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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릭 칸토나/클럽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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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에릭 칸토나의 클럽 경력을 정리한 문서.

2. 클럽 경력

2.1. AJ 오세르

프랑스 마르세유 출신. 사르데냐, 이탈리아, 스페인 카탈루냐 혈통으로[1] 어렸을 때부터 축구에 특출난 재능을 지니고 있었으며, 나이 17세에 AJ 오세르[2]의 주전 멤버로 선발되는 뛰어난 모습을 보여주었다. 팬들은 17세의 소년이 필드에서 보여주는 뛰어난 플레이에 열광했고 또 엄청난 기대감을 가지기에 충분했다.

게다가 지금도 "칸토나"하면 떠오르는 다혈질 성격은 이 때 부터, 이미 파릇파릇했다. 당시 팀의 주장이 정말 사소한 부탁으로 라커룸에 놓고 온 자신의 가방을 좀 가져다 달라고 하자, 어린 칸토나는 "네가 뭔데 나한테 명령질이야?"라며 바로 주먹을 날렸다.

2.2. 올랭피크 마르세유

오세르와의 계약이 만료되자 이적 시장에 나온 탈유망주급 선수를 잡기 위해 프랑스 굴지의 클럽 올랭피크 마르세유가 나섰고 마침내 계약서에 사인을 하는 데 성공하지만 베르나르 타피 당시 마르세유 회장은 훗날 "계약서에 사인을 하고 헤어진 후 나는 내가 실수했다는 것을 깨달았다"라며 땅을 쳤다. 실력이야 말할 필요도 없으나 누구도 종잡을 수 없는 성깔머리가 시도 때도 없이 뛰쳐나왔기에 그야말로 골치덩어리 그 자체였다.

지랄맞은 성질머리로 인해 당시 자신을 호출하지 않은 프랑스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에게 서슴없이 육두문자를 날리는 바람에 1년 대표팀 경기 출장 정지라는 중징계를 먹는다거나, 경기 중에 판정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유니폼 벗어 던지고 뛰쳐나가 3일간 행방불명되는 등 마리오 발로텔리도 깝치지 못할 정도의 망나니짓을 일상다반사로 해댔으니 누구도 그를 걷잡을 수 없었기에 팀에서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이리저리 임대나 다니는 신세로 전락하는 것은 필연이었다.

결국 쫓겨나듯이 팔려간 님 올림피크 에서도 판정에 빡친 나머지 심판에게 장렬한 축구공 어택을 날려버린 사건으로 프랑스 축협은 거의 그를 매장시킬 분위기까지 치달았고, 칸토나 역시 축구 더러워서 못해먹겠다며 은퇴를 결심한다.[3] 축구공 어택 영상

2.3. 리즈 유나이티드 FC

그 탁월한 재능이 같은 성격 때문에 피지도 못할 것이 안타까워 미셸 플라티니가 직접 나서서 에릭 칸토나에게 프랑스를 떠나 잉글랜드에 진출해보는 것이 어떻겠냐는 조언을 해준다. 그래도 축구에 대한 열정은 남아있던 것인지 칸토나는 선뜻 잉글랜드 행 비행기에 올랐고, 축구 종가에서의 그의 첫 도착지는 리즈 유나이티드였다. 그래도 실력은 어디 가지 않았기에, 리즈 유나이티드에서도 칸토나는 나쁘지 않은 활약을 선보여서 팀의 1부 리그 우승에 도움을 주었고, 리버풀과의 채리티 실드에서는 해트트릭을 질러주는 등 그 재능을 잉글랜드에 알렸다. 그리고 리즈 유나이티드는 진짜로 리즈 시절을 맞이했다. 칸토나의 이적 후 첫 시즌이었던 1991-92 시즌 리즈 유나이티드는 1부 리그에서 우승을 했던 것이다.[4]

허나 또 그 놈의 성미가 문제가 되어 하워드 윌킨슨 당시 감독과 대판 싸우게 되었고, "이 놈을 어떻게 제거하나?" 하고 골치를 썩이던 하워드 윌킨슨 감독은 알렉스 퍼거슨과의 전화 통화로 칸토나를 "120만 파운드"라는 헐값에 팔아넘긴다. 이때 리즈 유나이티드의 팬들은 뛰어난 선수였던 칸토나를 파는 것에 반대하는 분위기였다.

