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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테판 에펜베르크

에펜베르크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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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C 바이에른 뮌헨 앰버서더
Fußball-Club Bayern München e.V. Ambassador
파일:Stefan Effenberg2,w=993,c=0.sport.jpg
<colbgcolor=#dd0129> 이름 슈테판 에펜베르크
Stefan Effenberg
출생 1968년 8월 2일 ([age(1968-08-02)]세)
서독 함부르크
국적
[[독일|]][[틀:국기|]][[틀:국기|]]
신체 188cm / 체중 93kg
직업 축구 선수 ( 미드필더[1] / 은퇴)
축구 감독
축구 행정가
소속 <colbgcolor=#dd0129> 선수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 (1987~1990)
FC 바이에른 뮌헨 (1990~1992)
ACF 피오렌티나 (1992~1994)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 (1994~1998)
FC 바이에른 뮌헨 (1998~2002)
VfL 볼프스부르크 (2002~2003)
알 아라비 SC (2003~2004)
지도자 SC 파더보른 07 (2015~2016)
스태프 KFC 위어딩겐 05 (2019~2020 / 단장)
기타 FC 바이에른 뮌헨 (2022~ / 앰버서더)
국가대표 35경기 5골 ( 독일 / 1991~1998)

1. 개요2. 클럽 경력3. 국가대표 경력4. 플레이 스타일5. 지도자 경력6. 근황7. 기록
7.1. 대회 기록7.2. 개인 수상7.3. 출전 기록
8. 여담
8.1. 다혈질8.2. 독설

[clearfix]

1. 개요

파일:effenberg.jpg

독일의 前 축구 선수. 선수 시절 포지션은 미드필더. 별명은 'Der Chef(지배자, 대장)', '미친 호랑이.'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에서 데뷔했으며, 전성기였던 바이에른 뮌헨 시절에는 주장으로서 25년 만의 UCL 우승을 이끌고 UEFA 올해의 클럽 축구 선수를 수상하였다. 국가대표팀에서도 유로 1992 준우승에 기여하였으나, 1994 월드컵 경기 도중 구설수를 일으켜 국가대표 커리어는 불명예스럽게 마감했다.[2] 특유의 카리스마와 다혈질 성격, 독설로 더 유명했던 선수.

2. 클럽 경력

2.1.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 1기

파일:f95-stefan-effenberg-als-jung-fohlen-1990.jpg

1987/88 시즌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에서 프로로 데뷔했다. 이후 1989-90 시즌 리그와 포칼 32경기에 나서 6골을 기록하는 등 좋은 활약을 펼치며 바이에른 뮌헨으로 이적하였다.

2.2. FC 바이에른 뮌헨 1기

파일:dfl.de-Schwerpunkte-Supercup-Historie-Foto-1990_968w.jpg

이적 후 1990 DFL-슈퍼컵을 우승하며 첫 우승 트로피를 들었다. 하지만 이 당시 바이에른 뮌헨 유프 하인케스 감독 하에서 1988-89, 1989-90 시즌 연속해서 리그를 우승했으나 1990-91 시즌부터 스쿼드의 노쇠화로 부진이 막 시작되던 시점이었다. 두 시즌간 에펜베르크는 각각 41경기 10골, 38경기 11골을 기록하며 활약 자체는 괜찮았지만 2년 동안 슈퍼컵을 제외하고는 그 어떤 우승컵도 들지 못한데다 포지션이 겹치는 로타어 마테우스가 1992-93 시즌을 앞두고 뮌헨으로 이적해오자 피오렌티나로 이적을 결정한다. 이후 팀 동료 브리안 라우드루프와 함께 피오렌티나로 이적했다.

2.3. ACF 피오렌티나

파일:effenberg fiorentina.jpg

그러나 이적 후 가브리엘 바티스투타 둥가, 그리고 같이 이적해온 브리안 라우드루프 등 스타들과 발을 맞추었으나 피오렌티나는 15위로 충격의 세리에 B 강등을 당하고 만다. 1993-94 시즌, 현재는 레스터 시티의 기적적인 우승으로 잘 알려진 클라우디오 라니에리 감독이 부임하고, 에펜베르크는 바티스투타와 원투펀치 공격 라인을 구성해 다시 팀을 1부 리그로 복귀시킨 후, 고향팀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로 이적한다.

