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 제국 الإمبراطوري الإسلامية[1] | Islamic Empir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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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선지자 무함마드가 창조한 이슬람이 세력을 확대하는 과정에서 탄생해 유지되었던 제국.2. 범위
2.1. 일반적 의미(632 ~ 750, 118년간)
단순히 이슬람 제국이라고 하면 이슬람을 국교로 삼는 모든 제국들을 다 가리키는 말이 되겠지만, 일반적으로 역사에서 이슬람 제국이라 하면 이슬람 초기 통일된 판도를 자랑하던 제국들, 즉 아바스 칼리파조 이후 사분오열되기 이전의 118년간의 제국을 가리킨다.이라클리오스 왕조와 사산 왕조간에 치열하게 벌어진 로마-페르시아 전쟁으로 양대 제국이 피폐해졌을 때, 어부지리로 성장했다. 두 제국의 견제에서 벗어나기도 했고, 전통적인 교역로가 전쟁통이 되자 아라비아 사막이 대체 교역로로 쓰이며 경제적으로도 이득을 보았다.
동로마 제국의 이라클리오스 황제가 끝내 사산 왕조의 호스로 2세를 꺾으며 오랜 전쟁이 끝났으나 두 제국은 막대한 국력을 소진했고, 새로이 일어난 이슬람 제국이 사산 왕조를 정복하고 동로마 제국의 시리아, 예루살렘 일대와 북아프리카(이프리키야)를 점령하며 진정한 승자가 되었고, 당대에 세계적인 강대국이 되었다.
아랍 제국이나 사라센(Saracen) 제국이라는 말도 널리 쓰인다. '사라센'이란 사실 서방만의 표현인데, 고대 로마 제국 말기에 시나이 반도(Sinai-peninsula)에 사는 유목민들을 가리키는 말에서 나온 것이 사라센이었다.
지중해 이슬람 제국의 팽창은 우마이야 왕조가 동으로는 동로마 제국의 제4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까지, 서로는 732년 프랑크 왕국의 카롤루스 마르텔 궁재가 이끄는 군대에게 패한 투르-푸아티에 전투까지 확장을 계속했다.
다만 이런 말들은 정작 당대 이슬람 제국 사람들이 '다르 알 하릅'으로 구분했던 국외자 비이슬람교도들이 마음대로 부르는 이름이었고, 굳이 정식 국호를 말한다면 어디까지나 다르 알 이슬람이었다. 아바스조에서 여러 아미르들이 짜개져나가고 아바스조 할리파가 10세기 이후 실력도 권위도 상실하는 즈음에 가선 다르 알 이슬람이란 말 자체가 한 국가만 가리키기엔 영 실질도 명분으로도 어색하게 되어 국호로는 잘 쓰이지 않게 되지만, 적어도 우마미야조 및 아바스조 전성기 때까지는 그 말이 실질에 부합했었다. 한편 이슬람 제국 사람들 본인들이 상당히 이념적인 이런 정식 국호와는 별도로 평상시에 흔히 즐겨 자칭하던 명칭은, 알 바이다(아랍어. 한국어로 직역하면 '하얀 땅'이란 뜻이다.)였다.