2.4.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지난 시즌 리즈에게 리그 1위를 넘겨준 맨유는 칸토나의 합류와 동시에 리그 1위 자리를 빼앗았고, 그다음 시즌에는 FA컵까지 동시에 재패하는 시즌 더블을 기록함과 동시에 칸토나는 팀 내 최다골을 기록해 주었다. 그러한 활약이 너무도 뛰어났기에 1994년 PFA 올해의 선수 수상은 당연히 칸토나의 몫이었다. 신기하게도 당시까지 별다른 기행은 없었고, 이는 지금도 확연히 드러나는 퍼거슨 감독의 선수 장악력이 아주 제대로 먹혔다는 해석이 지배적이었으며 거기에 1993년에는 발롱도르 3위를 기록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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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아주 없던 건 아니고 가끔 이런 짓도 했다. 사실, 저렇게 백태클을 걸어대면 칸토나가 아니어도 누구든지 빡치는 것이 당연하니 대놓고 복수한 것이었다.[5][6]

하지만, 이후 칸토나는 그 동안의 폭력 사건을 잊게 할 정도의 초대형 사고를 터뜨린다.

2.4.1. 쿵푸 킥 사건

1995년 1월 25일, 당시 맨유는 선두 블랙번에게 승점 2점이 뒤져있던 상태였다. 그렇기에 우승 경쟁을 위해선 다음 상대였던 크리스탈 팰리스는 무조건 잡아야 했다. 하지만 이 경기에서 후반 3분경, 칸토나는 리차드 쇼에게 주먹감자를 날리며 레드카드를 받았다. 칸토나는 억울하다는 표정을 짓다가 이내 천천히 벤치로 향하던 중, 당시 건강악화로 인해 병상에 누워있던 자신의 어머니를 향해 패드립을 한 상대팀 서포터 매슈 시먼스(당시 20세)를 향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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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더 킥 한 방을 먹였다.

이것이 지금도 간간이 회자되는 쿵푸 킥 사건이었다. 발차기를 날린 직후에도 넘어지면서 발길질을 더 했으며, 정권지르기까지 추가타로 더 먹였다. 결국 칸토나는 9개월 출장 정지라는 중징계를 먹었다.
이 사건 직후의 기자회견에서 " 갈매기가 고깃배를 따라가는 이유는 어부들이 정어리를 바다에 버릴 것을 알기 때문이다"라는 어록을 남기기도 했다.[7] 원인이 있으면 결과도 있다는 요지 혹은 가십거리를 찾아다니는 기자들에 대한 풍자로 볼 수 있겠지만 그런 멘트를 저런 자리에서 말했다는 것이 칸토나답다고 볼 수 있다.

축구 선수가 하필이면 발차기로 팬을 가격한 너무나도 위험한 사건이었기에[8] 여론은 "9개월로는 부족하다. 아예 축구를 못하게 막아버려라"라는 지경까지 치닫았는데, 알렉스 퍼거슨이 직접 나서서 칸토나를 두둔해주었다. 사실 이 때는 퍼거슨도 칸토나를 포기하려고 했으나,[9] 아내 캐시의 만류로 생각을 바꾸어 그를 남기기로 했던 것이다. 멘탈이 글러먹었거나, 팀 전술에 도움이 되지 않는 선수를 가차없이 내치는 퍼거슨 감독이 직접 총대를 메기까지 하는 모습을 보이자 은퇴를 시사하던 칸토나도 무언가를 느꼈는지, 9개월의 공백기 동안 인터 밀란이 적극적으로 칸토나를 영입하려 애썼음에도 이 때 칸토나는 그 유명한 “나는 맨체스터에 뼈를 묻겠다”라는 한 마디만을 남겨 사람들을 놀라게 했고 이적을 거부했으며, 정말로 맨유에서 은퇴를 했다.

칸토나는 그 후 인터뷰에서 쿵푸 킥 사건은 나의 커리어에서 가장 즐거운 순간이었다고 자평하면서, 축구장에 있어서는 안 될 놈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망설임 없이 걷어찬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기자가 "다른 선수들에게도 그런 식으로 행동하라고 추천하겠냐?"고 물어봤을 때는 손사래를 쳤다.[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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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에 촬영된 시먼스. 아직도 버릇을 못 고쳤는지 자신의 아들이 뛰는 축구팀의 감독에게 아들을 기용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난입해서 고래고래 쌍욕을 하다 연행까지 당했고 불구속 기소되었다. 그래서 그 건으로 재판에 출석하고 있는 모습이다.