2.4.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 2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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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정팀으로 복귀 후, 1994-95 시즌 리그에서 5위를 기록했고, DFB-포칼에서 볼프스부르크를 3대0으로 꺾고 우승해 다음 시즌 UEFA 컵위너스컵 진출까지 확정지었다. 에펜베르크는 이 경기에서 풀타임으로 활약했고, 팀의 3번째 골을 기록했다. 그 다음 1995-96 시즌에도 리그 4위를 기록해 UEFA컵 출전권을 따냈다. 이후 글라트바흐는 하락세로 접어들었으나, 에펜베르크는 바이에른 뮌헨 이적 전까지 4시즌간 118경기에서 23골을 넣으며 활약했다. 1997-98 시즌 종료 후 다시 한 번 뮌헨으로 이적한다. 여담으로 이 때 에펜베르크가 떠난 후 묀헨글라트바흐는 1998-99 시즌 리그 꼴지인 18위를 기록해 2부 리그로 강등당했다(...).

2.5. FC 바이에른 뮌헨 2기

이적 직후 1998-99 시즌, 35경기에서 9골을 넣는 등 중원에서 팀의 중심이 되며 본인 커리어 사상 처음으로 분데스리가를 우승했고, 챔스에서도 인터 밀란, 바르셀로나 안드리 셰브첸코를 필두로 한 돌풍의 팀 디나모 키예프 등 당대의 쟁쟁한 상대들을 모조리 꺾으며[3] 결승에 진출했지만 그 유명한 캄프 누의 기적의 희생양이 되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게 믿기지 않는 역전패를 당하며 준우승에 머무르고 만다. DFB-포칼에서도 결승전에 올랐으나 베르더 브레멘을 상대로 승부차기에서 패하며 준우승을 거두며 리그 우승 하나에 만족해야했다. 여담으로 에펜베르크는 이 경기에서 1대0으로 밀리던 와중에 센스있는 킬패스로 카르스텐 얀커의 동점골을 어시스트했으나 승부차기에서 골문을 넘기는 슛으로 실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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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00 시즌에도 조별 리그에서 비센테 델보스케 감독이 이끌고 라울 곤살레스, 페르난도 이에로, 호베르투 카를루스, 페르난도 레돈도, 스티브 맥마나만, 이케르 카시야스 등이 포진한 레알 마드리드를 상대로 에스타디오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에서의 멋진 중거리 프리킥골을 비롯해 두 경기 모두 공격 포인트를 기록하며 조별 리그에서 무려 홈 4-1, 원정 4-2의 스코어로 털어버렸지만 4강에서 다시 만났을땐 1승 1패를 거뒀으나 합산 스코어에서 3대2로 밀려 결승 진출에 실패했고, 분데스리가와 포칼을 더블 우승한 것에 만족해야했다.[4] 이 시즌 전반기 종료 후 로타어 마테우스가 바이에른에서의 커리어를 마쳤으며, 에펜베르크가 그의 뒤를 이어 주장직을 맡게 되었다.[5]

그리고 2000-01 시즌, 마지막까지 피터지는 우승 레이스 경쟁을 한 샬케 함부르크와의 시즌 마지막 라운드 추가시간의 드라마틱한 골로 승점 1점차로 제치며 극적인 리가 우승을 달성해 72~74년 이후 다시 한번 바이에른의 3연속 리그 우승 성공에 크게 기여했다. 에펜베르크 역시 이 시즌 30경기에서 5골을 기록하는 등 중원사령관과 정신적 지주로서의 역할을 120% 해냈다.[6]

특히 챔스에서의 팀의 행보는 참으로 엄청났는데, 아스날을 1승 1무로, 2년전 결승에서 아픔을 안겨줬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도 홈/원정 모두 승리를 거두며 4강에 진출했다. 4강에서 다시 한 번 레알 마드리드를 만나 홈/원정 모두 승리를 거두며 결승 진출에 성공한다. 특히 2차전 홈경기에서는 에펜베르크가 경고 누적으로 결장해서 이래저래 걱정이 많았으나 당시 갓 데뷔한 오언 하그리브스가 좋은 모습을 보여주며 승리를 거두며 어렵지않게 결승행에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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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승 상대는 작년 준우승팀 발렌시아. 에펜베르크는 1대0으로 밀리던 와중에 본인이 페널티 킥을 만들어냈으나 메멧 숄이 실축했고, 카르스텐 얀커가 다시 얻어낸 페널티 킥을 에펜베르크가 직접 처리해 동점골을 성공시켜 팀을 구해냈다. 승부차기에서도 깔끔하게 카니자레스 골키퍼를 무너뜨리며 바이에른이 25년 만에 빅 이어를 들어올렸다. 에펜베르크는 UEFA 올해의 클럽 축구 선수로 선정되었다.