2.2. 오스만 제국을 포함시(632 ~ 1922, 1,291년간)
이슬람 제국은 이후 오랫동안 분열된 상태에 놓였다가 오스만 제국때가 되어서야 다시 동시대 유럽 국가들을 압도하는 통일된 세력으로 재등장한다. 이슬람 세계로서는 1,000년쯤 지난 뒷시대로, 오스만은 16세기 중엽까지 크게 번영했으나 16세기 말, 그리고 17세기에 이르러 점차 쇠퇴했다. 그리고 오스만이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한 이후, 수니파 칼리파 직위도 폐지된다. 이런 방법으로 계산하면 이슬람 제국은 무려 1,291년간 존재했었다.3. 문화
3.1. 학문
3.1.1. 의학
실용 기술 분야인 의학 같은 경우 중세 이슬람 세계가 탁월했다. 그러나 이 때문에 역시 중국이나 서유럽보다 훨씬 수준이 높았던 동로마 제국 의학이 '이슬람 제국으로부터 전파 되었다'고 간주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초기 이슬람 제국의 학문이나 기술 수준은 그리 높지 못했고, 확장 과정에서 페르시아, 동로마, 인도의 영향을 받으면서 비로소 본격적인 이슬람 문명이 탄생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오히려 이슬람 제국의 높은 과학 기술 수준이 페르시아, 동로마, 인도 등으로부터 전래되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애당초 이슬람 제국을 건국한 아라비아 반도의 아랍인들은 원래 동로마와 페르시아에게 야만족이라 멸시받는 유목민족이었다. 중국사에서 몽골 고원의 유목민들이 중국을 정복했으나 시간이 지나 한족 문명을 받아들이고 정주 문명국가로 전환하는 것과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하면 쉽다.또한, 사산조 역시 동로마에서 박해받고 찾아온 네스토리우스 교인들의 고전 그리스-로마 문화를 잘 흡수했으며, 뿐만 아니라 동쪽에서 인도 세계의 의학적 지식까지 흡수했다고 전해진다. 이와 같은 문화적 배경이 중세 이슬람 황금기의 기반이자 중세 이슬람 발전의 시작이었다.
다만 하나 더 말하자면, 물론 이슬람 의학계는 본인들이 '그리스'의학계에게선 많은 유산과 혜택을 봤다고 인정하였으나, '로마'(= 즉 동로마 제국)한테선 별로 받은 게 없다고 여겼다. 이슬람 의학계가 스펀지 빨아들이듯 흡수했던 그리스 의학의 유산은 그들이 정복했던 동아나톨리아, 시리아, 이집트 등에 살던 '그리스인'들에게서 온 것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동로마측은 이런 견해에 대해 분개했지만 당신들은 그리스 철학이나 의학에 대해선 우리보다도 아는 게 없지 않냐고 지적하는 이슬람측의 논리에는 그다지 대응 논리를 발견하지 못했다. 7~9세기 동로마의 군사적, 재정적, 경제적, 문화적 난맥상은 이만저만한 게 아니었기 때문으로, 사실 이 시기 여러모로 열악한 상태였던 동로마 의학계는 국가 역량 회복 과정에서 많은 부분을 이슬람 의학계로부터 다시 역수입해서 배워야만 했다. 굳이 말하면 동로마 제국 의학계가 많은 걸 잃어버렸다가 그걸 보존한 이슬람 의학계로부터 선조의 유산을 되찾았다고 볼 수 있겠지만, 이슬람 의학계는 굳이 말하면 동로마 + 페르시아 + 인도 의학을 집대성한 기초 위에서 이슬람 제국 사람들의 독자적인 개선과 연구로 큰 발전을 이룬 의학 체계기에 전적으로 그랬다고도 보긴 어렵다.
실제로 이븐 시나가 11세기쯤 집필한 《의학 정전》은 16세기 인물인 파라켈수스가 500년 전 이슬람의 의학서를 우리 기독교인이 아직도 못 따라잡고 있다면서 한탄했을 정도로 뛰어났다. 그 외에도 이슬람 황금 시대에 활약한 수많은 학자들은 다 열거하기가 힘들 정도로 많이 있으니 한번 찾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영문위키에는 중세 이슬람 세계의 뛰어난 학자들만 모아 놓은 항목이 따로 존재한다.
4. 역사
4.1. 통일 제국 시대(632 ~ 750)
갈색은 예언자 무함마드 시대, 주황색은 그 뒤를 이은 칼리파 우스만 시대(650년대) 그리고 노란색 부분이 우마이야 시대에 확장한 영토이다. 지도를 보면 알 수 있겠지만 구자라트 끄트머리에서 사마르칸트· 트빌리시를 이어 갈리시아까지 한 나라에 있음을 알 수 있다.
