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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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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000 천주교 천주교 서울대교구성직자
천주교 서울대교구신부
신부
신동진 안드레아
申東珍 | Andrew Shin Dong-jin}}}
파일:신동진 안드레아 신부.png
<colbgcolor=#eee8aa><colcolor=#1f2023> 출생 1978년 09월 02일 ([age(1978-09-02)]세)
서울특별시 서대문구연희동
언어 한국어,영어,이탈리아어,스페인어,프랑스어,독일어,포르투갈어,라틴어 능통
국적 대한민국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 바티칸파일:바티칸 국기.svg
성직서품일 2005년 07월 07일 부제서품
2006년 07월 07일 사제서품
2011년 교황청 외교관 임관
2002년 1월 25일 ~ 2012년 6월 24일
학력 이탈리아//교황청립 외교관 학교, 교황청립 라테란 대학교, 교황청립 우르바노 대학교, 교회법 석박사,국제법 박사,영성신학 석사,,,
서품성구 먹든지 마시든지, 그리고 무슨 일을 하든지 모든 것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십시오. (Ad Majorem Gloriam Dei)
축일 사도 성 안드레아 11월 30일
파일:신동진 안드레아 신부 서품상본.jpg
Ad Majorem Gloriam Dei!(하느늼의 영광을 위하여!)
신동진 안드레아 신부 사제 서품 상본

1. 개요2. 유년시절과 가계배경(순교자 후손)3. 사제 서품과 교황청 외교관4. 가톨릭대학교 성심교정 교수5. 본당사목자6. 은수자 영신수련과 관상 기도7. 영적 면담과 심층 영성 코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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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신동진 안드레아(申東珍, 1978년 09월 02일 ~ )은 대한민국의 천주교 성직자이자 로마 가톨릭교회의 신부이다. 세례명은 안드레아이며, 현재 서울대교구에 소속되어 있다. 다양한 언어에 능통하여, 영어,이탈리아어,프랑스어,스페인어,독일어,포르투갈어,라틴어,한국어 등 총 8개국어를 구사할 수 있다.

2. 유년시절과 가계배경(순교자 후손)

1978년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연희동에서 아버지 신기철(가시미로)과 어머니 김양순(마리아 막달레나) 사이에서 1남 2녀 중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가 딸만 2명을 낳고, 아들을 한명 더 낳고 싶어서 기도를 했지만, 기도가 들어지지 않자, 성당에서 기도중에 "그저 저를 당신의 도구로 사용하시어, 아들을 낳게만 하시고 그 아들을 당신께서 데리고 가십시오." 라는 기도를 하고 얼마 안 있어서, 아이를 잉태하였고, 그 아이가 사내아이였으며, 나중에 가톨릭 사제로 불리움을 받게 된다.

신동진 안드레아 신부의 집안과 천주교회의 인연은 신동진 안드레아 신부의 8대조 할아버지인 순교성인이며 복자이신 신태보(申太甫) 베드로(Petrus) 때부터다. 경기도의 용인 근처에서 태어난 신태보(申太甫) 베드로(Petrus)는 1795년 무렵에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여 신자가 되었다. 그의 집안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뒷날의 행적에서 미루어볼 때 그는 교육을 통해 어느 정도의 학식을 습득했던 것 같다. 1840년 전주에서 순교한 최조이 바르바라는 그의 며느리였다.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지 10년이 지난 뒤, 사촌인 이여진 요한과 함께 입교한 신 베드로는 일찍부터 주문모 야고보 신부를 만나 성사를 받고자 하였지만, 주 야고보 신부가 워낙 비밀리에 활동하였던 탓에 만날 수가 없었다. 이후 신 베드로는 1801년 신유박해가 끝난 뒤, 용인에 거주하던 순교자의 가족들과 함께 강원도로 이주하여 신앙 공동체를 이루고 살았다. 그러다가 사촌 이 요한을 비롯하여 다른 교우들과 연락이 닿게 되자, 그들과 함께 교회 재건 운동을 의논하기 시작하였다.