이후 2001-02 시즌은 직전 시즌 만큼이나 치열한 우승경쟁 끝에 마지막 라운드에서 리가, 포칼, 챔스 모두 2% 부족하게 무관으로 그쳤다. 리그는 3위, 포칼은 4강에서 샬케에게 패, 챔스는 8강에서 레알 마드리드와 혈투끝에 3대2로 떨어져서 무관에 그쳤다.[7]

2.6. 이후

바이에른의 세대교체 바람에 맞아 차기 시즌 볼프스부르크 이적을 택했다. 이후 볼프스부르크와 중동팀 알 아라비에서 한 시즌씩 뛴 후 선수 커리어를 마감한다.

3. 국가대표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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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여름 유로 1992 준우승 멤버로 활약했고, 본인도 대회 베스트 11에 선정되었다.

1994 미국 월드컵에도 참가, 조별예선 마지막 경기에서 한국을 맞아 김주성과 경기 동안 계속 부딪혔다. 더티 플레이로 계속해서 도발하다가 김주성의 레인보우 플릭에 굴욕을 당하거나 거친 태클로 옐로카드를 받기도 했다. 독일은 전반에만 3:0으로 앞서갔지만 후반에 와서 한국이 그야말로 미친 듯이 독일 진영으로 뛰어들어 전차군단이라는 독일이 제대로 공격조차 펼치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자[8] 관중들은 독일 선수들에 대해 야유를 보내기 시작했고, 그때 에펜베르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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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에게 야유를 하는 관중들을 향해 가운데 손가락을 치켜들었다.

당연히 미국 현지 관중들과 안 그래도 상대적 약체인 대한민국을 상대로 쩔쩔매며 고전하던 베르티 포크츠 감독은 이에 격분했고, 즉각 교체당한 뒤, 대표팀에서의 퇴출은 물론 강제 귀국 조치까지 당했다. 그 후 에펜베르크가 빠진 독일 로타어 마테우스 위르겐 클린스만, 안드레아스 브레메를 주축으로 한 게르만 삼총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8강에서 불가리아 축구 국가대표팀[9]에게 역전패를 당하고 짐을 싸게 되었다. 결국 이 사건 때문인지 에펜베르크는 두 번 다시 국제 무대에 발을 들이지 못하게 되었다.[10]

만약 에펜베르크가 그 지랄맞은 성질머리만 아니어서 유로나 월드컵 같은 국제무대에 계속 출전했다면 독일의 암흑기 1994~2000년의 국제 무대 성적은 달라졌을 것이라는 풍문이 있다. 특히 필드 위의 에펜베르크는 프란츠 베켄바워의 대를 이을 카이저, 강력한 보스 기질과 리더십, 카리스마를 가진 선수였기 때문에 에펜베르크의 영구 퇴출에 논란이 많았다. 그래서 그런지 독일 축구는 저 시기에 비운의 천재 스위퍼 마티아스 자머가 이끌던 유로 1996 우승을 제외하고는 그 위상에 걸맞지 않은 초라한 성적을 냈었다.[11] 다른 유럽 국가들과의 A매치에서도 좋은 성적을 내지 못하며 녹슨 전차라는 불명예스러운 예명을 가지고 말았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 이런 독일의 극심한 부진이 이어진 1990년대 말~2000년대 초반은 바이에른 뮌헨의 중흥기였다는... 실제로 유럽 대항전에서 이 시기는 3M의 시대(맨체스터, 마드리드, 뮌헨)라 불릴 정도로 뮌헨이 챔스 4강을 밥먹듯이 나갔다. 저 셋이 붙어 서로를 꺾는 팀이 빅 이어를 들던 시절이었다. 1998~2002년 에펜베르크의 지휘를 필두로 한 클래시컬한 뮌헨 조직적인 공격과 피지컬로 찍어누르는 플레이는 그야말로 일품이었으며, 중요한 순간마다 세트피스에서 득점이 빵빵 터지며 화력을 더했다.[12] 물론 에펜베르크가 국대에 없는 것도 제일 컸지만, 뮌헨의 핵심 플레이메이커 메멧 숄은 메이저 대회 직전만 되면 부상당해 결장하는 일이 다반사였고, 카르스텐 얀커는 국대에서는 그 떡대 플레이가 그다지 안 통했던 것도 있다.

