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신지수(辛芝秀) |
자/호 | 영삼(靈三·英三)/모양(慕陽) |
본관 | 평산 신씨 |
생몰 | 1854년 ~ 1904년 |
출생지 | 충청북도 제천군 |
사망지 | 충청북도 제천군 |
추서 | 건국훈장 애족장 |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2009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신지수는 1854년생이며 충청북도 제천군 출신이다. 그는 유중교(柳重敎)의 문인으로, 1896년 1월 12일 안승우와 함께 을미의병을 일으키기로 결의한 뒤 1896년 1월 28일 유인석을 의병장으로 추대한 제천의진의 후군장이 되었다. 2월 16일 제천의진은 충주성을 공격하여 함락하는 등 군세를 떨쳤다. 그러나 2월 26일 수안보의 일본군 병참부대를 공격하던 중군장 이춘영이 전사하고, 이어 2월 28일 충주성 공방전에서 주용규가 전사함으로써 큰 손실을 입었다.이에 신지수는 무기와 전술이 뛰어난 적을 맞이하여 한 곳만 지키는 것은 좋은 계책이 아니므로 유격전을 펼칠 것을 주장하였다. 또한 일본군과 관군을 분리시키는 방안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3월 5일 일본군의 공격으로 충주성에서 퇴각한 제천의진은 제천으로 후퇴하였는데, 이때 신지수는 강령수성장(江寧守城將)으로 충주 강령을 방어하였다. 3월 18일 제천의진은 일본군 가흥수비대와 교전하였는데, 신지수는 강령으로 들어오는 일본군을 격퇴하였다.
3월 22일 장기렴이 이끄는 관군과 일본군이 제천으로 들어왔으나 신지수가 지키는 강령으로는 들어오지 못했다. 그 후 신지수는 5월 4일 하소진에서 관군을 격파하였고, 5월 18일에는 원규상·이인영부대와 함께 가흥의 일본군 수비대를 공격하였다. 6월 4일 유인석은 서행을 결심하고 실행하였는데, 후군장 신지수는 유인석의 본대를 호위하였다. 8월 24일 유인석이 압록강을 건너 요동으로 들어갔다. 이에 앞서 신지수는 선발대를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갔으며, 중국의 도움을 청하러 심양에 파견되기도 했다.
후에 조국으로 귀환한 뒤 개화파 정부에 의해 충청도 어사로 임명된 그는 유인석을 찾아뵈었다가 "나라를 판 역적들과 한 배를 탈 수 있느냐"는 질책을 받고 사죄했다고 하며, 1904년경 사망했다고 한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9년 신지수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