조선 신자들의 성직자 영입 운동은 이후에도 오랫동안 계속되었고, 그때마다 신 베드로는 이를 위한 경비를 마련하는 데 온갖 노력을 다하였다. 그러나 신자들의 희망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에 신 베드로는 영혼을 구하는 일에 힘쓰기로 작정하고, 여러 지역을 전전하며 생활하다가 경상도 상주의 잣골에 정착하여 은둔 생활을 하였다. 그동안 그는 교회 서적을 필사하여 교우들에게 나누어 주곤 하였다.1827년 전라도에서 정해박해가 시작된 지 얼마 안 되어, 신 베드로는 자신이 살던 곳에서 이 소식을 듣게 되었다. 이에 그는 가족과 함께 안전한 곳으로 피신할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전주에서 파견된 포졸들이 상주의 포졸들과 함께 잣골로 들이닥쳤다. 당시 포졸들은 이미 체포된 신자들을 통해 교회 서적을 필사하여 나누어준 사실과 그의 거주지를 알고 있었다. 신 베드로는 이내 전주로 압송되어 문초와 형벌을 받게 되었는데, 그 내용은 뒷날 그 자신이 성 샤스탕(St. J. Chastan, 鄭) 신부의 명에 따라 기록한 ‘옥중 수기’에 기록되어 있다. 이 가운데에서 다음의 내용은, 그가 신앙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혹독한 형벌을 받아야 했는지를 잘 드러내고 있다.
파일:124위 시복미사때 부모님과의 모습.jpg
2014년 8월 16일 순교자 124위 시복미사, 광화문, 순교자 후손대표로 초대되어 신자석 첫째줄에서 미사에 참석하고 있는 신동진 안드레아 신부와 그의 부모님,사진출처 교황청 L'Osservatore romano,,,
“내 다리는 살이 헤어져서 뼈가 드러나 보였으며, 앉을 수도 밥을 먹을 수도 없었다. 내 상처는 곪아서 참을 수 없는 악취를 풍겼다. 더욱이 내 방은 벌레와 이투성이였으므로, 아무도 내게 근접할 용기를 내지 못하였다. 다행히 건강한 몇몇 교우들이 부축을 해 주어 몸을 좀 움직일 수가 있었는데, 그들은 가끔 내 방을 치워 주기도 하였다. 이 애덕의 행위를 어떻게 감사드려야 할지.”

이처럼 형벌을 당하면서도 신 베드로는 결코 교회 서적과 동료들이 있는 곳을 밀고하지 않았다. 또 관장이 배교를 강요할 때면, “천주교가 없이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정욕을 고칠 수가 없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감사는 할 수 없이 신 베드로를 다른 신자들과 함께 옥에 가두어 두도록 하였고, 그는 12년 동안을 전주 옥에서 생활해야만 하였다. 그동안 그는 때때로 마음이 약해진 적도 있었지만, 언제나 용맹한 신앙심으로 이를 극복하였다. 그러다가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난 뒤에, 임금의 명에 따라 전주 장터(숲정이)로 끌려 나가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이때가 1839년 5월 29일(음력 4월 17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70세가량이었다. 신태보 베드로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신동진 안드레아 신부는 5살때부터 사제의 꿈을 꾸었다. 아버지의 누님인 인보성체수녀원의 초대멤버로 부총장을 역임한 신사라 수녀가 휴가때 신 안드레아 신부의 집을 방문할때면, 새벽미사에 꼭 막내인 안드레아를 데리고 가곤 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미사를 주례하는 신부님이 예수님인줄 알고, 고모 수녀님께 "저사람이 예수님이예요?" 질문하자, "예수님은 아니지만, 예수님을 대신하는 분이시지. 신부님이란다."라는 고모수녀님의 답변에 "그럼 나도 저렇게 될 수 있어요?"라고 질문하고, 그렇게 될 수 있다는 답변에 춤을 추면서 그때부터 사제가 되겠다고 노래를 부르며 다녔고, 이 모습을 본 어머니 김 마리아 막달레나는 5년전 신 안드레아 신부를 잉태할때 했던 기도를 떠올리며, "이제는 때가 되어 하느님께서 이렇게 데리고 가시는구나"하며 그때의 일을 가슴에 새기고 이 이야기를 누구에게도 하지 않고 침묵하며 기도에 전념했다.