녹슨 전차라는 예명은 독일이 2006 독일 월드컵이 끝나서야 비로소 사라지게 된다. 2002 한일 월드컵은 독일이 준우승이라고 찬양하기엔 결승전 이전의 대진이 너무 좋았다. 16강전 파라과이, 8강전 미국, 준결승전 한국. 사실상 한국이 독일의 천적들을 다 없앴다. 이탈리아, 스페인, 지금은 아니지만 포르투갈까지. 월드컵을 갖지 못할 바엔 차라리 잿더미로 만들어 버리겠다! 결승전 브라질을 제외하고는 진짜 그나마 독일의 상대다웠던 상대는 같은 조별리그였던 아일랜드 정도. 그런데 아일랜드도 사실 독일의 전력에 비해 약간 아래였는데 경기 막판에 로비 킨이 기습골을 넣어버리는 바람에 비기고 말았다(...).

4. 플레이 스타일


페르난도 레돈도, 데메트리오 알베르티니와 함께 90년대를 대표하는 딥라잉 플레이메이커. 안드레아 피를로, 샤비 알론소, 폴 스콜스에 꿀리지 않을 당대 롱패스의 대명사로 맨유의 레전드 로이 킨과 함께 당대 최고의 수비형 미드필더 자리를 놓고 경합한 한 시대를 대표하는 미드필더였다. 거칠고 강력한 수비는 90년대 '필드 위의 호랑이' 에펜베르크의 상징이었다. 단 플레이 스타일은 로이 킨보다 좀 더 전략적이고 정교했으며, 처진 위치에서의 플레이메이킹에 탁월한 면모를 보였다.

기본적인 포지션은 중앙 미드필더이지만 처진 위치에서의 롱패스로 팀의 공격을 전개하는 수비형 미드필더나, 본인이 직접 박스까지 들어가 마무리를 담당하는 공격형 미드필더까지 모두 담당할 수 있었고, 짧은 국대 시절에는 스리백의 좌-우 측면 수비수나 측면 미드필더까지 소화하던 멀티플레이어였다. 킥력이 매우 뛰어나고 정교했기에 어느 위치에서든 정확한 킬패스를 지오반니 에우베르 카르스텐 얀커 등에게 공급했고, 큰 키와는 달리 주력 또한 뛰어나서 직접 볼을 몰고 전진하거나 박스에 침투해 득점까지 쏠쏠하게 기록했다. 여기에 직접 프리킥까지 가능한 빼어난 골 결정력까지 있었다.

하여튼 이 양반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바이에른의 전설들 중 전설들만 오른다는 명예의 전당과 2005년 역대 XI에 딸랑 6시즌 뛰었는데도 올라간걸 보면 분명 보통 양반은 아니라는걸 알 수 있다.[13]

'미친 호랑이'라는 별명이 무색하지 않게 거친 플레이를 하다 보니 분데스리가 경기에서 받은 옐로 카드109장에 이른다.

5. 지도자 경력

은퇴 후에도 카를하인츠 루메니게 바이에른 사장의 디스에 "그의 조언 따윈 필요 없다"라고 쿨하게 씹는 등 늙어서도 여전하다. 근데 그냥 감독들이 흔히 날리는 잔소리가 아니라 팀의 레전드의 말이었다는 거(...). 게다가 루메니게는 바이에른 뮌헨 소속으로 발롱도르를 수상한 마지막 인물이었다!

은퇴 이후 한동안 후술한 불륜 상대와 결혼하고 미국으로 이주하여 지도자 커리어를 쌓는 길과는 거리를 두고 지냈다. 성질머리를 보면 도저히 구단에서 오퍼를 넣었을 것 같지가 않다.

