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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2 21:45:56

스파르타식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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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교육 방식
2.1. 출생2.2. 합숙 시작2.3. 전투 훈련2.4. 학문 교육2.5. 인내심 단련2.6. 전사로의 인정2.7. 통과의례
3. 비판4. 현대의 쓰임5. 매체에서의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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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고게(Άγωγή (Agoge) / Spartan Style Education)는 스파르타 교육 제도를 뜻한다. 현대에서는 아동 학대에 해당한다.

2. 교육 방식

2.1. 출생

스파르타의 혹독한 교육태어날 때부터 시작된다. 아이가 태어나면, 다섯 명의 검사관들이 '레세'에서 꼼꼼한 검사를 거친다. 여성의 경우는 강인한 전사를 낳는 근원이었으므로 귀중하게 생각되었다. 남자아이는 골격에 이상이 있거나 기형, 혹은 작게 태어났는지 따지고, 생식기 부위가 이상이 없는지 하체부분이 안 빈약한지 확인하고 만약에 하나라도 하자가 있으면 바로 절벽으로 떨어뜨려 죽였다. 위에서 여성을 귀중하게 생각한다 했지만 예외는 아니라서 16세 이후 2차성징 징후가 나타나지 않으면 역시 절벽에 떨어뜨려 죽였다.

2.2. 합숙 시작

7살까지 집에서 아빠에게 기본적인 전투상식, 소양, 철학, 예절을 배운 뒤 남성들은 7살이면 전사가 되기 위해 아고게(ἀγωγά)를 시작한다.

남자 아이들은 이때부터 집을 떠나서 집단 합숙을 하면서 교육을 받게 된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7살부터 30세까지 군대에 복무하게 되는 것이다.[1] 즉, 스파르타식 교육에서 부모와의 접촉, 가정의 따스함은 사치다.

입소 즉시 벌거벗겨서 채찍질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 채찍질을 당하는 동안 비명을 참는 아이들만이 합격이라는데 안 그런 아이는 계속 채찍질을 했다고 한다. 아래 생활 방식을 보면 매독으로 안 죽는 게 이상해 보일 정도다.

합숙지에서 아이들의 침대는 풀을 뜯어 모아서 만들어야 했다. 겨울에도 이불을 안주며 오히려 풀 안에 가시를 섞어 놓았다. 겨울에 자면 얼어 죽으므로[2] 자다가 찔려서 깨어나게 하기 위해서였다. 목욕1년 중 몇 번밖에 못했다. 이런 비위생적이고 가혹한 환경 때문에 부상, 질병에 수시로 노출되었음은 물론이다.[3]

2.3. 전투 훈련

일주일간의 합숙 생활에 적응되면 곧바로 '스파르타식 훈련'이라고 불리는 훈련에 돌입한다. 하루 24시간 중 거의 10시간을 군사훈련으로 보내며, 기초체력 훈련, 창술, 방패술, 방진, 검술, 근접전, 박투, 레슬링 등을 배웠다. 하루에 평균 7시간의 수면시간, 1시간의 식사시간이 주어졌다.

이 전투 훈련은 음악에 맞춰서 집단으로 을 추듯이 행해졌는데, 행군, 창술, 방패술, 검술 등 각각의 분야에서 일정하게 정해진 동작 대로 음악에 맞춰서 움직이는 훈련을 했다. 이렇게 설명하면 뭔가 기묘해 보이는데, 중국권법에서 흔히 하는 투로 수행, 태권도 품새와 비슷한 무술 수련 방식이 있었다고 생각해 보면 이해하기 쉽다. 음악에 맞춰서 일정한 체조를 하면서 체력과 무술 기술을 동시에 단련했던 것이다.[4]

2주일에 한번씩 훈련생들을 모아놓고 둘로 무리를 나눠 배운 것들을 시험했다. 시험에서는 정확한 대열유지, 신속한 대형교체, 방패술의 팀워크 등이 시험되었다. 또한, 1:1 레슬링을 벌이기도 하였다.

