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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안드리 셰브첸코의 클럽 경력을 소개하는 문서.2. FC 디나모 키이우
셰브첸코는 1993년 디나모 키이우에 입단한다. 1990년대에 그의 소속팀인 디나모 키이우 비롯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클럽들은 선수들을 K리그로 이적시켜 이득을 얻고 있었기 때문에 셰브첸코 역시 K리그로 이적시키려고 했으나 18살 유망주에 불과했던 그를 받아주는 팀은 없었다. 만약 이때 셰브첸코가 K리그 팀으로 이적했다면 본인의 커리어는 물론이고 밀란의 역사가 꽤나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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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브첸코는 자국 리그의 명문 구단인 디나모 키이우의 리그 5연패 및 1998-99 시즌 UEFA 챔피언스 리그 4강의 주역으로 유럽무대에 그 이름을 알렸다. 특히 컬쳐쇼크급 활약을 보여줬던 경기는 1997-98시즌 UEFA 챔피언스 리그 조별리그 바르셀로나 전으로 1997년 11월 5일 홈에서 3-0으로, 원정 캄 노우에서는 4-0으로 바르셀로나를 떡실신시켜버린 사건인데, 캄 노우 원정에서 전반전 해트트릭이라는 폭탄을 터트려 전 유럽을 경악케 만들었다.[1][2]
하지만, 8강전에서는 키이우가 홈에서 유벤투스에게 1:4로 참패하며 탈락했는데, 여기서 거꾸로 키이우 홈에서 유벤투스 소속이던 필리포 인자기가 해트트릭을 터뜨렸고 셰브첸코는 유벤투스 전에서 골을 넣지 못했다.
1998-99 시즌, 챔스 조별리그에서 만난 아스날을 상대로 프리킥 결승골을 터트려 팀을 8강에 올려놓았고 8강에서 만난 레알 마드리드를 상대로는 1차전 1골, 2차전 2골을 기록하며 팀을 챔스 4강으로 이끌었다.
4강에서 만난 바이에른 뮌헨을 상대로도 2골을 기록했지만, 팀의 열세로 3-3 무승부로 1차전을 마쳐야했다. 이어진 2차전에서는 1-0으로 아쉬운 패배를 당해 탈락의 고배를 마신다. 이 시즌 그는 챔피언스리그 득점왕(8골)을 차지했고 UEFA 올해의 공격수로 선정되었다.
3. AC 밀란
자세한 내용은 안드리 셰브첸코/클럽 경력/AC 밀란 문서 참고하십시오.4. 첼시 FC
첼시 구단주인 로만은 셰브첸코를 영입하는 것에 강한 욕심을 드러냈고, 약 500억 정도로 추산되는 거액의 이적료와 셰브첸코의 아내를 통한 설득을 통해 결국 영입에 성공하였다.그의 아내는 모델이었는데 미국 출신이다. 무슨 소린가 하면, 남편의 직장인 이탈리아에서 아내는 아이들과 영어로 대화하며 일상 생활을 한다. 그 와중에 영국 첼시의 구단주인 로만이 손을 뻗혀 왔으니 애 아빠가 어쩌겠는가? 물론 영국식 영어와 미국식 영어는 조금 다르긴 하지만 그래도 영어조차도 통하지 않는 이탈리아보다는 아내와 자녀들 입장에선 영국이 생활하기엔 수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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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경기 22골 10도움
이런 과정 뒤에 첼시로 와서 리버풀과 커뮤니티 실드 경기를 치렀다. 오자마자 첫 경기에서 골을 득점한 그는 역시 셰브첸코라는 말을 들었으나, 부상을 겪으며 컨디션이 떨어졌고, 같은 자리 경쟁자인 디디에 드록바가 정상급 퍼포먼스를 보이며 선전했다.[3]
드록바는 당연히 기대를 받으며 확고한 주전 자리를 지켜나갔고, 셰브첸코는 연거푸 부진과 부상을 오가며 벤치를 달궜다. (2006-07~2007-08 시즌: 리그 47경기 9골)
리그 보다 중요도가 낮은 FA컵에 등장해 골을 넣자 일부 팬들은 ‘컵첸코’라 놀리기도 했다. 이때부터 그의 이름 앞에 ‘N첸코’가 붙기 시작한다.[4] 심지어 둥팡줘에 빗대어 ‘동팡첸코’라는 굴욕적인 별명까지 붙었다.
특히나 2007년 2월 존 테리에게 응급처치[5]를 취했는데 이것이 매우 적절한 행동이라 ‘메딕첸코’, ‘셰브란스’로도 불렸다. 이러한 조치로 존 테리는 목숨을 건질 수 있었는데, 후일 사람들은 세브첸코의 가장 큰 업적으로 이것을 꼽기도 했다.[6]
여담으로 이 부진한 기간 동안에도 국대에서는 유럽의 강호들을 상대로도 준수한 경기력과 더불어 우수한 득점력을 선보였다. 대표적으로 잉글랜드나 프랑스와의 유럽 지역 예선. 그래서 ‘애국첸코’라는 별명도 있었다.