TV 해설자로 활동을 하며 가끔 현역들에게 독설을 쏴주곤 했다. 그러면서 틈틈히 자선 활동, 특히 학대 아동에 대한 지원과 개발 도상국 지원의 일환으로 태국 등 각국에 축구 학교를 개설하는 사업에 참여했다.

2012년 지도자 라이선스를 드디어(!) 취득했다.

피파 온라인 3 2차 월드 레전드에 추가되어 국내 非 바이에른 뮌헨 팬들에게도 인지도가 매우 상승했다, 콜네임은 미친 호랑이.

5.1. SC 파더보른 07

2015년 10월 13일 2. 분데스리가 SC 파더보른 07의 감독으로 부임했다. 현역 은퇴 이후 11년 만에 필드로 복귀.

2015년 10월 16일, 브라운슈바이크와의 경기에서 2:0 완승을 거뒀다. 한 경기만 보고 평가하기에는 힘들지만 선수 시절 전술 이해도가 뛰어난 덕에 전술을 짜는 능력도 뛰어난 것처럼 보였지만 2연승 이후 13경기에서 6무 7패로 13경기 연속 무승을 기록하는 저조한 성적을 거뒀다. 에펜베르크가 부임하기 전 2승 1무 7패라는 최악의 성적이었던 것을 감안하더라도 에펜베르크의 성적은 별다를게 없었다. 재임 5개월 동안 총 15경기 2승 6무 7패라는 저조한 성적으로 결국 2016년 3월 3일자로 경질되었다. 이후 파더보른은 최하위로 3. 리가로 강등되었다.

5.2. KFC 위어딩겐 05

2019년 10월 KFC 위어딩겐 05 단장직에 선임되었다. 하지만 2020년 5월 자신의 요청에 따라 해임되었다.

6. 근황

현재 해설자와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이다.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과의 일로 큰 물의를 빚은 메수트 외질에 대해 대표팀에서 퇴출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리고 카잔의 치욕 이후 다음과 같은 반응을 보였다. 영상

그래도 요즘은 나이 들어서인지 방송에서의 모습을 보면 많이 점잖아진 듯. 영상 확실히 턱살과 뱃살이 찌고 나서 인상도 온화해졌다.

인스타 계정이 있다. # 들어가면 손녀의 쪽쪽이를 물고(...) 찍은 사진도 있다. # 현역 시절의 이미지와는 상반되는 모습. 축구 역사를 따져봐도 성질머리 거칠기로는 역대 상위권인 에펜베르크를 유일하게 손녀가 무장해제 시켜놓은것 같다.

2022년 9월 16일 바이에른 뮌헨의 새 엠버서더로 임명되었다. #

에펜베르크의 선수 시절을 생각하면 언론에서는 얼마나 과격한 목소리를 낼까 궁금해하는 사람도 많을텐데, 상술했듯이 굉장히 점잖고 조신히 자신의 의견을 전달한다.

7. 기록

7.1. 대회 기록

7.2. 개인 수상

7.3. 출전 기록

시즌 클럽 소속리그 리그 FA컵 대륙대회
경기 득점 경기 득점 경기 득점
1987/88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 분데스리가 15 1 0 0 - -
1988/89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 분데스리가 29 3 2 0 - -
1989/90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 분데스리가 29 6 3 0 - -
1990/91 FC 바이에른 뮌헨 분데스리가 29 6 1 0 8 1
1991/92 FC 바이에른 뮌헨 분데스리가 33 10 1 0 4 1
1992/93 ACF 피오렌티나 세리에 A 30 5 0 0 - -
1993/94 ACF 피오렌티나 세리에 B 26 7 0 0 - -
1994/95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 분데스리가 30 7 5 2 - -
1995/96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 분데스리가 31 7 2 1 6 2
1996/97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 분데스리가 29 1 2 0 3 2
1997/98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 분데스리가 28 8 1 0 - -
1998/99 FC 바이에른 뮌헨 분데스리가 31 8 6 3 12 4
1999/00 FC 바이에른 뮌헨 분데스리가 27 2 5 0 11 2
2000/01 FC 바이에른 뮌헨 분데스리가 20 4 0 0 10 1
2001/02 FC 바이에른 뮌헨 분데스리가 17 2 4 0 7 1
2002/03 VfL 볼프스부르크 분데스리가 19 3 2 0 - -
2003/04 알 아라비 카타르 스타즈 리그 15 4 0 0 - -

8. 여담

파일:시대별 최고의 수비형 미드필더.jpg

골닷컴에서 시대별 최고의 미드필더 5인을 선정했는데, 1990년대 최고의 수비형 미드필더 1위를 차지했다.