4.2. 분열기
10-12세기 존재했던 쉬아 왕조들을 모아둔 지도
이 문단에서는 술탄이나 칼리파 이상을 칭했던 국가들만 서술한다. 압바스 왕조 쇠퇴와 셀주크 제국 성립 사이의 분열기는 동시에 억눌려 있던 쉬아 세력의 역량이 표출된 시기이기도 하다. 열두이맘파의 부와이 왕조는 바그다드를 점령, 칼리파를 좌지우지하였고 비슷한 시기 북아프리카를 석권한 이스마일파의 파티마 왕조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스스로 칼리파를 칭하였으며 1050년대에는 잠시나마 바그다드까지 점령하여 압바스 칼리파가 아닌 파티마 칼리파의 이름으로 쿠트바 (금요 예배)를 진행할 정도였다. 이러한 시아파 전성시대는 1174년 살라흐 앗 딘이 파티마 조를 멸하며 종식된다.
4.2.1. 페르시아 지역
4.2.2. 이베리아 지역
4.2.3. 이집트 지역
4.2.4. 마그레브 지역
4.3. 튀르크인 도래 후
4.3.1. 아나톨리아 지역
4.3.2. 아라비아 지역
4.3.3. 페르시아 지역
4.3.4. 인도 지역
5. 여담
5.1. 당대 이슬람 법학자들의 정통성 비판
초기 이슬람 제국의 위대성 중 하나가 무엇인고 하니, 자기 비판에 대단히 유연하고 여론을 가급적 탄압하지 않았으며, 기독교와 유대교에 대해서도 대단히 관대했다는 점이다. 체제를 군사적으로 전복하려드는 하와리즈파에 대해선 탄압과 감시가 기독교나 유대교보다도 심했음도 특기할 부분이다. 이 관대함 중에 하나가 바로 당대 이슬람 법학자들의 정통성 논란이었다. 무아위야 VS 알리의 대결 중 무아위야가 저지른 협잡과 휼계는 굳이 시아파나 하와리즈파가 아니더라도 그런 일이 없었다곤 부정할 수 없었으며, 이슬람 법학자들은 다름아닌 무아위야조 시절에도 이 점을 꺼내들면서 무아위야 왕조는 무슬림들이 혼란보다 나으니 어쩔 수 없이 선택한 일종의 필요악임을 분명히 하면서, 무아위야조 할리파들은 엄연히 정통 할리파 시대의 할리파들보다 열등함 또한 확실히 하였다.[6] 그들이 가장 문제 삼았던 점은 무아위야 왕조의 할리파들이 갈수록 '로마의 카이사르들'이나 '페르시아의 샤들'과 비슷해져 간다는 점인데, 실제로는 아바스조의 할리파들이 오히려 페르시아 정치학적 개념을 상당 부분 수용해서 통치 강화에 활용했다는 점을 돌이켜보면 여론에 관대했고 나름대로는 할리파 노릇을 제대로 해보려 했던 전반적인 무아위야조 할리파들 입장에선 나름 억울할 일이다.[7]하지만 집권과정을 놓고 보면 할 말이 없는 것은 사실. 좀 정확히 말하면 집권과정이 꽤 지저분했다. 무아위야 1세의 경우 알리와 싸운 명분부터가 어거지였고[8] 그렇게 해서 붙게 된 시핀 전투에서 전세가 불리하게 돌아가자 쿠란을 창끝에 꽃아서 진격하게 했다. 이유는 독실한 무슬림인 알리를 압박하기 위해서. 그리고 예상대로 알리는 전세가 유리했음에도 전투를 중단했다. 오늘날 무슬림들 입장에선 신성모독이나 다름없는 짓을 저지른 것인데 그런 자가 칼리프가 되었다.