훈련생들은 식용초, 독초에 대한 구분법을 외워야 했다. 여기까지는 그런데로 쓸만한 실용적인 지식이지만 스파르타는 그걸 넘어 실제로 독초에 대한 면역력을 키운다는 미명하에 이들은 이틀에 한 번씩 소량의 독초를 복용해야만 했다.[5]

2.4. 학문 교육

하루 2시간씩 총 6시간 동안 수학, 문학, 철학을 배웠다. 하지만 이들의 교육을 읽고 쓰고, 간단한 계산을 하는 것 정도로 끝났다. 생각 많은 전사는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정도 만으로도 당시로서는 고급 교육이었는데, 당시 그리스에서 가장 부유하고 발전된 아테네의 문맹률도 80%를 넘었다.[6] 심지어 그리스보다 이후에 들어선 로마 시대에는 전체 인구의 무려 97% 가까이가 문맹이었다.[7]

그런데 말은 잘했다. 아테네인들의 기록에 의하면 스파르타인들은 수사법의 달인으로, 꼭 필요한 말만 가끔 가끔 하지만 그때마다 치명적인 언변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과묵한'이라는 뜻의 영어 단어 'laconic'의 어원이 바로 이 스파르타가 있던 라코니아 지방의 이름이다. 아테네 사람들은 스파르타 사람들에 대해서 이렇게 얘기했다고 한다. "스파르타인들은 적이 얼마나 되는지를 묻지 않는다. 다만 적이 어디에 있는지 물을 뿐이다." 또 소크라테스 대화편에서는 프로타고라스가 스파르타인은 모든 면에서 최고의 교육을 받았지만 모르는 척을 할 뿐이라며 그들과 대화를 하면 짦은 언명으로 그대의 지식은 어린애 수준임을 폭로시켜 줄 것이라고 말했다. 프로타고라스가 소피스트의 대표적인 인물 중 하나임을 감안하면 의심의 여지가 없어보인다. 이러한 면모는 페르시아 전쟁에서 특히 두드러지는데, 흙과 물(나라의 주권을 상징)을 바치라고 요구하는 페르시아 사신을 우물에 집어던지면서 그 밑에 많이 있으니 실컷 가져가라라고 비꼬거나 테르모필레 전투 당시 무기를 버리고 항복하라는 페르시아인의 말에 그럼 니네가 와서 가져가 봐라라고 받아치는 등 재치있으면서도 침략자인 페르시아인들을 조롱하고 도발하는 뼈있는 언변을 보여주었다.

아무래도 수업시간 자체는 짧지만 그만큼 커리큘럼을 효율적으로 압축해서 핵심 교육만을 제공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2.5. 인내심 단련

스파르타인들은 맞으면 피부가 단단해진다고 생각했다. 15세 이전에 일 년에 한 번씩 훈련생들을 나무 형틀에 묶어놓고 회초리, 채찍으로 온몸을 피멍이 들어 터질 정도로 후려쳤다. 그 다음, 뜨거운 물을 수차례 몸에 끼얹어 피부를 연하게 한 다음 자갈밭에 굴렀다. 그렇게 하면 피멍이 든 곳이 약해져 터지는데, 그때 차가운 강물에 재빨리 몸을 담가 몸을 식혔다. 그렇게 하여 전신의 피부를 단단하게 단련시켰다.[8]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런 단련법에 견디지 못하고 쇼크사나 파상풍으로 죽는 아이들도 있었다. 방법이 잔인하고 무식해서 그렇지 피부가 단련된다는 이야기는 아주 일리가 없는 말은 아니다. 굳은살이 박히는 것도 있고, 타격에 대한 정신적인 저항력이 강해지는 것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인간의 피부에 굳은살이 배어 작은 자상에 대한 어느정도 두꺼워진 피부의 저항력이 올라가 격렬한 전투나 행군중의 작은 찰과상같은 웬만한 작은 자상엔 갑옷이 커버하지 못하는 부위가 크게 안 다치는 정도였을 뿐이고 이나 같은 날붙이에 크게 상처가 나도 버티는 금강불괴가 되는 건 아니었다.