2001년 나이트클럽에서 여성을 폭행하거나, 팀 동료 토마스 스트룬츠[14]의 부인과 불륜을 저지르고도 아무렇지도 않게 행동한 것으로 악명높았다. 이 양반의 원조격 결국 스트룬츠는 바이에른 뮌헨을 떠났다. 에펜베르크는 자신의 부인과 이혼하고, 스트룬츠와 이혼한 불륜 상대와 재혼했다.

한국의 바이에른 뮌헨 팬카페에 올라온 에펜베르크에 관련된 흥미로우면서 훈훈한 일화가 있는데, 한 팬이 에펜베르크의 유니폼을 구해 인스타그램에 인증샷을 올렸는데, 에펜베르크 본인이 좋아요를 누른 것도 모자라 해당 팬의 계정을 팔로우까지 했고, 심지어 DM으로 만약에 독일에 오면 직접 사인을 해주겠다는 말까지 했다. 그리고 5년 뒤에 실제로 그 팬을 만나서 사인을 해주고 대화까지 나누는 등 훌륭한 팬서비스를 해줬다고 한다. 한국 피파에서 자기 쓸 만하냐는 질문은 덤 #

8.1. 다혈질

에펜베르크를 정말 유명하게 만든 것은 그 인상적인 성격으로 특유의 지X맞은 성질머리 때문에 올리버 칸조차도 에펜베르크의 앞에서는 순한 양처럼 주눅들었을 정도다. 레알 마드리드 CF의 주장 페르난도 이에로도 그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로이 킨도 챔스 8강과 조별 리그에서 상대할 때 모두 신경전을 벌이지 않으려고 했다.[15] 그와 성깔머리로 대적할 상대라면 그나마 미하일로비치 칸토나가 전부이다. 에펜베르크를 통제할 수 있는 감독은 당시 FC 바이에른 뮌헨의 감독이었던 명장 오트마어 히츠펠트 뿐이었을 정도였다. 디에고 코스타급으로 필드에서 시비도 잘 붙었고, 거친 몸싸움과 보복태클도 전혀 서슴지 않았다. 99-00 쾰른전 홈경기에서는 상대팀의 계속된 거친 태클에 분노해 상대팀 감독 멱살을 잡고 깽판친 적도 있다.
영상 1분 3초부터가 바로 그 도르트문트전
00-01 시즌, 리그 우승 행방이 달린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와의 경기에서 고의적인 몸통박치기로 퇴장당하고, 나가면서 도르트문트 홈팬들의 엄청난 야유에 키스로 화답하는 위엄을 보였다(…).[16]

하지만 오트마어 히츠펠트 감독은 에펜베르크에게 필드 위에서의 모든 권한을 일임하는 등 에펜베르크를 전폭적으로 신뢰하는 모습을 보였다. 에펜베르크가 히츠펠트의 말은 엄청 잘 들었다고 한다. 어째 알렉스 퍼거슨 감독의 말은 잘 들은 맨유 시절의 에릭 칸토나가 생각난다. 둘이 성격 더러운 것도 비슷하다 명성에 비해 국가대표전 성적은 35경기 5골[17]로 두드러지지 않으며 활동기간도 채 2년이 되지 않는다. 그 이유 또한 역시 저 불같은 성격 때문이다.

8.2. 독설

입도 거칠어서 실로 주옥같은 독설들을 많이 날렸다. 그야말로 이천수(지랄맞은 성격을 가진 축구선수) + 김구라(주옥같은 독설).

