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생 | 1609년 |
사망 | 1637년 |
자 | 계휘(季輝) |
호 | 추담(秋潭) |
본관 | 해주 오씨 |
1. 개요
吳達濟 (1609년 ~ 1637년)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자는 계휘(季輝), 호는 추담(秋潭), 본관은 해주이다. 삼학사중 한 사람이다.
2. 생애
오달제는 인조 12년(1634) 별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관직에 올랐고, 청나라와의 사신 교환을 적극 반대하면서, 주화파를 이끈 최명길을 탄핵하는 데 앞장섰다.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그는 남한산성에 들어가 김상헌과 더불어 척화파의 주요 인물로 활약했다. 그러나 인조가 청군에 항복하자 청나라의 요구로 적진에 넘겨졌는데, 적장 용골대(龍骨大)가 호의를 배풀며 회유했지만 "죽음보다 두려운 것은 불의"라고 하면서 뜻을 굽히지 않았고, 결국 청의 수도인 심양으로 끌렸갔다. 그곳에서 그는 용골대의 갖은 협박과 유혹에 굴하지 않고 윤집, 홍익한과 함께 죽음을 맞이 했다.
이에 그들의 충절을 찬양하여 후세에 삼학사라 불렸다.
사후에 그는 영의정에 추증됐고, 충렬(忠烈)이란 시호를 받았다.
3. 여담
용인시 처인구 모현읍 오산리 산45-14에 그의 묘가 있는데, 묘 안에 시신은 없고 그가 사용했던 요대(혁대)와 주모니만 묻혀 있다. 그의 시신이 없는 까닭에 병자호란이 끝난 뒤 그가 청나라 심양으로 끌려가 그곳에서 죽음을 당했으므로 시신을 찾아오지 못했기 때문이다.오달제 묘 앞에는 묘비와 상석, 향로석이 있고 좌우로 동자석과 망주석, 문인석 등의 석물이 배치되어 있다. 묘 인표에는 부인인 고령 신씨와 의령 남씨의 묘가 있다. 묘소 입구에 위치한 대낭장비[1]는 손자인 오경원이 세운 것인데, 비문에 의하면 의령 남씨가 죽고 난 후 장례를 치르고 비석을 세운 것으로 되어 있다.
[1]
혁대와 주머니를 묻고 세운 비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