거기에 근본적으로 이 아이들은 15세 이전, 그러니까 아직 성장 중인 아이들[9] 영양섭취가 부족하던 전근대 사회에서는 성장기가 늦어서 10대 중반에 사춘기가 시작하던 사람이 많았는데 아직 근육이 다 자라지 못한 이 시기에 아동을 험하게 쳤다가는 평생의 장애를 가져올 수 있다. 결국 훈련이라는 변호조차 못 할 고문이고, 앞으로 전사로 자라날 인재들을 죽이거나 장애인으로 만드는 짓밖에 되지 않는다. 물리적인 효과보다는 차라리 정신적인 효과, 그러니까 지속되는 고통으로 개개인의 정신을 웬만한 고통엔 인내하고 쉽게 참을 수 있게 만들거나 두려움엔 둔감하게 만든다던지 죽음의 공포에 보다 무감각하게 만들거나 하는 원시적인 인격 말살 효과 혹은 정신력 단련 효과는 있었을지도 모른다. 군사적으로 신체 단련의 필요성을 경시하거나 단련하지 않는 군대는 없었지만, 스파르타식 교육은 정도가 심하고 비효율적이었다.

아고게의 일환으로 스파르타에서는 소년들을 대상으로 채찍질을 하고, 소년들은 채찍질을 버티는 것을 겨루는 대회가 있었다. 이 대회는 로마 제국 시대까지 지속되었는데, 로마 제국 시대에는 그냥 관광용 퍼포먼스였다.[10]

2.6. 전사로의 인정

12세가 되면 자신이 입던 셔츠를 반납하고 망토를 걸쳤다.[11] 이것이 스파르타 군복 역할을 했다. 12세가 된다는 것은 어엿한 ' 전사'로 취급받게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영화 300에서처럼 거추장스럽게 망토만 두르고 알몸으로 싸우지는 않았다. 전신을 갑옷으로 두르고 나서[12] 망토를 걸치고 있다가 전투가 시작되면 망토를 벗어던지고 전투에 임했다.

16세가 되면 저녁은 부대에서 먹었지만 나머지 두 끼는 알아서 구해먹어야 했다. 알아서 구해먹는 방법은 단 하나, 마을로 내려가서 음식을 훔쳐먹는 것이었는데 상대가 노예 계급인 헤일로타이라면 살인도 마다하지 않고 오히려 권장했다.[13] 물론 시민들에게도 훔치도록 엄격한 교육을 시행했다. 음식을 훔치다 걸리면 죽도록 두들겨 맞았는데, 그 이유는 음식을 훔쳐서가 아니라 들켰기 때문이다.

전설처럼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어떤 소년이 여우를 훔쳤다가 죽었는데, 품 속에 안겨있던 여우가 갑갑함을 못 이기고 소년의 내장을 물어 뜯어서 그렇게 됐다고 한다. 여우 주인의 언급에 따르면 소년이 여우 주인에게 붙잡혀 심문받는 중이었는데, 들키지 않기 위해서 아픈 척도 안 하고 계속 내가 아니라고 대답하고 있다가 갑자기 쓰러졌다고 한다. 이처럼 도둑질 살인은 심지어 철저하게 긍정하고 권장되어서, 최후까지 살아남는 사람이 강자라는 그야말로 스파르타다운 약육강식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다.