또 하나 더, 우스만 치세의 이슬람 하에서 최대 업적이라면 바로 쿠란의 정비로 우스만 이전까지는 쿠란이 있었어도 지금처럼 통일된 쿠란이 아니었다. 엄밀히 말해 무함마드 사후부터 쿠란의 집대성이 시도되어오고 있었지만 우스만 대에 이르러 이를 중점적으로 추진해 완성시킨 것이다. 문제는 우스만도 우마이야, 무아위야도 우마이야란 점이다. 특히나 이 시절 우스만이 완성한 쿠란은 절대적인 권위를 가졌다고 보기도 어려웠다. 이전까지 여러 쿠란의 이본들이 나돌아다녔고 그중에서는 우스만의 쿠란을 부정하는 이들도 있었다. 심지어 우스만이 진본으로 인정한 쿠란은 우스만의 딸이 가진 하프사 본이었다. 그야말로 우마이야의 쿠란이었고 따라서 우마이야야말로 이 권위를 수호해야 했던 셈인데 무아위야는 이를 창끝에 꽃아 권위를 훼손한 것이다.
아들 야지드 1세도 비슷하다. 야지드 1세는 즉위하자마자 알리 아들인 후세인과 대립하게 되는데 결국 카르발라 참극을 통해 후세인을 제거한다. 그러나 알리는 무함마드의 사촌이자 양아들이었고 후세인은 그런 알리의 아들이었으므로 이 사건은 무슬림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고 결국 2차 피트나의 원인이 되었다. 이 2차 피트나에서 우마이야조는 까딱하면 망할 뻔 했으니 잘못했다간 후세에 두고두고 비웃음을 살만한 삽질이었다.
이렇다 보니 우마이야가 정통성 있냐는 말이 나오는 것도 당연하다. 부자가 쌍으로 욕먹을 행위를 저질렀으니 말이다.[9] 우마이야조가 이슬람 최초의 왕조임에도 100년도 채 못가 망한 것이나[10] 아바스조가 일어날 때 찬탈자 프레임을 씌운 것도 그만큼 정통성 면에서는 의문을 사기 쉬웠던 집권과정에 있었을 것이다.
번외로 집권과정에도 문제가 있었지만 사실 집권 전에도 문제가 있었다. 그 사례는 3대 칼리프인 우스만인데 우스만은 우마이야 가문 출신으로서 처음으로 칼리프가 된 사람이자 정통 칼리프 시대의 네 칼리프들 중 가장 강대한 세력을 가졌으며 또한 가장 오래 재위한 칼리프였다. 문제는 우스만이 그런 세력을 갖고도, 그만한 시간을 갖고도 무슬림들을 만족시키기엔 부족한 칼리프였다.
2대 칼리프인 우마르가 사망할 당시 우마르는 '이슬람의 세속화'를 걱정했다. 초기만 하더라도 무슬림들은 이슬람 정신에 가득차 있었지만 정복지가 확대되면서 위아래가 가릴것 없이 세속화가 되었고 그 상징은 죽어가는 우마르에게 아들을 후계자로 삼으라는 권유였다. 본디 알리가 무함마드의 사촌 겸 양자로서 혈통상 완벽한 후계자였음에도 아부 탈리브에게 밀려난 이유가 예언자의 후계자는 혈통으로 정하는게 아니라는 명분이었는데 그 분위기가 10여년만에 사라진 것,
이 때문에 우마르는 분노 속에 죽어가야 했고 그나마 다행히 본인 아들이 칼리프로 추대되진 않았으나 그 대신에 오른 자가 우스만이라는게 문제였다. 우스만은 칼리프가 되기엔 결함이 많았다. 과거에 전투에 불참하거나 도망친 전적, 무함마드 사망 당시 아부 탈리브, 우마르, 알리가 침착하게 제 할 일을 할 때 본인은 공포에 사로잡혔던 일 등으로 타인들은 물론 우스만 본인조차 자신이 그들보다 못미친다고 느끼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가 알리 대신 칼리프가 된 것은 단순히 이슬람 권력층의 입맛에 맞았기 때문이다. 알리는 이슬람 순수성을 외친 반면 우스만은 권력층과 공유하는 점이 많았기 때문이다.
