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명군이 되어보세!의 2부 등장인물.원 역사 아이신기오로 누르하치의 차남인 아이신기오로 다이샨이다. 원 역사에서 누르하치가 사용한 연호인 천명(天命)을 여기서는 다이샨이 청나라 황제로 칭제건원했을 때 사용하여 천명제 자리는 다이샨에게 넘어갔다.[1]
원 역사에서는 아이신기오로 누르하치가 후금을 건국하며 천명제가 되었지만, 본작의 누르하치는 명나라 만력제에게 정식으로 건주왕에 책봉되었고 명나라가 멸망할 때까지는 형식적으로 명나라에 칭신하고 있었기에 천명제의 이름은 다이샨에게 넘어갔다.
2. 작중 행적
누르하치가 다이샨을 조선에 정략결혼시키는 구상을 하던 중 재석이 아들 한 명을 볼모로 보내라고 하길래 조선에 볼모로 보내졌다. 평안도 억양이긴 하나 조선어도 잘 구사하며, 을미동정 때 족친위의 일원으로 참전도 한다. 조선식 이름은 김대선. 재석은 미래를 위해 그를 사위로 삼고 추후 누르하치의 후계자로 삼아 건주위에 영향력을 행사할 계획으로 상희와의 사이에서 낳은 희정옹주와 혼인시킨다.조선에 머무는 동안 세자를 비롯한 종친들과 친한 사이가 되었고, 세자와는 '요동을 조선에게 넘긴다면 건주위가 화북을 차지하도록 돕겠다.'는 밀약을 맺고 희정옹주와 함께 건주위로 돌아간다. 건주위에 돌아가자마자 누르하지가 마련해둔 만주족 여성 3명을 계복진으로 들였는데,[2] 이에 재석이 항의하자 옹주를 '가장 좋은 활과 말처럼 아끼겠다'고 해서 재석을 벙찌게 만들었다.
희정옹주를 제일 아끼는 아내인 것은 진심이었는지 조선이 명이 건주를 정벌하는데 군사를 내서 분위기가 험악해진 와중에도 아내를 최대한 보호해서 무사히 출산할 수 있게 해준 것을 보면 진심으로 아내를 사랑한 것으로 보인다. 그럴 만도 한 게 다이샨이 원 역사와 달리 분할 상속이라도 물려받아서 황제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희정옹주 덕분이다. 당시 다이샨은 말이 적자지 어머니가 죽고 몽골 귀족의 아들인 이복동생 홍타이지에게 밀려난 데다 별 세력도 구축하지 못한 아웃사이더라서 인질로 방출된 인물이라, 다이샨이 조선 왕녀와 결혼해 조선 왕실을 뒷배로 두고 귀국하지 않았으면 돌아오자마자 숙부나 친형처럼 숙청당했을 입장이었다.[3]
혈통을 절대적으로 중시하는 유목 사회에서 조선의 왕녀와 결혼한다는 것은 엄청난 입지와 상징성을 줄 수 있었고, 이를 기반으로 자신의 세력을 구축하는데 성공해서 반분이나마 왕위를 물려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를 경계한 홍타이지가 원 역사에서 보르지기트씨 부인을 다섯이나 둔 데 반해[4] 본작에서는 자신도 조선 왕녀를 달라고 재석에게 요청해서 희정옹주의 친동생인 희연옹주와 혼인하고 이를 위해 다른 처첩을 들이는 것도 포기했을 정도였다.[5] 거기다 희정옹주는 설정상 미녀이기도 하니 다이샨의 입장에서는 '고귀하고 아름다운 왕녀님'인 희정옹주를 총애할 수밖에 없다.
한동안은 조선의 빽을 바탕으로 전공이 훨씬 많은 형 추옌과 차기 건주 국왕 자리를 놓고 경쟁했으나 사르후 전투에서 추옌이 사망하고 본인은 큰 공을 세우면서 대패륵이 되고 가장 유력한 차기 건주왕 후보가 된다. 전투에서는 조선의 편곤을 사용하고 싸우는데 조선에서 배운 군략을 활용하는 등 조선에서 강한 인상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2부와 3부 사이 외전에서 밝혀진 바에 따르면 누르하치 사후 누르하치의 뒤를 이어 건주왕이 되었다. 이후 정황을 보아 원래 누르하치는 홍타이지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싶었으나 다이샨과 왕세자의 밀약은 '왕세자가 즉위할 때'를 전제로 한 것이라 우선 다이샨을 건주왕으로 삼고, 나중에 명나라가 멸망한 뒤에 둘이 분할 상속하도록 조치한 것으로 추측된다.