2.7. 통과의례

10년 이상을 보내고 20살까지 살아남는다 하더라도 전사로 인정받기 위해서 또 다시 목숨을 건 훈련과 선발과정을 거친다. 스파르타의 노예계층 마을, 그러니까 메세니아 지방을 습격하여 노예로 삼은 헤일로타이들을 죽이는 것. 들통나면 법의 처벌을 받는데, 실제 행해졌는지는 불명. 애초에 이런 짓거리를 하면 노예들이 너죽고 나죽자고 다 같이 자포자기로 나갈 수 있기 때문에 기록상으로 남아만 있고 실제로는 그런 짓까지는 안했다는 주장도 많다. 다만 불순분자에 속하는 헤일로타이를 암살해 의도적으로 반란을 차단할 때 일부러 소년들에게 통과의례로 시켰을 가능성은 있으며, 기록에 헤일로타이들이 자주 반란을 벌이다 진압됐다고 나와 있는데 소년들에게 이 반란진압의 일부를 시켰을 가능성도 있다. 물론 이거 말고도 메세니아-라코니아가 스파르타에 반란을 일으킬 이유는 차고 넘쳤지만...

아고게를 끝낼 20세가 되면, 최후의 통과의례/졸업시험으로 혼자서 을 들고 올라가 야생동물을 잡아와야 했다. 영화 300에서처럼 육식동물을 잡은 경우는 드물었고 대부분 산양이나 사슴 같은 초식동물을 잡아오는 편이었다. 그러나 훈련생들은 늑대 멧돼지를 사냥하려고 부단히 노력하였는데, 강한 동물을 잡아올수록 자신이 강한 전사임을 입증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멧돼지도, 늑대도 매우 위험한 짐승들이었기에 아고게를 마친 스파르타 청년들 중에는 만용을 부리다 죽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3. 비판

아기의 신체를 검사하고 미달하면 죽이는 부분부터 비과학적인데, 어릴 때 체중이 덜 나가거나 키가 작더라도 성장하며 평균보다 커지는 예는 흔하다.[14] 오늘날의 프로 운동선수들도 초등학생~중학생 초반까진 또래보다 작고 약했다는 회고를 하는 경우가 많다.[15][16] 다만 중학교 졸업 이후에도 키가 작은 사람들은 최종 키가 작을 확률이 높다. 고등학교 정도면 성장이 완료되거나, 거의 멈추고 급성장도 끝나기 때문이다.

훈련 과정은 그야말로 똥군기의 극치였고, 아이들의 생명이나 정신 건강 따위는 쥐꼬리만큼도 고려하지 않은 가혹한 훈련 때문에 죽거나 장애인이 되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일부는 살아남았지만, 그렇게 훈련을 못 견디는 아이들을 버려가면서 평생 싸우는 것만 배운 소수의 엘리트 전사들로는 도시국가 주변을 정복할 수는 있을지언정 그리스 전체의 패권을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스파르타 군대가 강력했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오늘날의 사람들은 스파르타의 군대를 보고 혹독하고 비인간적인 훈련 과정을 거친 만큼 적어도 군사력만큼은 동시대 국가들의 어떤 군대도 넘보지 못할 수준으로 압도적이었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정작 스파르타 군대는 그렇게 압도적으로 잘 싸웠던 군대가 아니었다.[17] 분명 수십 년 동안 훈련받고 중무장을 갖췄으니 헤일로타이 저항세력이나 중소 폴리스의 군대보다는 당연히 잘 싸웠고,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승리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군사적으로 보면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서로 여러 번 승패를 주고받았으며, 심지어 그 이긴 것마저 페르시아의 도움을 받아가며 이긴 거다. 이후로도 다른 폴리스의 군대보다 압도적으로 잘 싸웠다는 기록은 찾기 어렵다. 결정적으로 레욱트라 전투에서는 6,000명의 테베 동맹군에게 2배가 넘는 군대로 맞섰음에도 전멸하여 30년의 짧은 전성기의 종지부를 찍는다. 결국 훨씬 짧은 훈련과 인간적인 생활로도 스파르타와 맞먹는 군대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고, 스파르타의 비인간적인 훈련이 얼마나 심각한 낭비인지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 때문에 플라톤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스파르타를 엄청나게 비판한다.