이후 그는 AC 밀란으로 임대 복귀했으나 임대기간 1년 동안 리그, 컵 경기 모두 합쳐 26경기 2골 1도움이라는 초라한 성적. 결국 이기고 있는 상황에서의 시간 때우기용 교체선수로 전락했다. 임대 만료 후 첼시로 복귀했지만 그에게 더이상의 기회는 없었다.
첼시에서의 실패 요인으로 많은 근거가 언급되는데, 일단 신체적 한계가 찾아온 것과 리그 템포 차이가 결정적으로 꼽힌다. 이미 2000년대 초반 부상으로 신체적인 힘이 크게 떨어진데다 그게 첼시로 이적할 당시 나이는 30세에 가까웠다. 지금이야 관리가 잘되고 하니 선수 수명이 길지만 200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30대에 들어선 선수들은 전부 내리막을 탔다.[7] 거기다 드록바가 그보다 겨우 1살 남짓 어림에도 밀릴 정도로 피지컬이 급격히 내려오고 있었다. 거기에 로만 아브라모비치 구단주 VS 무리뉴 감독 간 갈등의 소용돌이도 한몫했다.
2006/07 시즌: 51경기(선발 41경기) 14골 9도움
대회 | 경기 | 선발 | 교체 | 득점 | 도움 |
프리미어 리그 | 30 | 22 | 8 | 4 | 6 |
챔피언스 리그 | 10 | 9 | 1 | 3 | 1 |
FA컵 | 6 | 5 | 1 | 3 | 2 |
EFL컵 | 4 | 4 | 0 | 3 | 0 |
커뮤니티 실드 | 1 | 1 | 0 | 1 | 0 |
합계 | 51 | 41 | 10 | 14 | 9 |
2007/08 시즌: 25경기(선발 12경기) 8골 1도움
대회 | 경기 | 선발 | 교체 | 득점 | 도움 |
프리미어 리그 | 17 | 8 | 9 | 5 | 1 |
챔피언스 리그 | 5 | 2 | 3 | 1 | 0 |
FA컵 | 1 | 0 | 1 | 0 | 0 |
EFL컵 | 2 | 2 | 0 | 2 | 0 |
합계 | 25 | 12 | 13 | 8 | 1 |
5. 디나모 키이우 2기
2009년 8월 말 결국 자신이 선수생활을 시작했던 디나모 키이우와 2년 계약을 맺고 이적하였고, 2010-11 시즌 종료 후 1년 계약을 연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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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그에서는 55경기 23골을 기록하며 고국에서 유종의 미를 거두었다. 유럽 대항전에서는 2010-11 시즌 12경기 5골로 좋은 활약을 보였고, 특히 2011년 3월 맨시티와의 UEFA 유로파 리그 16강 1차전 홈경기에서 좋은 활약을 보이며 득점을 기록하자 부활이니 제2의 전성기라느니 등의 설레발이 있었다. 하지만 2011-12 시즌 5경기 무득점에 그쳐 사람들로 하여금 안타까운 마음을 감추지 못하게 했다. 결국 유로 2012가 끝나고 며칠 후 2012년 7월 29일 은퇴를 선언했다.
[1]
축구잡지 포포투의 인터뷰에 의하면 경기 전에 해트트릭을 하면 친구가 저녁을 사겠다는 약속을 했다는데, 정말로 악착같이 해트트릭을 하고 거하게 얻어먹었다고 한다. 시즌 중에 카니발에 놀러가고 싶어서
엘 클라시코에서 해트트릭을 한
호마리우가 연상되는 일화.
[2]
그 뒤 캄 노우에서 해트트릭을 넣은 선수는 한 동안 없었다가, 2021년 2월 17일, 2020-21 시즌 UEFA 챔피언스 리그 16강 1차전에서
킬리안 음바페가 23년 4개월만에 해트트릭을 터뜨리며
파리 생제르맹의 4:1 역전승을 이끌었다.
[3]
사실 당시에는 그야말로 유럽을 호령하는 최고의 스트라이커 중 한 명이었던 셰브첸코가 다이버 별명을 얻으며 뽀록바로 조롱받던 드록바보다 나은 활약을 보일 것이라는 예상이 지배적이었다.
[4]
예를들어 칼링컵에서 돌풍을 일으킨 4부 리그 위컴과의 준결승에서 골을 넣자 ‘칼링첸코’, ‘4부첸코’라는 별명이 붙었다.
[5]
기절한 상태에서 혀가 말려 넘어가 기도를 막지 않게 혀를 잡아주는 방식
[6]
이 사례가
위기탈출 넘버원에 방영됐었다.
해당 회차
[7]
반례도 있기는 하다. 30줄에 첼시로 왔지만 첼시 최고의 레전드가 된
지안프랑코 졸라가 대표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