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엄승도(嚴承道) |
생몰 | 1897년 2월 24일 ~ ? |
출생지 | 평안북도 선천군 군산면 장공리 |
사망지 | 미상 |
추서 | 건국훈장 애국장 |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201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엄승도는 1897년 2월 24일 평안북도 선천군 군산면 장공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20년 2월경 선천군에서 박병익(朴炳翼)의 주도로 조직된 독립청년단에 가입하여 통신부장에 선임되었다. 이후 선천군내 각지에서 독립청년단의 취질르 설명하고 독립운동자금 모집을 권유해 단원 수십명을 규합하고 독립자금 1,200원을 모집하는 데 성공했다. 또한 통신부장으로서 단장 박병익이 보낸 독립운동에 관한 편지를 태산면 원봉동에 사는 박인항에게 전달했으며, 선천군 내 태산면, 남면, 군산면 등에 <독립신문>을 배부하기로 하고 창옥(桂昌玉)ㆍ전용석(田龍錫)ㆍ김봉제(金鳳濟) 등에게 신문을 배포하였다.1920년 3월 14일, 엄승도는 동지 허승호(許承浩)의 부탁으로 박인항의 집에 <독립신문>을 배포했다. 이후 만주에서 들어온 독립단원 백운한(白雲翰), 유영춘(劉永春). 황모(黃某) 등은 박인항의 집을 방문하여 군자금을 요구하였다. 이때 박인항의 형 박인혁(朴仁赫)은 군자금을 제공할 경우 친일파인 면장이 곧바로 알게 될 것을 우려하였다. 이에 면장을 처단하면 독립운동자금 모집이 수월할 것으로 판단하고, 박인항ㆍ 박규명ㆍ 박만옥ㆍ백운한 등과 함께 면장을 처단하기로 협의하였다.
다음날인 3월 15일 아침, 엄승도는 백운한 등 3인을 태산면사무소로 안내했다. 백운한은 태산면장 김병준과 서기 김은기(金殷基)를 불러내, 1919년 3.1운동 당시 독립운동을 방해하는 등 친일 행위를 한 면장을 질책한 후 군자금을 요구하였다. 그리고 공금 749원을 건네받은 뒤 김병준을 권총으로 처단하였다. 이어서 백운한 등은 박인혁으로부터 군자금 1천 원을 모집하여 만주로 돌아갔다. 경찰은 곧바로 수사를 시작했고, 박인항, 박규명, 박만옥 등은 상하이로 피신했지만 엄승도는 미처 피신하지 못한 채 동지들과 함께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후 1921년 3월 11일ㅇ 평양지방법원 신의주지청에서 제령 제7호 위반 및 살인교사 혐의로 징역 15년을 선고받고 공소했지만, 그해 6월 15일 평양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 다시 고등법원에 상고했지만 기각되어 함흥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 1929년 5월 18일 출옥했다. 이후의 행적 및 사망년도, 사망지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6년 엄승도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