스파르타식 교육을 받은 스파르티아테스들은 아고게로 인해 초래된 폐쇄성과 인력 소모로 숫자가 갈수록 줄어갔다. 결국 소수의 스파르티아테스들이 다수의 페리오이코이들과 소수의 헤일로타이, 그리고 동맹군들을 지휘하는 체계가 되었다. 스파르티아테스들은 당대에도 무용으로 이름 높았고, 레욱트라에서도 소수의 우익 스파르티아테스가 다수의 좌익 테베군에 둘러싸였을 때도 왕이 전사하기 전까지는 스파르티아테스들이 우세했음을 크세노폰은 암시한다. 그러나 사회 구조를 박살 낼 정도로 과투자 한 스파르티아테스가 신성부대 같은 다른 폴리스의 일반적인 정예병들보다 월등히 강했다는 기록은 그 어디에도 없다.

현대에 와서도 훈련이 잘 된 군대의 가치는 매우 높고, 스파르타가 추구했던 병사 개개인의 전투력도 중요한 요소이기는 하지만, 전술 훈련을 통해 실전에서 어떻게 유기적으로 움직여야 하는지 아는 것, 그리고 병과간 적절한 조합이 그보다 몇 배는 더 중요하다. 뛰어난 참모장과 더불어 병사들간의 호흡이 잘 맞아 떨어져서 여러 번의 어려운 전투에서 승리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게다가 스파르타의 훈련이 일대일 전투에서 유의미한 스펙 상승을 불러왔냐면 그것도 아니다. 오랫동안 고문에 가까운 가혹행위를 참아왔으니 고통을 더 잘 참을 수는 있었지만, 스파르타 군인들은 사실상 인격이 말살된 인형에 가까웠다. 막말로 내구도가 오르는 것도 아니고 사람인 이상 한 번에 급소를 찔리거나 팔다리가 날아가는 중상을 입으면 이들도 무력화되는 것은 똑같았다.

스파르타군이 생각보다 다른 폴리스와의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지 못한 것은 팔랑크스 방식에 대한 이해의 부족이 크다. 그리스 세계에서 전투라 함은 보통 팔랑크스끼리 맞붙는 전투를 의미하고 호플리테스들이 한데 모여 엄중히 전열을 유지하다가 펠타스트나 기병들이 끼어들어 적 진형에 균열을 발생시키고 그 틈으로 호플리테스들이 밀어붙여 붕괴시키는 것이 팔랑크스 싸움의 기본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개개인의 싸움 실력? 전투력? 의미 없다. 어차피 호플리타이는 투구, 방패, 정강이보호대로 중무장하므로 진형만 제대로 갖추면 제 아무리 스파르티아테스라도 빈틈을 찾기란 쉽지 않고, 그렇기 때문에 진형 유지 능력이 핵심인 팔랑크스 싸움에서 호플리테스 개개인의 능력은 별로 싸움에 큰 변수로 작용하기 힘들다. 따라서 일년에 몇주일 훈련받은 군대와 평생 훈련받은 스파르타의 스파르티아테스도 팔랑크스로 맞부딪히면 전투력이 비슷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여기에 과도한 기동까지 강요시키면 오히려 안 그래도 머릿수에서 밀리는 스파르티아테스가 더욱 불리해질 수밖에 없는 것. 애초에 팔랑크스 방식 자체가 고급 장비를 갖출 여력은 되지만 훈련을 길게 받을 여유는 없는 중산층 시민병에 최적화된 전술이기 때문에 굳이 몆십 년씩 훈련받을 필요가 없는 방식이었던 것인데, 스파르타는 이를 완전히 간과한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훈련한다고 해서 개인이 팔랑크스를 깨부수고 전투에 균열을 낼 만한 무용을 갖추지도 못했다. 이는 테베가 스파르타의 팔랑크스를 전술적으로 완파한 레욱트라 전투에서 증명되었다. 스파르타식 훈련이 빛을 발하려면 그다지 많지 않은 인원이 뒤엉켜 싸우는 난전 형태의 전투가 되었어야 한다.