당연하겠지만 칸토나에게 쿵푸 킥을 맞은 시먼스도 문제가 큰데[11] 시먼스는 이 당시에 자신을 걷어찬 칸토나에게 맞대응을 하려다, 되레 칸토나에게 주먹질로 추가 폭행을 당했다고 한다. 2007년 포포투 지가 축구사 유명한 사건의 중심 인물들을 취재하면서 그를 취재했을 때 그도 평생 축구 경기장 출입 금지 처벌을 받았다고 한다. 왜 출입 금지 처분을 받았냐 하면, 칸토나에게 "Fu*k off back to France, you French motherfu*ker" 라고 욕을 했기 때문이다. 12년이 지난 당시에도 칸토나에 대해 안 좋게 평하기도 했다.

물론 시먼스도 답이 없는 수준인 건 자명하나 사건의 심각성으로 인해 퍼거슨은 십년이 더 넘은 뒤에도, 정확히는 감독 은퇴 뒤에도 텔레비전 인터뷰에서 이 일이 언급되자 한숨을 푹 쉬고 등을 뒤로 젖혔다. 강철 같은 퍼거슨의 멘탈을 으깨버리다 못해 트라우마를 주는 위업을 달성한 셈이다.[12][13]

2.4.2. 이후의 경력

칸토나가 빠진 1994-95 시즌의 9개월 동안 맨유는 결국 리그 우승을 블랙번에게 빼앗기고, FA컵 우승은 에버튼에게 빼앗기는 등 한끗발 약한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칸토나가 복귀하자마자 다시금 시즌 더블을 기록한다.[14] 이 95-96 시즌은 칸토나가 쿵푸 킥 사건의 징계로 초반 10경기를 결장한 상태로 시작해야 했는데, 지난 시즌 데뷔한 폴 스콜스[15] 칸토나의 공백을 잘 메워주기는 했지만 그래도 1위 뉴캐슬과 승점이 10점 이상 차이가 난 채로 1996년을 맞았는데, 이 무렵부터 칸토나가 박빙 상황이나 불리한 상황에서 결승골, 동점골을 연속으로 기록하며 무승부를 승리로, 패배를 무승부로 바꾸는 대활약을 했다. 특히 뉴캐슬 원정에서의 결승골은 뉴캐슬 입장에서는 치명적이었고, 퍼거슨 감독의 언론플레이에 말린 뉴캐슬은 후반기에 처참한 성적을 기록, 결국 맨유는 극적인 역전 우승을 달성했다. 그 후 리버풀과의 FA컵 결승전에서도 결승골을 기록했다.

1996-97 시즌에는 맨유 최초의 비영국인 주장이 되었다. 이 시즌에는 출장징계가 한번도 없었던 시즌이었지만, 공격형 미드필더같이 뛰면서도 예전보다는 떨어진 기량을 보였다. 그래도 칸토나와 맨유는 리그 우승을 차지하는데 성공했지만, UEFA 챔피언스 리그에서 4강에 진출했음에도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에게 홈, 원정 모두 패배하면서 결승 진출에는 실패해서 아쉬움을 남겼다.