그후 신사라 고모 수녀는 신 안드레아를 중학교 1학년때, 혜화동에 위치한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에서 운영하고 있는 예비신학생 모임에 데리고 가서, 그때부터 한달에 한번씩 정기적인 모임에 참석하며 사제로서의 꿈을 구체적으로 키우고 돌보게 되었다. 중학교때부터 신 안드레아는 전교생이 다 알정도로 별명이 "신부" 였으며, 학업성적이 좋아 학교를 빛낼 유명한 대학에 진학하기를 바라는 모교의 교장선생님 이하 선생님들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에 입학하여 본격적으로 사제 성소를 키워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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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진 안드레아 신부의 8대조 할아버지인 신태보베드로 순교성인 고문장면 기념화

3. 사제 서품과 교황청 외교관

2005년에 부제서품을 받고 가톨릭교회 서울대교구의 성직자가 되었으며, 이듬해인 2006년 7월 7일에 정진석 니콜라오 추기경으로부터 사제서품을 받았다. 첫번째 부임지로 서울대교구 주교좌 성당인 명동성당을 가게 되었으며, 그곳에서 전례를 담당하게 된다. 명동성당 전례담당사제의 당연직으로 당시 교구장이신 정진석 니콜라오 추기경의 전례를 주관하였으며, 은퇴하신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과 2021년 현재 교구장인 염수정 안드레아 추기경이 그 당시 총대리주교로 제직중이었는데, 이들의 전례도 함께 주관하였다. 또한 서울대교구 부제서품식과 사제서품식도 주관하였다.

이듬해인 2007년 10월에 이탈리아 로마로 유학 발령을 받았으며, 그 당시 영어와 이탈리아어, 한국어등 3개국어에 능통한 신동진 안드레아 신부는 로마 도착과 더불어 그 다음날 교황청립 우르바노 대학교(Pontifical Urban University) 교회법 전문가 과정(License 과정)인 석사과정에 입학시험을 치른후 입학하게된다. 보통 이탈리아로 유학을 가는 사제들은 약 1년간 언어공부를 한 후, 입학을 하게 되는데, 이미 이탈리아어를 수준급으로하는 신동진 안드레아 신부는 이래적으로 언어과정없이 바로 입학을 하게된다. 교황청립 우르바노 대학 석사2학년때 교황청립 외교관 학교(Pontifical EcclesiasticalAcademy)로부터 발탁되어 입학을 하게된다.

교황청립 외교관 학교입학은 한국인 사제로서는 1호 입학생인 장인남 바오로 대주교(현재 주태국,미얀마 교황대사)이후 세번째로 입학하였으며, 졸업후 임관한 한국인 성직자로서는 2호 졸업/임관을 하였다. 이후 주나이지리아 교황청 대사관에서 서기관직책으로 봉직하였다. 교황청립 외교관 학교는 입학부터가 특별하다. 공개전형이 아니라, 교황청에서 매년 북아메리카, 남아메리카, 유럽,아프리카,아시아,오세아니아 등 6개 대륙에 각각 2명의 정원을 추천받아 교황청 대사관을 통한 후보자에 대한 비밀조사와 비공개 특수 면접시험을 치룬 후에 입학을 하게 되기 때문에, 세상에 공개되지 않은 교황청 외무부 산하 특별 교육 기관이라 할 수 있다.

