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귀스트 조르당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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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
이름 |
오귀스트 "구스티" 조르당 (August "Gusti" Jordan) |
생년월일 | 1909년 2월 21일 |
사망년월일 | 1990년 5월 17일 (향년 81세) |
국적 | 오스트리아 | 프랑스 |
출신지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린츠 |
포지션 | 하프백 |
신체조건 | 178cm | 76kg |
소속팀 |
LASK (1924-1932) 플로리츠도르프 AC (1932-1933) RC 프랑스 (1933-1945) |
국가대표 | 16경기 1골 ( 프랑스 / 1938-1945) |
감독 |
SAS 에피날 (1941) 레드 스타 올랭피크 (1947-1948) 올랭피크 드 마르세유 (1949-1950) 1. FC 자르브뤼켄 (1950-1953) 자를란트 대표팀 (1951-1952) RC 프랑스 (1953-1958) 스탕다르 리에주[1] (1963-196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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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의 전 축구 감독.2. 생애[2]
2.1. 선수 생활
2.1.1. 클럽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난 아우구스트 요르단은 린츠의 거리에서 축구를 즐기다가 LASK에 입단하게 되었다.15세부터 LASK에서 뛰게 된 요르단은 1932년, 플로리츠도르프 AC로 이적해서 1시즌 정도만 머물렀지만 16골을 넣어 토니 샬, 마티아스 카부레크 등 당시 분더팀 핵심 멤버들에 준하는 골 개수를 기록하기도 했다. 하프백이 요르단의 주포지션을 감안하면 꽤 엄청난 수치.
1933년, 요르단은 루돌프 하이덴과 함께 RC 프랑스로 이적했고 1937년에 프랑스 국적을 취득했다. RC 프랑스에서 조르당은 1945년까지 선수 생활을 하면서 디비지옹 1 우승 1회, 쿠프 드 프랑스 우승 4회의 성공적인 커리어를 보냈다.
2.1.2. 국가대표
1937년, 프랑스 시민권을 취득한 조르당은 1938년 월드컵 개최를 앞둔 프랑스 대표팀에도 선발되기 시작했다. 1938년 1월 30일에 있었던 벨기에전에서 대표팀에 데뷔했고, 월드컵 직전에 열린 잉글랜드와의 시합에선 2대4로 프랑스가 패했지만 조르당은 유일한 대표팀 경력의 득점을 기록했다.조르당은 월드컵 2경기에 모두 센터 하프백으로 출전했지만 프랑스는 8강전에서 이탈리아에 패해 월드컵 여정을 마무리했다.
조르당의 대표팀 마지막 경기는 1945년 12월 6일의 오스트리아전이었지만 프랑스는 1대4로 대패했다.
2.2. 감독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선수 커리어가 중단되어 있을 때 조르당은 잠시 SAS 에피날에서 감독직을 지내기도 했다.선수 커리어를 끝내고 조르당은 레드 스타 올랭피크, 올랭피크 드 마르세유, 1. FC 자르브뤼켄, 자를란트 대표팀, RC 프랑스, 스탕다르 리에주에서 감독을 맡았고 자르브뤼켄에선 독일 리그 준우승을 이끌기도 했다.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
조르당의 전문 분야는 헤딩이었다. 그는 기복이 적었고 양발잡이었으며 좋은 시야를 통해 정확한 어시스트를 제공했다. 그리고 아주 훌륭한 테크니션이었다.4. 뒷이야기
- 조르당 역시 실력으로 보면 오스트리아 대표팀에 선발될 가능성이 꽤 있었지만 당시 오스트리아 대표팀은 해외 리그에서 뛰는 선수를 선발하지 않았다. 그래서 30년대 최고급 골키퍼인 루돌프 하이덴도 국가대표팀 커리어가 1933년 이후로 중단되어 실력이나 평가에 비해 꽤 빈약한 편이다.
5. 수상
5.1. 선수
5.1.1. 클럽
5.2. 감독
- 오버리가 준우승 1회: 1951-52( 1. FC 자르브뤼켄)
- 오버리가 남서부 챔피언 1회: 1951-52(1. FC 자르브뤼켄)
[1]
위키피디아의 기록에 따르면 1963년 초반에 병으로 사임한 장 프루프(Jean Prouff)의 감독직을 이어받아
프리미에 디비지옹 우승을 이끌었다고 한다.
[2]
출처: 위키피디아, 11v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