스파르타 시민들 가운데에서 아고게를 면제받을 수 있는 특권을 지닌 이들은 바로 의 아들들, 그것도 서열이 매우 높은 왕자들 뿐이었다. 스파르타 왕의 아들, 특히 후계자가 될 남자아이들이 행여라도 아고게의 혹독함을 견뎌내지 못하게 될 때에 닥쳐올 후폭풍을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왕위를 계승할 확률이 높은 왕의 아들들은 아고게를 거치지 않고 따로 군사훈련과 교육을 받았다. 다만 왕위 계승 순위가 떨어지는 왕자들은 아고게를 수행했다. 테르모필레 전투의 활약으로 유명한 레오니다스 1세가 대표적이다.[18] 그리고 이는 반대로 말하자면 스파르타인 본인들도 아고게가 보통 사람들이 평범하게 소화할 수 없는 미친 짓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소리다.

이런 스파르타식 교육을 정면으로 비웃을 수 있는 사례가 바로 스파르타 역사상 최고의 군주로 평가받는 아게실라오스 2세다. 그는 선천적으로 왜소한 체구와 절름발이 장애를 안고 태어났지만, 시민 계급의 수가 감소하던 시기에 태어나서 그랬는지 살해당하지 않고 살아남았다. 성장한 그는 아고게를 완전히, 그것도 수석으로 수료하고 왕위에 올라서는 정복왕으로 활동하며 팔순이 넘은 나이에도 원정을 떠날 정도로 강건했다.[19] 원칙대로라면 태어나자마자 절벽에서 던져졌어야 할 아기가 아고게 최우수 졸업생이 되고 정복 군주가 되고 스파르타 역사상 제일 뛰어난 군주라는 평가까지 받게 된 것이다. 아고게가 얼마나 쓸데없는 짓이었는지 알 수 있는 사례이다.[20]

4. 현대의 쓰임

현대에는 스파르타식 교육이라고 하면 아동 학대에 불과하지만 비유적인 의미로 학교ㆍ학원에서 빡세고 강제적으로 통제하는 교육을 의미한다. 학교와 학원에서 숙제를 엄청나게 내 주고, 안 해 오거나 안 들고 왔다든지, 학원에서 본 시험 성적이 낮아 체벌과 함께 재시험을 봐야 하는 경우 통과될 때까지 계속 붙잡아 놓는 것이 그 예. 물론 과거 스파르타에서 했던 것 정도는 아니다. 원초적인 의미에서의 스파르타 교육은 앞서 언급되었듯이 당대에도 비판받았고, 현대에 이런 교육 방식을 시행하는 곳이 있다면 엄청난 사회적 비난뿐만 아니라 법적 처벌까지 받을 것이다. 바꿔 말하면, 아고게가 21세기 실정에 맞게 열화(劣化)되고 변형된 것이 현재의 스파르타식 교육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재수학원들이 아예 재수생들을 위한 기숙사까지 미리 만들어놓고 재수생들이 입시에 합격할 때까지 기숙사에서 먹고 자게 하면서 집으로는 가지 못하게 막으면서 오직 학원에서 공부만 하도록 살라며 강요하는 일도 있는데, 이것도 스파르타식 교육이라고 선전한다.

대표적인 스파르타식 학원은 과거 경상도에서 유행했던 영어학원인 문깡 외국어학원이다. 서울ㆍ경기에도 몇 군데 있었지만, 이 학원도 레벨이 높아짐에 따라 숙제량과 시험량이 매우 많고 재시도 어려워서 학생들의 원성을 샀었다.

한국에 소위 스파르타식 교육이라고 불리던 이 가혹한 교육 문화가 성행한지 약 20년이 지난 후 저출산이 본격적으로 심화되자,[21] 스파르타가 저출산으로 자유시민 계급이 줄어들어서 국력이 쇠했던 역사를 언급하며 스파르타식 교육의 효과가 나온 거라고 비꼬는 농담이 나오기도 했다. 흥미롭게도 한국에서 사교육으로 인한 양육비 부담이 저출산의 주요 원인 중 하나로 꼽히는 것 처럼, 스파르타 역시 강인한 전사를 양성하는 교육 체계였던 아고개가 시민들에게 지나친 부담을 지우면서 자식을 갖는 것을 기피하게 만들었다. 물론, 스파르타의 쇠퇴에는 아고게의 부담 외에도 기본적으로 엘리트 군인들이 특권을 가지고 다수의 노예들은 생산활동에 투입시키는 착취적 약탈 경제 시스템의 폐해도 결정적으로 작용하기는 했다. 이는 군국주의의 착취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스파르타가 군국주의 국가의 정석임을 보여주는 사례라는 점을 감안하면 여러모로 의미심장한 대목이다.