신동진 안드레아 신부는 3년이라는 시간을 허락받고, 그 기간안에 교황청립 우르바노 대학에서 교회법 전문가 과정인 석사학위를 취득한 후, 교황청립 라테란 대학에서 교회법 박사학위를 취득하였으며, 동시에 교황청립 외교관 학교에서 국제법 석사,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또한, 교황청 외교관으로서 가추어야 할 기본 덕목인 교황청 공식 언어 8개의 언어를 능숙능란하게 할 수 있는 특별 훈련을 받게 된다.
파일:FB_IMG_1532369043437.jpg
베네딕도 16세 교황을 알현중인 신동진 안드레아 신부, 당시 교황청립 외교관학교장 이후 교황청 성직자성 장관 추기경인 벤냐미노 스텔라 대주교시절 유일한 한국인인 신동진 안드레아 신부를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다.

4. 가톨릭대학교 성심교정 교수

신동진 안드레아 신부는 귀국 후, 가톨릭대학교 성심교정 ELP 학부대학 정교수로 재직하였으며, 교목부실장의 보직을 수행하였고, 한국 최초의 교황청립 교회법 대학원을 설립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5. 본당사목자

신동진 안드레아 신부는 본당 사목자 경험도 풍부하다. 첫 본당인 명동 주교좌 성당, 장안동 성당, 등촌3동 성당, 문정동 성당, 이탈리아 페루지아 성요셉 성당, 프랑스 툴루즈 성필립보 성당, 스페인 아빌라 주교좌 성당, 영국 런던 주교좌 성당 등에서 사목활동을 하였으며, 신자들의 영적 함향을 위해 7성사와 미사 강론 뿐만아니라, 피정지도, 특강 등으로 가르침의 직무를 충실히 하였다. 또한, 본당 신자들의 가정 방문과 병문안과 병자영성체등을 통해 신자들의 삶의 자리에서 그들의 영적,육체적 삶을 함께하는데 적극적인 태도를 항상 유지하고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jHg5DJKqL4E
https://youtu.be/jHg5DJKqL4E?si=-H6O16S2ar9pYpih

6. 은수자 영신수련과 관상 기도

신동진 안드레아 신부는 교황청에 재직당시 알프스 산맥에서 은수자의 삶을 살고 있는 관상 수도자들을 조사하는 팀에서의 경험을 통해 관상기도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후 한국으로 귀국한 후에, 강원도 춘천과 경기도 양평의 경계지역에서 오랜시간 은수자로서 영신수련을 한 유병일 이냐시오 신부를 만나 관상 기도를 배웠으며, 그리스도의 현존안에서 관상 수련을 1년동안의 대침묵과 함께 받았다. 그 후 수년간 지속적으로 관상 기도안에서 그리스도의 현존안에 사는 삶의 영성을 삶에 구현하는데 온 힘을 다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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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진 안드레아 신부의 은수자 영신 수련터, 강원도 깊은 산골, 이곳에서 전기와 수도 없이 고행을 하며 대침묵 수련을 하였다

7. 영적 면담과 심층 영성 코칭

신동진 안드레아 신부는 서울대교구 임상사목교육(CPE)을 이수한 후, 서울특별시 신촌에 위치한 연세대학교 신촌 세브란스병원에서 원목사제로 재직하면서 환자들과의 영적 면담을 지속적으로 하였고, 서강대학교 국제 대학원에서 코칭 전문가(MCTP)과정을 이수한 후, 국제 코칭 연맹(International Coaching Federation)에 정회원으로 등록되었으며, 현재 PCC(Professional Certified Coach) 자격증을 취득하였고, 코칭 최고 자격인 MCC(Master Certified Coach) 자격증을 취득을 위한 후보자로 30,000 시간 이상의 전문 코칭 면담을 지속하고 있다. 또한 신동진 안드레아 신부는 심층 영성 코칭의 창설자이며, 전문가이다.
파일:심층 영성 코칭하고 있는  신동진 안드레아 신부.jpg
심층 영성 코칭하고 있는 신동진 안드레아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