즉 처음부터 우스만의 등극은 말이 많을 수 밖에 없었는데 그나마도 통치가 만족스러웠냐면 그것도 아니다. 우스만은 자기 집안인 우마이야 가문을 편애했고 때문에 그의 재위기에 우마이야 가문의 세력은 너무 커져버렸다. 거기다 대부호 출신인 우스만은 씀씀이도 남달랐고 때문에 전임자들에 비해서 재정 감각이 방만했다.
그 결과 우마르 때부터 기미가 보이던 이슬람의 문제점은 우스만 대에 본격적으로 터져나왔고 이슬람 정신과 어긋나는 자가 칼리프가 있는 현실과 현실에 편승한 자들은 희희낙락하고 그렇지 않은 자들은 원망을 품게 되었다. 말하자면 독실한 무슬림들이 보기에 우스만은 흐려져가는 초기 이슬람 정신을 다잡아야 하는 시기에 칼리프가 되어서는 오히려 이슬람 정신이 더 흐려지는데 기여한 자였다.
이러니 결국 우스만은 무슬림들의 우두머리면서 무슬림들에게 죽임을 당한 최초의 칼리프라는 불명예스러운 최후를 맞았다.[11] 이런 우스만이었는데 그런 우스만과 같은 가문이면서 그의 총애로 부쩍부쩍 성장한 우마이야 가문이라고 시선이 우스만과 다를 리 없다. 시작부터 의문을 가질 수 밖에 없던 등극이었던 것. 더 가관인건 우스만 사후 알리와 대립하게 되는 무아위야 1세는 우스만에게 총애를 받았음에도 우스만이 위험해졌을 때 돕지 않았고 후일 알리가 우스만 암살범과 한편이라는 이유로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에 알리는 처음에 영지를 늘려달라고 해놓고 이제 와 뭔소리냐며 어이없어했다.[12]
물론 그것만이 문제의 전부는 아니었을 것이다. 우마이야조 중 유일하게 아바스조에서도 정통 칼리프로 인정받은 이도 있었는데 그런 사례인 우마르 2세는 모범적인 무슬림이었다. 즉 집권과정이 지저분했음에도 집권 후 독실한 이슬람 신앙을 실현했다면 후세에 그정도로 두고두고 씹히진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명색이 무함마드의 후계자(칼리프) 자릴를 가진 일족들이 사치향락에 빠져 지내고 그 재원을 마련한다고 세금을 마구 거둬들이며 심지어는 비무슬림이 개종하면 거두게 되어있는 지즈야를 개종했는데도 거두고 또 지즈야 수입이 줄어들까봐 포교에도 적극적이지 않았으니[13] 등극과정도 문제였는데 그렇다고 등극 후라고 좋은 꼴을 보여주질 않았으니 그런 비판을 받았던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나마 조금 옹호해주자면 사실 이슬람 법학자들의 비판 상당수는 우마이야 가문이 아니라 누가 이슬람 제국을 열었더라도 비판받았을 사안이다. 처음의 정신을 감안하면 이슬람 제국 그 자체가 이슬람에게는 말이 안 되는 사안이였기 때문. 하지만 작은 공동체에서 시작된 초기 이슬람 정신이 거대제국을 운영하는데에 맞을 리는 없었고 결국에는 누군가 제국으로 체제개편을 하여 이어가든지 시대변화에 맞지도 않는 정신만 고수하다가 엇박자가 나든지 둘 중 하나인데 후자는 좋은 결과를 가져다 줄 리 없으므로 이슬람 제국으로의 개편은 우마이야 시대 법학자 말마따마 제국으로의 개편은 이슬람적 관점에서 봐도 필요악적인 측면도 있다. 단지 등극 전, 등극 과정, 등극 후 모두 후세에 좋은 평가를 받기엔 의문부호가 붙을만하니 지금도 정통성이 있냐 없냐 소리가 나오는 거지...