현재는 전 세계 역사를 모두 열람할 수 있는 정보화 사회에 들어섬에 따라 이를 접한 많은 독자들은 단순히 스파르타만의 전유물이라 보기엔 애매하다는 이야기를 많이 한다. 특히 노예 해방과 장애인에게 소복한 삶과 복지, 그리고 사회 진출 보장을 챙겨준건 무려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뒤 시작한 것이고[22], 생각보다 그 역사가 그다지 길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길어봐야 70년 남짓한 시기가 고작이며, 이것은 국가나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다.[23]

5. 매체에서의 등장



[1] 현대로 치자면 초등학교 1학년부터 20대가 끝날 때까지며 아동, 청소년, 청년기를 다 군대에서 보내는 것이다. 북한 남성의 10년 의무복무보다 더했다. [2] 사실이긴 하다. 추운 곳에서 자다가 영영 깰 수 없게 되는 경우가 있어서 혹한지에서 조난당할 땐 잠들지 않거나, 누가 옆에서 깨우는게 중요하다. 사실 이 추울 때 잠이 온다는 것부터가 단순히 피곤해서 그런 게 아니라 몸이 견디질 못해서 의식을 잃는 과정이다. 그래서 그 전에 스스로 깨어나거나 누가 깨워주는 게 중요한 것. 이는 저체온증의 증상 중 하나로 실제로 저체온증 상태에서 수면까지 겹치면 죽을 확률이 높으며, 전문가들도 잠들기 전에 깨어나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냥 이불을 주고 난방을 더 틀어주면 해결되는 문제이므로 완벽한 뻘짓이다. [3] 이런 말도 안 되는 교육방침의 이유는 흔히들 아는 스파르타 체제를 탄생시킨 리쿠르구스 때문인데 그는 긴 잠, 따뜻한 물로 목욕하는 것, 나태가 스파르타를 약하게 만들 것이라 말했는데 사실 세 번째 것은 틀린 얘기는 아니고, 두 번째 것도 스파르타 뿐 아니라 그리스권에서는 그렇게 믿는 사람이 많았으니 스파르타만의 문제는 아니었지만. 문제는 그리스에서도 따뜻한 물로 목욕할 사람은 다 했고, 그리고 거기서는 찬물로 씻을지언정 씻기는 씻었다. 무엇보다 아무리 그래도 그리스권에서 잠을 잘 자는 것마저 저렇게 못하게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잠을 자지 못하게 하는 것이야말로 문제인데 수면 부족이 만성화되면 건강에 큰 문제가 생긴다. [4] 직접적으로 비교할 수는 없지만 페르시아의 전사 양성 체육 프로그램인 주룩하네 타악기를 곁들여 음악에 맞춰 동작을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5] 현대로 치면 가스실습 포지션이다. 다만 가스실습은 인체에 치명적인 해는 없는 반면 이쪽은 어떤 후유증이 생길지 모른다. [6] 다만 아테네는 부유층에서 빈민층까지 폭넓게 시민권을 주었기 때문임을 감안해야 한다. [7] 그래서 로마 시대에는 아예 돈을 받고 다른 사람들 대신에 글씨를 읽어주거나 써주는 직업까지 있었다. [8] 실제로는 이렇게 해도 멍든 부위는 터지지 않는다. 피부가 약해진 것이 아니라 진피 내부의 혈관이 이미 터진 것이 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과장된 표현이다. [9] 영양보충이 부족할 리 없는 현대에도 남성은 만 20~21세(세는나이 21~22세)까지 성장하는 경우도 있는만큼 이 시대에는 더했을 것이다. 