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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6-24 18:05:51

염석진

파일:암살 염석진.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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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행적3. 어록4. 유사 인물

1. 개요

영화 암살의 등장인물. 배우는 이정재.

2. 행적

1887년생. 대한민국 임시정부 경무국[1] 대장.

김구의 신임을 받고 있으며 1911년에는 손탁호텔에서 혼자 데라우치를 암살하려 했으나[2] 강인국에 의해 실패하고, 탈출 과정에서 총에 맞아 무명지를 잘린다. 종로경찰서로 잡혀가서 고문당하는 신세가 되고, 그곳에서 탈출한 후[3] 만주로 도망쳐 다시 독립운동에 합류한다. 이후 1933년에 안옥윤, 속사포, 황덕삼을 모집해 경성으로 보낸다. 주로 사용하는 화기는 학생 때부터 사용해온 마우저 C96 자동권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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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진짜 정체는 일본 제국 경찰의 스파이며 내통자로, 본작의 최종 보스이다.

3. 어록

내 몸 속에 일본놈들의 총알이 여섯 개나 박혀있습니다.
1911년 경성에서 테라우치 총독 암살 때 총 맞은 자립니다. 구멍이 두 개지요?

여긴 22년 상해 황포탄에서,
27년 하바로프스크에서
32년 이쯔고 폭파사건 때
그리고 이 심장 옆은 33년에.

내가 동지 셋을 팔았다고 하셨는데,
그 친구들 제가 직접 뽑았습니다.
그 젊은 청춘들이 어떤 심정이었는지 아십니까?

여러분들은 모릅니다!

내가 어떤 심정으로 그들을 보냈는지!

그건 죽음을 불사하는 항전의 거름이었습니다, 재판장님!

이상입니다.
안옥윤: 왜 동지를 팔았나?
염석진: 몰랐으니까. 해방될지 몰랐으니까! 알면 그랬겠나!
( 이정재)

4. 유사 인물

중공에서 배신자의 대명사로 통하는 군벌 염석산[4] 밀정[5] 출신으로 나중에 백색테러집단인 백의사에 가담한 염동진의 이름을 섞은 것으로 보인다. 독립운동가였지만 배신자이면서 전후 경찰이 되어 사는 모습을 보면 상당히 그럴싸하게 만들어진 이름.

악질 친일 밀정 이종형[6] 또한 모티브로 추정된다.

체코 레지스탕스의 일원이었다가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암살작전에 참가한 동지들의 이름을 팔아먹은 카렐 추르다하고도 행적이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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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현대 대한민국 경찰청에 해당된다. 임시정부 경무국은 임정 인사의 경호 및 청사의 경비뿐만 아니라 일본 스파이의 침투를 막고 정보를 수집하는 정보기관의 역할도 하고 있었다. 경무국의 경자가 경찰외에도 경계,경호,경비라는 뜻도 다 가능하므로 딱히 잘못된 것은 아니다. 또한 대한제국 시기와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에도 현재 경찰청과 같은 업무를 맞은 동명의 경무국이라는 관청이 존재했다. [2] 폭탄을 준비해서 폭발시킨 후 총으로 데라우치 마사타케를 사살하려 했지만 일본 육군의 총에 맞고, 설상가상 강인국이 데라우치를 데리고 도망간다. [3] 그곳에서 일본 간부에 의해 변절하여 스파이가 되었다. [4] 다만 이건 어디까지나 중국공산당의 기준이고, 대만 입장에서는 공산당에 붙지 않고 국부천대까지 따라간 거의 유일한 군벌이다. 그렇지만 국공내전 이전에도 배신 경력이 꽤 화려해서 배신자라고 불려도 이상할 건 없다. 먼저 통수치는 놈이 살아남는 난세였다지만 그걸 감안해도 줄을 자주 갈아탄 편. 대표적인 예로 옌시산은 중일전쟁 기간에도 일본과 협상하고 공산당을 손보려고 한 적이 있다. 허나 이것도 옌시산 입장에서는 이유는 있었다. 옌시산도 처음에는 일본에 맞섰고 정규전으로는 상대가 안 되니까 게릴라전으로 전환하면서까지 싸웠는데 문제는 이때 국공합작으로 연합하고 있던 공산당은 하라는 항일은 안 하고 세력을 넓히려 옌시산을 비롯한 국민당의 뒤통수를 때리고 있었다. 다만 이런 줄타기 행적과는 반대로 산시성의 군벌로서 산시성 통치는 꽤 잘했다고. [5] 염동진은 중화민국 국민정부에서 남의사 일원으로 활동 중 1937년 일제 관동군에 체포되었다. 1940년 풀려났고, 이후 전향했다는 설이 파다했으나 본인은 끝까지 극구부인하였다. 김구와 애증이 교차하는 관계였다는 점도 극중 염석진과 유사하다. 한국전쟁 중 납북. 이후 2021년 6월 9일, 그가 밀정이었다는 유력한 증거가 발견되었지만 여전히 확실하진 않다. 자세한 내용은 염동진 항목 참조. [6] 해방 후 극우 언론 활동가로 신분을 세탁, 반민특위에 체포된 후 온갖 난동을 피워놓고는 고향에서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가 1954년 교통사고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