5.2. ISIL의 참칭
2014년 들어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국가가 이슬람 제국을 자칭했다. 이들의 도덕적 문제는 별개로 다루더라도, IS는 이슬람 제국으로 분류될 만한 규모가 못 된다. 일단 이슬람의 역사적 중심지는 비옥했던 메소포타미아와 레반트, 이집트 지역 및 이슬람의 발상지인 아라비아 반도, 특히 두 성지가 모여있는 서안 지역이고, 역대의 이슬람 제국들은 이 지역을 포괄한 중근동을 지배하며 주변의 다른 이슬람 국가들로부터 종주권을 인정받거나 혹은 제압해왔다. 단, 후우마이야 왕조는 이에 해당하지 않지만... 얘들은 최소한 이슬람 제국의 왕조가 세운 망명 정권이기라도 하다.그런데 ISIL의 경우는 영토도 이라크 일부 + 시리아 일부에 불과하고(가장 범위를 넓혔다고 해도 리비아 북부 해안의 일부 도시만 차지했던 수준 + 그 외 다른 이슬람권 국가들에서 친ISIL계열 추종 세력의 지부가 약간만 있었던 정도), 주변에 이들의 종주권을 인정하는 국가는 하나도 없다.[14] 특히 두 성지의 수호자를 자처하는 국가이자 사우디 아라비아부터 이들에게 매우 적대적이다.[15] 그리고 농업 생산력이 높은 이집트, 레반트, 메소포타미아, 마그레브 일대를 지배하면 척박한 아라비아 반도는 대강 느슨하게 제압해서 종주권을 인정받을 수 있었던 근대 이전과는 달리, 현대의 아라비아 반도는 석유를 기반으로 막대한 부가 창출되는 지역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그 중요성은 더욱 크다. IS 자신은 칼리파 국가 드립을 치면서 이슬람 제국 비슷한 것이 되고 싶은 모양이지만, 현실의 세력과 영향력 측면에서 이슬람 세계의 중심부에 있는 다른 국가들이 엄연히 존재하며, 이들을 적대하기까지 하는 이상 그 주장을 인정해 줄 가치는 전혀 없다. 그냥 자칭 수준에 불과하다는 것. 또한, 위에서 일단 차치한 도덕적 문제를 포함하여 IS가 실제로 국가인지까지 따져본다면 애초에 해당 집단이 제국 이전에 국가로 불릴 만한지부터가 의심스러운 것이 사실이다.
6. 각종 매체에서
6.1. 문명 4
1000AD에서 플레이할 수 있다. 실제 역사보다 100년 앞서 십자군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데 플레이어가 유럽 문명이라면 아주 좋은 먹잇감이고 플레이어가 이슬람 제국이라면 약간의 수완을 통해 십자군을 방어하고 아프리카, 인도, 중국, 러시아 등지로 진출할 수 있다.기본적으로 난이도가 '신' 이기 때문에 연구, 재정 등에 페널티를 받는다. 덩치는 크지만 생산성은 낮고, 기술력은 나날이 뒤쳐지고, 유럽 전체-러시아-인도와 원수지간이라 무너질 때가 많다.
