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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8-06 14:39:15

에스토니아 공국

에스토니아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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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덴마크령 에스토니아 공국
1.1. 상세
2. 스웨덴령 에스토니아 공국

1. 덴마크령 에스토니아 공국

1219년 덴마크 국왕 발데마르 2세 발트해 무역을 장악하기 위해 오늘날의 에스토니아 북부를 정복하고 탈린을 건설하며 세운 공국이다. 1343년 에스토니아인이 대규모로 봉기하자 영토를 포기하고 영유권을 1346년 발데마르 4세 튜튼 기사단에게 매각하면서 붕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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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상세

발트해 연안은 중세 초부터 바이킹의 약탈과 무역이 이루어지는 장소로 중동에서 수입된 물산이 종종 흑해에서 하천 수운을 이용하여 북해로 운반되었다. 바이킹의 기독교화 이후 덴마크는 한시적인 약탈과 교역을 넘어 에스토니아에 섬과 해안지대에 십자군 운동과 기독교 전파를 명분으로 원정군을 보내고 요새를 건설하기 시작했으며, 1218년 교황으로부터 리보니아 검의 형제기사단을 원조하라는 명을 받고 이를 이행하면서 그 대가로 에스토니아 일대의 지배권을 인정받았다. 발데마르 2세가 이끄는 덴마크 왕국 군대는 에스토니아 북부 해안 지대의 추디-에스티인들을 상대로 대승을 거둔 후 1219년 에스토니아 공국을 건설하였다. 발데마르 2세의 에스토니아 원정 도중 흰 삽자가 그려진 붉은 깃발이 하늘에서 내려와 승전했다는 구전 전승이 전해지는데 이는 오늘날 덴마크 국기 단네브로의 기원이 되었다.

리보니아 검의 형제기사단은 유리예프를 포함한 에스토니아 중부와 남부를 정복하고, 덴마크령 에스토니아 공국은 에스토니아 북부를 차지했다. 새로 덴마크의 식민 항구 도시 레발이 건설되었다. 리보니아 검의 형제기사단과 이를 흡수한 튜튼 기사단은 종종 영토 문제로 에스토니아 공국과 전쟁을 벌이기도 했다. 명목상 덴마크령 에스토니아 공국이었지만 공국은 실질적으로 독일인들의 나라나 다름 없었는데 공국 내 봉신 중 80%는 독일인, 18%만 덴마크인이고 에스토니아계는 2%에 불과했다고 한다. 레발의 주교들은 종종 이웃 리보니아에는 현지 리보니아인이 봉신이 되는 경우가 없는데 에스토니아 공국에서는 덴마크 국왕이 에스토니아인을 봉신으로 임명했다면서 십자군의 권위가 무너졌다고 불평하는 경우가 많았다.

1332년 덴마크 국왕 크리스토페르 2세가 감금된 상태로 사망한 이후 에스토니아 공국에서는 덴마크계 봉신들과 독일계 봉신들이 계속 내전을 벌였고, 1343년에는 하리아라는 에스토니아인의 지도 하에 에스토니아 농노들이 봉기하였다. 소수의 덴마크인으로 공국 내 에스토니아인들과 독일인들을 통제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던[1] 덴마크는 결국 1346년 영유권을 튜튼 기사단에게 매각하였고, 이후 튜튼 기사단은 독일계 봉신들을 흡수하고 에스토니아인 농민 봉기를 진압한 이후 이 지역을 영토에 편입시켰다.

2. 스웨덴령 에스토니아 공국

파일:Sw_BalticProv_en.png

1561년 스웨덴 국왕 에리크 14세가 탈린을 포함한 에스토니아 북부 일대를 정복한 후 신설되었으며, 대북방전쟁을 종결시킨 1721년의 뉘스타드 조약으로 러시아 제국에 할양되기 전까지 유지되었다. 러시아 점령 이후 발트 독일인의 착취가 심해지면서 에스토니아인은 이 시기를 "Vana hea Rootsi aeg" 이른바 "행복했던 스웨덴 시절"이라고 칭했으나 막상 스웨덴도 에스토니아 통치는 발트 독일인에게 위임했고, 초기에는 농노의 부담이 늘어나는 등 큰 차이는 없었다. 다만 칼 11세가 발트 독일인과 교회의 권력을 견제하면서 토지 사유를 제한하고 귀족 영지를 국유화하는 정책을 실시했으며 사법제도를 개정하며 이때부터 농노들이 지주를 합법적으로 고소할수있게 되었고, 농노들의 군입대를 허용해서 에스토니아들이 출세할수있게되는 길을 열게 되며, 에스토니아인들의 처우가 나아지기는 했다.

[1] 실제로는 덴마크의 부채문제가 더 큰 문제로 작용했다. 당시 덴마크 국왕이었던 발데마르 4세는 큰아버지 에리크 6세와 아버지 크리스토페르 2세가 파멸시킨 덴마크를 재건중이었는데 덴마크 본토와 떨어져있고 관리가 안되는 에스토니아 공국은 사실상 돈먹는 하마에 불과했기 때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