 김부식이 권력을 얻자 김부식에게 시를 지어 바친다.
天昏月嘿夜堂淸有▨▨作老龍鳴
하늘 저물고 달 어두운 밤에, 당이 고요한데 ▨▨ 있으니 늙은 용마저 울게 하는구나.
오인정이 김부식에게 바친 고검시(古劒詩)의 일부분

김부식은 "너는 내 문하생인데, 왜 아직도 ▨▨에 이르지 못했느냐?"[1]며 오인정을 탁라도구당사에 임명해 탐라로 보낸다. 오인정은 내심 수도 개경에서 근무하고 싶었으나, 김부식은 오인정의 집안이 가난하니 탐라에서 옷과 음식을 마련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이유 등을 들며 오인정을 타이른다.

오인정 묘지명의 훼손이 심해 오인정이 탐라에 간 뒤로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1155년에 병을 얻어 제주도에서 개경으로 돌아왔으며, 같은 해 7월에 죽고 법운산 서북쪽에 장사지낸다.

3. 가족관계


오인정이 세 아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우리 집안은 아들도 문장을 하고 손자도 문장을 했다. 선을 많이 쌓은 집안은 반드시 경사가 남는다는데, 할아버지도 아버지도 문장으로 업을 삼은 것이 오래니 후사는 반드시 복을 받을 것이다. 너희는 문장에 힘쓰고 또 힘써라.

삼형제는 아버지의 가르침을 마음에 새겨 잊지 않았다. 보한집에 따르면 세 형제 모두 문장이 뛰어났으며, 막내 오세재가 가장 뛰어나고 둘째 오세문이 그 다음이었다.

장남 오세공은 1153년 청주목장서기에 임명된다. 이양윤묘지명, 권정평묘지명의 찬자(撰者)로 이름이 남아있기도 하다.

차남 오세문은 1152년 승보시(생원시)에 합격한다. 보한집에 비서성의 승을 지냈을 때 지은 한시 녹양역(綠楊驛)이, 파한집에 장원 황빈연에게 지은 답시가 남아있다.


[1] 爾爲門生, 何不早詣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