6.2. 크루세이더 킹즈 시리즈
기독교 영주만 플레이 할 수 있었던 1편의 경우 십자군의 목표로써 일종의 최종 보스격으로 등장했지만... 2편에서는 DLC '이슬람의 검'을 구입하면 플레이 가능하다. 이슬람 플레이의 경우, 이슬람 제국 특유의 신정일치 칼리프제를 반영하여 교황 플레이가 불가능한 가톨릭과는 달리 칼리프를 직접 플레이 할 수 있고, 성 영지뿐 아니라 모스크 영지 역시 페널티 없이 소유할 수 있다. 또한실제 역사를 배경으로 한 역사 시뮬레이션 답게 여러 이슬람 제국을 골라 플레이 할 수 있는 점 역시 특징. 처음 발매될 당시에는 1066년이 시나리오의 시작인 관계로 이집트의 파티마 왕조나 셀주크에 종속된 상태로 바그다드를 통치하고 있는 아바스 왕조, 그리고 중기나 후기 시나리오에서 아이유브 왕조, 맘루크 왕조 등을 플레이 할 수 있고, 후반 시나리오에서는 아직 제국으로 거듭나기 이전 토후국이던 시기의 오스만 왕조 정도를 플레이 할 수 있었으나... DLC의 발매로 769년과 867년 플레이가 가능해지면서 전성기의 아바스 왕조나 이베리아 반도의 후우마이야 왕조를 플레이하는 것도 가능하게 되었다.
[1]
아랍어권에서는 기본적으로 이 시대를 아랍 제국(الإمبراطورية العربية) 정도로 통칭하며, 정식으로는 아랍 이슬람 제국(الإمبراطورية العربية الإسلامية)이라고 한다. 현대 무슬림들에게 종교성 '이슬람'은 당연한 것이기에 지역성 '아랍'과 국체 '제국'이 표제가 된 것.
[쉬아]
열두이맘파
[3]
일 칸국 참고.
[쉬아]
일곱이맘파
[쉬아]
열두이맘파
[6]
법학자들이 보기에는 이들이 못마땅할만도 했는데 우선 무아위야 1세와 야지드 1세의 집권과정은 차치하더라도 우마이야 왕조는 이슬람 선교에 적극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돈 때문으로 불신자들에게 거두는 지즈야 수입이 짭짤했고 심지어는 교리에 따라 개종하면 거두지 말아야 했는데도 거두었으며 그 돈으로 사치에 빠져지냈다. 이 때문인지 메디니 총독 시절 법학자들과 친했으며 신실했던 우마르 2세는 학자들이 우마이야 왕조를 비판하는 것을 허용했으며 칼리프가 된 후에는 개종에 적극적이었으며 개종자들에게 지즈야를 거두는 것을 막았다. 이 때문인지 우마이야 왕조를 무너뜨린 아바스 조에서 우마이야 왕조는 격렬히 비판받으며 역대 칼리프들의 무덤은 모조리 도굴당하는 결말을 맞았으나 우마르 2세만은 2대 칼리프인 알 만수르가 직접 그의 무덤만은 남겨둘 것을 지시했고 법학자들은 다른 우마이야조의 칼리프들은 찬탈자라고 비난했지만 우마르 2세는 정통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7]
그러나 우마이야조의 통치에 문제가 있던 것도 사실이긴 하다. 일단 제국이 급격히 팽창했는데도 아랍인 외의 이들을 박대하여 아랍인 외의 민족에게 불만을 자아냈고 마왈리를 학대해 그들의 분노를 자아냈고 같은 이슬람이라도 수니파 외에 적대해서 그들과도 사이가 좋지 않았다. 아바스 조가 성공적으로 건국한 것은 이렇게 우마이야조에게 불만을 가진 각계각층의 이들의 호응을 샀던 것이지 우연이 아니었다.
[8]
알리가 우스만 시해범이라는 이유에서였는데 정작 자기는 우스만이 위험할 때 도우러 가지 않았고 오히려 알리가 도우러 갔다. 그렇다고 무아위야가 같은 가문 사람인데도 외면할 정도로 우스만에게 냉대당했냐면 오히려 그 반대로 우스만은 자기 가문, 특히 무아위야를 총애했다. 즉 무아위야가 알리더러 찬탈자라고 욕할거면 알리가 찬탈자가 맞든 아니든 간에 알리는 "그래? 그럼 너는 뭐냐, 너는 우스만에게 그렇게 은혜를 받고도 도와줘야 할 때 돕지 않은 너는 배신자가 아니더냐?" 라고 맞받아칠 수 있엇다.