다음은 에펜베르크의 독설들.
1. " 피구? 그게 누구인가? 잘 모르겠다."
00-01 레알 마드리드 CF와의 챔피언스 리그 경기를 앞두고 루이스 피구에 대해 묻는 기자들에게 했던 말. 이 당시 루이스 피구는 포르투갈과 레알 마드리드의 에이스로서 크랙형 윙어의 대명사였다.[18]
2. " 지단 솔라리가 내 앞에서 잔재주를 부릴 때 그 다리를 박살내고 싶었다."
레알 마드리드와의 챔피언스 리그 경기 종료 후
3. " 리즈 발렌시아같은 피라미들과 뛰느니 이게 낫다."
00-01 챔피언스 리그 4강에서 레알 마드리드 CF를 만나고 기자들이 소감을 묻자 했던 말. 당시 리즈는 말 그대로 리즈 시절의 리즈로 챔스 4강에 깜짝 진출한 돌풍의 팀이었고, 발렌시아도 역시 못지않는 강호였다.
4. "발렌시아? 세리에 A에 있는 팀 이름인가?"
00-01 챔피언스 리그 발렌시아와의 결승전에서 만나게 되자 어떻게 생각하냐고 묻는 기자에게 했던 말. 위에 말했듯 발렌시아는 팀의 전성기였을 뿐만 아니라 당시 99-00 시즌에 이어 2년 연속 챔피언스리그 결승에 진출한 팀이었다.
5. "내 주변에 있는 모든 자들은 나를 위한 소품에 불과하다."
에펜베르크의 자기 중심적인 태도를 거론하는 기자에게
6. "누군가 나를 발로 한 번 찬다면, 난 뒤돌아 그 놈을 두 번 걷어 찰 것이다."
7. "그 자식은 마치 수염 난 계집애 같았다. 놈의 뺨을 갈기고 싶었다."
00-01 챔피언스리그 8강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의 챔피언스리그 경기 종료 후 데이비드 베컴의 플레이에 대해 묻는 기자들에게 했던 말. 중원에서 계속된 충돌로 감정도 격해졌고, 특히 충돌 후 일어나서 베컴이 악수를 청했으나 '저리 꺼져'라는 식의 손짓으로 거절한 장면은 압권 그 자체.
8. "놈들이 내가 아침 식사를 하고 있는 식탁 앞에 와서 욕을 한다 해도 상관없다."
1.FC 뉘른베르크와의 분데스리가 경기 종료 후, 상대팀 팬들의 야유에 화답

이래서 한국에서의 별명은 미친 호랑이.[19]

그래도 더러운 성질머리와 입에 비해서 시합에서의 플레이는 깔끔했다면 모르겠지만, 경기중에 거친 몸싸움이나 보복 태클도 서슴지 않았으며 분데스리가 최다 옐로카드(109장) 기록을 가지고 있다. 쉽게 말해 입만 잘 털었던 게 아니라 그라운드에서도 미쳐 날뛰었다는 뜻.