1630년 명나라가 반란군으로 고생하고 있을 때 명나라의 원군 요청을 무시하고 고영상이 태창제를 살해하고 명을 멸망시킨 뒤에야 근황을 명분으로 화북의 고영상 반군을 공격하여 2년에 걸쳐 화북을 장악하고, 천하를 통일하여 명의 천하를 이어받는 것을 목표로 하였으나 조승복에 의해 강남 진출이 좌절당하자 화북에 기반을 다지는 것으로 선회하였다. 그런데 당시 화북은 소빙하기와 맬서스 트랩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고[6] 강남을 상실한 상황에서 인구 부양이 불가능하다는 판단이 들자 인구를 줄여야겠다는 판단을 해서 수백만의 주민들을 조승복의 강남으로 추방했다. 목초지 확보를 위해서 농지를 숲으로 밀어버리기도 했다고.[7]
3부 417화에서 언급된 바에 따르면 원나라처럼 무식하게 죽이고 땅을 밀어버린 건 아니라고 하며, 그저 당시 화북의 환경상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의 인구만 남기고 쫓아낸 것이라고 한다. 청나라의 체제에 순응하는 자에게는 별다른 해코지가 없었고 땅도 빼앗지 않아, 그저 건주위의 지배를 거부하는 자들만 쫓아내고 농토를 숲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1635년 대한에게 2부에서의 밀약대로 요동을 할양했고 건주를 분할하여 홍타이지에게 몽골 지역을 넘긴다.
아들 숭덕제(요토)가 칭제한 후 청 제2대 황제 태종으로 추존되었다.
이후 19세기 편인 4부에서 홍타이지의 후금이 멸망하고 청나라 휘하 번국인 실위로 병합되면서 원 역사와 반대로 다이샨과 홍타이지의 왕위 계승 다툼은 최종적으로 다이샨의 후손에게 돌아갔다. 다이샨의 아들 요토가 화북의 청나라의 이름을 차지한 것이 복선이었던 모양. 조선으로 비유하면 이방과의 후손이 세운 나라가 이방원의 후손이 세운 나라를 병합하고 종가가 된 것과 유사하다.
3. 기타
원 역사에서는 이복 동생 홍타이지에게 밀려 황제가 되지 못했지만, 본작의 나비효과로 화북을 자신이, 초원지대를 홍타이지가, 요동을 조선이 분할 차지하였고 강남 일대는 조승복[8]의 후송(後宋)이, 파촉과 서남 일대를 서(西)나라가 차지하게 되면서 화북 청(淸) 황제가 되었다.[9] 그렇게 중국에 넷 또는 다섯 황제[10]가 존재하는 사국시대(四國時代)의 일원이 되었다.원 역사의 다이샨은 이씨(李氏)였다가 만주인으로 귀화해 팔기가 된 리기야씨(李佳氏)를 적복진으로 들여 요토를 가졌는데, 희정옹주의 아들 이름이 요토인 것을 보아 희정옹주는 원 역사 다이샨의 정실이었던 리기야씨의 포지션을 대신하는 인물로 보인다. 그 외에 다이샨의 계복진[11] 예허나라씨(葉赫納喇氏) 2명과 측복진 하다나라씨(哈達納喇氏)가 있었는데, 본작에서는 건주위 출신과 해서부 출신의 만주족 여성 3명을 모두 계복진으로 삼았다고 한다.[12]
작중에서 구체적인 언급은 없지만, 작중 누르하치는 건국하면서 조직 체계를 꾸릴 당시 조선의 체제를 크게 따왔고 희정옹주와 희연옹주가 아이신기오로에 시집 오면서 문화적으로 영향을 준 것으로 추측하기 때문에 다이샨이 세운 청나라도 명나라보다는 조선의 영향을 더 크게 받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특히 화북 일대에서 원나라 후기부터 명나라 초기까지 유행한 고려양이 철폐된 지 100년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고려양이 부활할 수도 있다.[13]
3부 417화에 따르면 다이샨은 중원에 입관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황이라 아직 혼란스러운 데다 당시에는 만주족과 한족을 구별하는 게 더 중요하다 생각해서 한족에게 변발을 시키지 않았다. 변발은 요토 대에 비 한족과 한족 출신 관리들에게만 강조되었고 평범한 한족들은 상투를 하거나 후송과 내통한다는 오해를 사지 않기 위해 독자적인 헤어스타일을 했는데, 세월이 지나 청나라 한족들의 동화가 강해지면서 스스로 변발을 하는 한족들이 늘어났고, 3부에 이르러서 전 국민이 변발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다만 청나라 한족들의 문화가 만주족과 유사해지면서 강남 일대의 한족과 차이가 커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독자적인 언어와 복식을 하고 있다는 것을 보아 완전히 만주족에 동화된 것도 아니다.[14]
송나라 이후 역사의 중심에서 밀려난 장안 이북의 평야들인 관중, 섬서, 산서 일대가 원 역사와 크게 달라진 원인 제공자이기도 하다. 해당 지역들은 주나라 대부터 역사의 중심이었지만 당나라 말기부터 건조화와 개봉 천도를 기점으로 한 동부 수도권 육성으로 버려진 곳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나치게 인구가 많아 맬서스 트랩 현상이 일어났고, 결국 섬서와 산서는 명나라를 멸망시킨 왕가윤과 고영상의 난의 중심이 되기도 했다.