[9]
동아시아로 치면 조조의 동귀비, 복황후 살해나 사마소의 사마소 시군에 해당할만한 정통성 훼손이다.
[10]
첫 무언가는 처음이라는 그 자체로 상징성이 있다. 예시를 들어 아바스조는 750년에 등장해 1517년까지(중간에 몽골의 침략으로 잠시 끊겼다.) 800년 가까이 이어졌는데 아무래도 아바스조는 무함마드와 가까운 혈통이었고 그 때문에 당시로선 정통성 없다고 여긴 우마이야 왕조 대신 최초의 정당성 있는 이슬람 왕조였을 것이고 때문에 본거지인 이라크 일대의 지배자가 아바스조 이후로 계속해서 바뀌어도 칼리프만은 아바스 가문에서 배출된 원인이었을 것이다. 그것을 제외하면 먼 이베리아 반도에서 자칭한 후우마이야 왕조나 아얘 수니파인 아바스조의 권위를 부정하는 시아파 파티마 왕조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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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유조차도 가관이다. 이집트 총독인 압둘라가 세금을 너무 거두니까(전임 총독이 자신의 정책에 반대하자 해임하고 새로 압둘라를 앉혔다.) 이집트인들이 항의를 시작했고 결국 압둘라를 해임해달라고 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이것이 먹히지 않자 이집트인들은 대표자를 보내 직접 청원하려고 했는데 정작 우스만은 알리에게 맡기고 뒤로 빠지려다 실패하는 추태를 보이고 결국 대표단을 만나게 된다. 그런데 앞에서는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누던 우스만은 대표단이 물러나자 압둘라에게 대표단을 몰살시킬 것을 지시했는데 그만 지시를 전하러 가던 사람이 그 대표단에게 붙잡혔고 이에 대표단이 분노해 대치했으나 우스만이 혐의를 부인하자 흥분을 가라앉히고 우스만 말고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한 마르완과 대면하게 해 달라고 했는데 마르완은 자기 친족(무야위야 1세의 형제.)이라 그 요구를 거절했고 자꾸 칼리프가 자신들을 기만하는 모습에 기가 찬 이집트인들이 우스만 불신임 및 알리에게의 양위를 요구하자 우스만이 강하게 거부했고 결국 이집트 병사가 그를 살해한다. 한 마디로 문제를 일으켜놓고 이에 항의가 들어오니까 회피와 기만으로만 일관하다가 이에 네가 그렇게 책임지기 싫다면 다른 사람에게라도 맡기든가! 하니까 그건 또 못하겠다고 굴다가 죽은거다... 그야말로 무책임의 극치인 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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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보면 알겠지만 결국 우스만 암살 운운은 핑계고 실제는 우스만에 의해 우마이야 가문의 힘이 커졌는데 이슬람의 순수성을 외치는 알리 등극에 거기다 실제로 알리가 우마이야 가문 출신들을 서서히 배제하면서 생긴 불만과 불안 때문이라고 봐도 좋다. 한 마디로 우리가 (비정상적으로 얻은) 밥그릇을 빼앗아가려고 하니 순순히 못 빼앗긴다며 들고 일어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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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대로 앞서 말한 우마르 2세는 재위중에 사치향락 풍조 단속, 잘못된 지즈야 관행 타파, 적극적인 포교(강제전도는 아니었다.)에 집중적으로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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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의 팽창은 중세 이슬람 제국처럼 주변국을 차례로 복속해 영토를 넓힌 것이 아니라, 세계 각지의 이슬림 극단주의 반군이 스스로 칭호를 갈아치워 IS를 자처했던 방식이다. 딱히 팽창의 주체라고할 주요 집단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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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우디는 아예 미국의 중동 내 전략적 우방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