3. 은퇴

나는 팬들이 나의 이름을 연호하는 노랫소리가 자랑스러웠다. 하지만, 내일 그 소리가 멈출까 봐 두려웠다.
그런데 1997년 5월 11일. 칸토나는 느닷없이 은퇴를 선언한다. 당시 그의 나이는 겨우 만 30세였다. 결코 많지 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돌연 은퇴를 했다. 별다른 이유도 없었다. 정상에서 멈추고 싶다라는 이유였다. 거창한 기자회견이나 은퇴식을 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구단 홈페이지에 짧은 글귀만을 남겨놨을 뿐이었다. 그렇게 올드 트래포드의 왕은 왕관을 벗고 왕좌에서 내려왔다. 웬만한 개인상과 우승 트로피를 거의 다 들어봤으니 미련도 없던 모양이다.[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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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확히는 부모님이 카탈루냐계 사르데냐인으로서 마르세유로 이민을 간 경우에 해당한다. 부모님은 카탈루냐 분리독립을 지지하는 편이었다고 한다. [2] 정조국이 뛰었었던 팀이다. [3] 이 과정을 보면 더 쩌는 게, 축협 측에서 먼저 "1개월 출장정지"를 먹이자 칸토나는 "X나 고맙습니다. 얼간이들아."라는 조소의 감사인사로 응수하며 맞불을 놓았고, 반성도 안하고 되레 조롱한 칸토나에게 축협은 다시 "3개월 출장정지"를 내렸다. [4] 플라티니는 최초 리버풀 FC에 칸토나를 받아달라 요청했으나 리버풀 측에서는 폭탄 끌어안기 싫다며 거절, 또다른 팀인 셰필드 웬즈데이는 "땡기면 오라"라는 입장이었으나 "입단테스트 후 결정"이라는 조건을 내밀었기에 겨우 웬즈데이 정도의 팀이 자신에게 그런 요구를 할 수는 없다는 생각에 거부했다고 포포투와의 인터뷰에서 밝힌바 있다. [5] 걸려 넘어진 선수는 당시 노리치의 헤니 슐츠였다. [6] 참조하자면 지금의 룰 대로 적용할 시, 백태클을 건 선수는 최소 옐로카드 부터 공격상황의 치명적 정도에 따라 레드카드를 받지만, '보복행위'에 해당하는 칸토나의 발차기는 즉결 레드카드 처분에 향후 징계까지도 가능한 수위다. [7] 후에 이 영상은 프랑스인들의 이상한 면을 보여주는 짤로 더 그랜드 투어 시즌 4 4화에서 다시 소개되었다. [8] 축구화 스터드는 상당히 위험한 흉기 중 하나다. [9] 칸토나는 에고가 매우 강한 선수라 퍼거슨이 헤어드라이어를 안 하는 선수였는데, 이 사건이 터지자 죽일 기세로 헤어드라이어를 날렸다고 한다. [10] # [11] 애초에 맞을 수 있을 만큼 가까이 있는 선수를 보고, 아픈 어머니를 욕하는 자가 정상일 리는 없다. [12] 물론, 그 일에 있어서 자기 자신에 대한 평가는 좋게 하는 칸토나도 다른 선수들에게는 그런 행동을 하지 않기를 바라는 것으로 보아, 그 역시도 이 일에 대해서 다시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것 같다. [13] 사실 시먼스가 무개념인 것과 별개로 프로스포츠에서 관중 폭행은 절대 있어선 안되는 행위이다. 프로스포츠는 이를 소비하는 관중들이 있음으로서 존재할 수 있는 것인데, 이들이 일반인보다 훨씬 크고 강한 운동선수들에게 언제든지 폭행당할 수 있다면 프로스포츠 리그의 존재 자체가 위협받기 때문이다. 팬들이 마음대로 행동해도 된다는 뜻이 아니라, 선수가 이런 무개념 팬들에게 부당한 일을 당했다면 구단과 보안요원들에게 알려 법적 처벌 및 경기장 출입금지 등 적법한 절차를 밟아야지, 본인이 몸소 나서서 폭력 등의 과격한 행위로 직접 맞서며 해결하려 들어선 안된다는 뜻이다. 법치국가에서 사적제재가 범죄인 것과 마찬가지다. [14] 공교롭게도, 에릭 칸토나가 부재했던 이 시즌이 블랙번 로버스의 마지막 우승이었다. 당시 블랙번의 핵심 선수는 그 유명한 앨런 시어러와 크리스 서튼이었다. [15] 이 시기에 스콜스는 스트라이커였다. [16] 다만,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3년만 더 뛰고 국대를 은퇴하지 않았더라면 프랑스의 첫 월드컵 우승과 프랑스의 두번째 유로 우승 그리고 그 유명한 맨유가 달성한 트레블의 일원이 되어 빅 이어도 들어봤을 것이라는게 팬들이 아쉬워하는 점. 근데 재밌게도 캄 노우의 기적에서 챔스 우승에 가장 큰 공헌을 한 선수가 테디 셰링엄으로 교체선수로 들어와 동점골을 넣음과 역전골까지 어시스트했는데 칸토나의 대체자로 영입된게 셰링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