다이샨은 장안 이북의 평야를 팔기군의 기병을 육성할 장소로 선정해 산서와 섬서에 학살과 방화, 추방을 대규모로 실시해서 해당 지역의 인구들을 거의 없앤 뒤 해당 지역의 농지를 거의 없애고 숲과 초원을 조성했다. 이는 준가르 원정을 위한 배후지 조성이라는 목적도 있었다. 이 때문에 100년이 지난 3부 후반 시점에서도 섬서, 산서의 인구는 명나라 시대의 절반도 되지 않지만, 역설적으로 인구가 크게 줄고 숲을 조성하면서 황폐해진 자연환경이 다소 회복되었다고 한다.
물론 다른 지역에도 팔기를 유지하기 위한 숲과 초원을 조성했다는 언급이 있지만, 두 성(省)은 준가르와 서나라 때문인지 작정하고 성 전체의 환경을 개조했다고 한다. 어쨌든 청나라도 사람 사는 곳인 이상 인구를 부양하기 위한 농경지가 필요하기 때문에 화북평야 전체를 밀어버리는 건 곤란했을 것이다. 이는 조선과의 밀약으로 산해관 동쪽으로 조선에게 넘긴 상황에서 기병의 질을 유지하기 위한 고육지책으로 보이지만, 사실 중국 일대를 숲과 초원으로 테라포밍하는 정책은 역사적으로 거란족의 요나라, 여진족의 금나라, 몽골족의 원나라 모두 시도한 것이었고 특히 칭기즈 칸은 중국 전체를 완전히 초원으로 테라포밍하려다 야율초재가 말려서 중단된 적도 있었다.[15]
[1]
본작의 누르하치는 만력제가 건주왕으로 책봉해서 명나라 연호를 썼고, 이후 명나라의 비위를 맞추다 명나라가 멸망하기 전에 누르하치가 사망해서 칭제건원하지 못 했다.
[2]
건주위 출신도 있고 해서부 출신도 있다고 한다.
[3]
서양과 달리 당대 동양에서는 외국과의 혼인이 굉장히 민감한 정치적 사안이라서 이루어지기 매우 힘든 편이었음을 고려하면 조선 왕녀와 최초로 혼인한 만주인의 상징성은 대단했을 것이다.
[4]
칭기즈 칸의 동생 카사르의 후손으로
황금씨족은 아니지만(황금씨족은 칭기즈 칸의 직계만 해당한다) 이에 준하는
보르지긴 씨족의 일파.
[5]
정부는 여럿 있었지만, 정부의 특성상 사생아들에게는 일체의 권리가 없었다.
[6]
이미 명 말기부터
맬서스 트랩에 걸려서 농민 반란이 아주 잦았다.
[7]
화북의 농지를 목초지로 개조하는 건 입관의 대가로 만주 일대를 조선에게 넘긴 다이샨에게 있어서 목초지 확보를 위한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고 볼 수 있다.
[8]
본작 오리지널 인물이다.
[9]
과거
요나라의
야율아보기,
금나라의
완안아골타와 유사하나 해당 세계의 청나라는 화북'만' 차지하고 있어서 이들보다도 훨씬 작다.
[10]
동삼성의 조선->대한(大韓), 화북의 대청(大淸), 몽골의 대금(大金), 서남의 대서(大西), 강남의 대송(大宋). 후금(後金)은 한자 문화권이기는 하나 만주-몽골 제국의 정체성이 더 강하기 때문에 반쯤 예외로 볼 수 있다.
[11]
만주족 사회의 정실인 적복진 중에서 서열 1위인 대복진을 제외한 나머지 적복진들을 말한다.
[12]
예허나라씨와 하다나라씨는 나라씨의 일파인 예허부와 하다부이기 때문에 예허나라씨는 1명만 삼고 나머지 1명이 해서부인 모양이다.
[13]
고려양이 원나라에 유행한 원인 중에 원나라가 한족 문화에 너무 휩쓸리지 않기 위해 대신하기 위해서 장려했다는 설이 있는데, 여기의 청나라는 조선 의존도가 높음을 고려하면 실제로 가능성이 있다.
[14]
청나라 시대 사극을 보면 한족과 만주족의 복식이 유사해지기는 했지만 19세기 전반까지만 해도 복식과 장신구에 차이가 있었다. 그리고 중국어는 원래부터 각 지방마다 언어 분화가 컸는데, 후송이 3부에서
오어를 공용어로 택하면서
관화를 쓰는 화북 한족들과 언어 차이가 명확해졌기 때문이다.
[15]
아무리 전근대 최고의 학살 장인인 칭기즈 칸이라도 당시 중국 인구가 워낙 어마무시해서 당시 기술상 저 숫자를 다 없애는 건 현실적으로 무리였기 때문에 말리는 게 맞긴 했다. 결국 한족들이 그 인구를 기반으로 100년도 안 되어 중국에서 다시 쫓아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