국가대표로 모습을 드러낸 경기가 많지 않아서 가지고 있는 명성에 비해 국내에선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축구 선수로서의 업적이나 기량적인 측면의 재조명보다는 주로 거칠었던 언행이 뒤늦게 화제가 되었다는 점에서 안타까운 인물. 하지만 인터넷에 떠도는 에펜베르크 어록은 대부분 부풀려지거나 과장된 내용들이 많다. 축구웹진 '아이러브사커'의 분데스리가 필진이었던 김진환에 의하면 "인터뷰 내용을 의역하는 부분에 있어서 에펜베르크의 독특한 캐릭터를 부각시키기 위해 실제 발언보다 부풀려 기사를 작성하는 경우가 많았다"라고. 마치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와 같이 실제로 발언한 적 없는 말이나 다른 의미로 한 말이 부풀려져도 축구 팬들이 아무 이상없이 받아들일 정도의 캐릭터가 되어버렸다.
[1] 공격형 미드필더, 중앙 미드필더, 수비형 미드필더로 고르게 출전했으며 측면 미드필더나 센터백을 보기도 했다. [2] 1998년에 잠시 복귀하여 친선전 2경기를 뛰기도 했다. [3] 특히 바이에른 올드팬들에게는 3대1까지 벌어진 점수차를 3대3으로 기적적으로 따라잡은 원정경기가 두고두고 회자된다. 이 경기에서 에펜베르크는 추격의 불씨를 살리는 환상적인 프리킥골을 넣었다. [4] 그나마 지난 시즌 승부차기에서 졌던 베르더 브레멘에게 결승에서 복수전에 성공하며 우승했다. 리그에서도 2번 만나 모두 이겼다. [5] 1998-99 시즌부터 마테우스가 고령이라 매 경기 출장하는게 아니었기에 이미 올리버 칸과 더불어 간간히 주장완장을 차긴 했다. [6] DFB-포칼에서는 충격의 이변이 벌어졌는데, 2라운드에서 당시 3부 리그 팀인 마그데부르크에게 승부차기에서 4대2로 져서 떨어졌다. [7] 굳이 따지면 완전 무관은 아니다. 챔스 우승팀 자격으로 나간 인터컨티넨탈컵에서 우승했기 때문. [8] 농담이 아니라 진짜 실제 상황이었다. 후반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아 2골을 기록해 스코어는 3:2로 순식간에 좁혀졌고 독일 선수들은 체력이 떨어져 거의 걸어다니는 반면 한국 선수들은 맹렬하게 독일 진영을 휘젓고 다녔다. 오죽하면 위르겐 클린스만이 후일 "당시 시간이 5분만 더 있었다면 우리가 졌을 것이다"라고 말했을 정도.그리고 이 말은 2018년도에 후배들이 손수 증명해주었다 사실 이때는 엘니뇨로 엄청난 폭염이어서 노장의 비율이 많은 독일팀이 빠르게 지쳐버린게 원인이었다. [9] 당시 불가리아의 에이스였던 흐리스토 스토이치코프 바르셀로나의 핵심적인 선수였으며, 이 대회에서 불가리아를 4강으로 이끈 공으로 그해 발롱도르를 수상했다. [10] 물론 1998년에 잠깐 국가대표에 복귀해 뛴 적은 있다. 그러나 메이저 대회에는 두 번 다시 발을 들이지 못했으니 틀린 말은 아니다. [11] 1994 미국 월드컵 8강, 1998 프랑스 월드컵 8강, 유로 2000 조별 리그 광탈(...). 특히 1998 프랑스 월드컵 땐 처음으로 출전하였던 크로아티아에게 3:0으로 떡실신당한 건 두고두고 회자될 정도. [12] 당시 메멧 숄은 지금의 안드레아 피를로와 비슷한 폼의 프리킥을 구사하는 프리킥 스페셜리스트였고, 에펜베르크야 더 설명할 필요가 없는 최고의 간접 프리킥 키커였다. 직접 프리킥도 꽤 위협적인데, 대표적인 게 에스타디오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에서 레알 마드리드를 무너뜨린 30m 땅볼 프리킥이 있다. [13] 지오반니 에우베르 역시 6시즌 밖에 뛰지 않았지만 분데스리가 외국인 최다 득점이라는 뚜렷한 커리어가 있었다. 게다가 1990~1992년때는 팀은 단 하나의 트로피도 들지 못했고, 리그에서는 10위까지 떨어지던 시절이었다. 사실상 1998~2002 단 4년간의 활약으로 바이에른 뮌헨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고 역대 XI에까지 들어간 레전드라고 할 수 있겠다. [14] 스트룬츠도 뒤스부르크, 바이에른 뮌헨에서 활약했고 독일 국가대표 미드필더로도 뛴 선수이다. [15] 물론 경고 트러블 때문이기도 했다. 그래도 둘이 심판 안 볼만한 위치에서 어깨빵을 나누는 상황이 발생하긴 했으나 둘다 조용히 갈라졌다. [16] 이 경기는 분데스리가 역사상 가장 거칠었던 경기 중 하나다. 양팀 도합 4명의 선수가 퇴장당하고 16장의 옐로카드가 쏟아졌다. 마치 2006년 월드컵의 뉘른베르크의 전투 사건을 미리 보는 듯 했다…. [17] 집계하는 곳에 따라 4골이라는 곳도 있고 5골이라는 곳도 있을텐데, 92년도 친선경기 덴마크전에서 넣은 중거리슛 골이 엄밀히 말하면 골대를 때리고 페테르 슈마이켈의 뒤통수를 때리고 들어갔기에 이걸 에펜베르크의 골로 치느냐 슈마이켈의 자책골로 치느냐의 차이다. [18] 지금으로 말하자면 ' 호날두? 그가 누군가? 잘 모르겠다.' 라고 말하는거나 똑같은 패기 [19] 현지에서도 호랑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이를 아는지 에펜베르크는 본인의 뒤통수를 호랑이 얼굴로 염색하는 기행을 선보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