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梁山 彌陀庵 石造阿彌陀如來立像. 경상남도 양산시 주진로 379-61(소주동)에 위치한 신라의 고찰 미타암의 천연석굴 내에 안치되어 있는 8세기 전반 통일신라 시기의 석불 입상. 현재 대한민국 보물 제998호로 지정되어 있다.2. 내용
사진 출처 : 답사여행의 길잡이 14 - 경남 : 미타암 석조아미타불입상
높이 2.05m
경상남도 양산시 미타암에 소장되어 있는 8세기 전반 경의 신라시대 석불로, 신라의 고승 원효대사(元曉大師, 617~686)가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미타암의 입구에서 9m 정도 들어간 석굴 속에 안치되어 있다. 이 석굴은 원래 수성암으로 이루어진 자연 동굴이었지만, 신라시대에 원효가 대규모 공사를 통해 인공적인 사찰의 모습으로 만들어놓았다.
양산 미타암 석조아미타여래입상은 수인의 형태를 비롯하여 전체적인 모습에서 719년에 조성된 경주 감산사 석조아미타여래입상(국보 제82호)과 유사한 형식을 띠고 있어, 거의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지만 화염문 등 장식문의 형식화와 광배 테두리의 이중 돌대, U자형 옷주름에서 보이는 가운데가 끊어진 주름, 대좌의 보상화문 등은 신라의 천년수도 경주시에서 제작된 불상의 양식과는 다른, 양산시 만의 독특한 지역적 특색을 가지고 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이 미타암은 신라시대 당시에는 포천산(布川山) 석굴이라 불렸음을 확인할 수 있다. 삼국유사 권5 ‘포천산 오비구’(「포천산오비구경덕왕대조」)조에 보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경덕왕(재위 742~764) 때이다. 삽량주(지금의 양산)에서 동북쪽으로 20리쯤 떨어진 곳에 포천산(布川山)이 있고, 거기에는 완연하게 사람이 쪼아 만든 듯한 기이한 석굴이 있다. 여기에 이름조차 알 수 없는 비구 다섯 사람이 와서 살면서
아미타불을 부르고 서방 극락세계에 왕생할 것을 기도한 지 수십 년 만에 갑자기 성중(聖衆)이 서방 극락으로부터 와서 그들을 맞이하여 갔다. 이에 다섯 비구는 제각기 연화대에 앉아 하늘을 날아가다가
통도사 문 밖에 이르러 머무르게 되었는데, 하늘의 음악이 간간이 들려왔다. 절의 중들이 나와서 보니, 다섯 비구는 무상고공(無常苦空)의 이치를 설명하고 유해를 벗어버리고 큰 광명을 쏘면서 서쪽으로 가버렸다. 그들이 유해를 버리고 간 곳에다 절의 중이 정사를 짓고 이름을 ‘치루’라고 하였는데, 지금도 남아 있다.
삼국유사 포천산 오비구 경덕왕대(布川山 五比丘 景德王代)
삼국유사 포천산 오비구 경덕왕대(布川山 五比丘 景德王代)
이 석불은 8세기 전반 신라인들의 석굴 사원 조영의 한 단면을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인 동시에, 경남 양산시의 지역 불교사 연구에 있어 중요한 자료이다. 이에 1989년 4월 10일 대한민국 보물로 지정되었다.
3. 외부 링크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양산 미타암 석조아미타여래입상
- 두산백과 : 양산 미타암 석아미타불입상
- 향토문화전자대전 : 양산 미타암 석조아미타여래입상
- 한국어 위키백과 : 양산 미타암 석조아미타여래입상
- 답사여행의 길잡이 14 - 경남 : 미타암 석조아미타불입상
4. 보물 제998호
원효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미타암(彌陀岩)의 석굴사원 안에 모셔져 있다.
머리에 있는 상투 모양의 큼직한 머리(육계)와 어깨까지 내려온 긴 귀, 원만하면서도 우아한 인상, 왼손을 몸에 붙여 곧바로 내리고 오른손을 가슴에 댄 모습, 그리고 둥근 어깨와 평판적인 가슴, 대좌 위에 곧바로 선 자세 등에서 719년에 만들어진 경주 감산사 석조아미타여래입상(국보 제82호)의 양식을 이어받은 것임을 알 수 있다.
부드러운 주름을 형성하며 온 몸을 감싸고 있는 옷은 U자형의 옷주름을 이루면서 흘러내려 발목에서 좌우 대칭을 이루고 있다. 부처의 몸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한 광배(光背)는 끝이 뾰족한 배(舟) 모양으로 안에 2줄의 굵은 선으로 머리광배와 몸광배를 구분하였다. 그 사이에는 좌우대칭으로 꽃무늬를 배치하였으며 가장자리에는 불꽃무늬를 새겨 넣었다. 대좌는 얇게 파낸 눈모양의 안상(眼象)이 새겨져 있는 사각형의 대석(臺石)위에 꽃무늬가 새겨진 이중의 연화좌(蓮華座)를 올려 놓고 있다.
광배와 대좌, 옷주름의 양식과 수법이 경주 감산사 석조아미타여래입상(국보 제82호)과 유사한 점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작품으로 추정된다. 이 불상은 『삼국유사』에 기록된 서방 극락세계로 날아간 다섯 비구(比丘)가 수도하던 석굴에 모셔진 것이다. 또한 미타암이 자연동굴이지만 인공을 가한 흔적이 뚜렷하여 8세기 통일신라 불상양식의 한 계보를 살펴 볼 수 있다.
신라 아미타사상의 전개과정은 물론 당시 성행하던 석굴사원 조영의 한 단면을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머리에 있는 상투 모양의 큼직한 머리(육계)와 어깨까지 내려온 긴 귀, 원만하면서도 우아한 인상, 왼손을 몸에 붙여 곧바로 내리고 오른손을 가슴에 댄 모습, 그리고 둥근 어깨와 평판적인 가슴, 대좌 위에 곧바로 선 자세 등에서 719년에 만들어진 경주 감산사 석조아미타여래입상(국보 제82호)의 양식을 이어받은 것임을 알 수 있다.
부드러운 주름을 형성하며 온 몸을 감싸고 있는 옷은 U자형의 옷주름을 이루면서 흘러내려 발목에서 좌우 대칭을 이루고 있다. 부처의 몸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한 광배(光背)는 끝이 뾰족한 배(舟) 모양으로 안에 2줄의 굵은 선으로 머리광배와 몸광배를 구분하였다. 그 사이에는 좌우대칭으로 꽃무늬를 배치하였으며 가장자리에는 불꽃무늬를 새겨 넣었다. 대좌는 얇게 파낸 눈모양의 안상(眼象)이 새겨져 있는 사각형의 대석(臺石)위에 꽃무늬가 새겨진 이중의 연화좌(蓮華座)를 올려 놓고 있다.
광배와 대좌, 옷주름의 양식과 수법이 경주 감산사 석조아미타여래입상(국보 제82호)과 유사한 점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작품으로 추정된다. 이 불상은 『삼국유사』에 기록된 서방 극락세계로 날아간 다섯 비구(比丘)가 수도하던 석굴에 모셔진 것이다. 또한 미타암이 자연동굴이지만 인공을 가한 흔적이 뚜렷하여 8세기 통일신라 불상양식의 한 계보를 살펴 볼 수 있다.
신라 아미타사상의 전개과정은 물론 당시 성행하던 석굴사원 조영의 한 단면을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작품으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