흔히 어른들이 조금 키가 작은 중3이나 고등학생들에게 군대 가서도 큰다 라고 말하는게 이것이다. [10] 로마 제국 시대에는 아테네 스파르타를 높이 사서 속주세를 면제해줬는데 취급이 미묘하게 달랐다. 아테네가 문화 도시라면 스파르타는 관광 도시였다. 산천이 아름답고 문화유산이 대단한 관광이 아니라, 스파르타인의 풍속을 관광상품으로 삼았던 것이다. [11] 영화 300에 나오는 것처럼 붉은 망토는 아니었다. 그 당시 붉은 망토는 희귀한 물건이었다. [12] 하지만 스파르타는 가난했던 도시국가라서 흔히 생각하는 그리스식 갑옷으로 무장한 중보병은 매우 적었다고 한다. 대부분은 철로 만든 중갑옷보다는 가죽으로 만든 경갑옷을 입고 다녔으며, 그리스 전역에서 그랬듯 천으로 만들어졌던 린넨 갑옷도 각광받았을 것이다. [13] 일부러 건장하고 힘센 헤일로타이들을 죽이게끔 하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살려두면 혹시나 반란의 주동자가 될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14] 키가 작은 사람들이라도 중학교 2~3학년쯤이면 급성장을 하기 시작해서 장신들은 고등학교 입학 이후에는 거의 대부분 체구가 또래보다 큰 편이다. [15] 예를 들면 김광현 장신이지만 중학교 초반까지는 오히려 체구가 작은 편이었다.(중1때 150cm) 되려 그 작은 신체에 적응해서 기술과 플레이 스타일을 확립해가다 갑자기 훅 커버리면서 신체 밸런스가 망가져 고생한 선수들도 많을 정도. [16] 선수는 아니고 아이돌이지만 피프티 피프티의 하나도 장신이지만 중학교 초반까지만 해도 키가 작아 중학교 1학년때는 147cm였다. [17] 플라톤이나 크세노폰 같은 학자들 역시 무자비한 가혹행위를 통해 양성된 전사 개개인의 전투력과 근성이 그야말로 일당백이었다고 착각했을 정도. [18] 레오니다스는 비록 왕자였으나 형이 둘이나 있었기 때문에 아고게를 거쳐야 했다. 두 형이 모두 아들을 남기지 못하고 죽는 바람에(큰형은 을 하나 남겼으며 레오니다스는 왕위 계승을 위해 이 조카와 결혼한다) 예기치 않게 왕위를 계승하게 된 것이다. [19] 기원전 4세기 사람이 무려 84세까지 장수했다! [20] 물론 아게실라오스 2세 시기의 스파르타는 재위 초창기에 전성기를 걷다가 중반에 전성기가 흔들리며 말엽에 쇠퇴하였지만, 엄밀히 따지면 그동안 쌓여온 병폐가 하필 아게실라오스 2세의 말엽에 터진 것에 가깝다. [21] 출산율이 급격하게 떨어지기 시작한 건 2010년대 후반부터고 스파르타식 교육이라는 용어가 한국에서 보편적으로 쓰이기 시작한 건 2000년대 중반부터지만, 아이들에게 엄청난 공부량을 강요하는 교육문화 자체는 그 이전부터 존재했다. [22] 최초의 사회보장제도는 이보다 60년 전 독일의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1883년 의료보험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사회보험 제도를 시행하면서 부터 태동했으나, 당시 유럽의 정치는 공산주의, 사회주의, 민족주의, 왕당파, 파시즘 등이 얽혀 불안정했고 2차 대전으로 이러한 부분이 어느정도 정리가 된 후에야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진다. [23] 흔히 스파르타식 교육과 같은 주제로 언급되는 입시위주 교육도 모태는 프로이센 왕국의 교육 시스템에서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