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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8-14 14:49:13

스테판 쿨리니치

보스니아 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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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5C337><colcolor=#6D7585> 보스니아 제3대 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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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판 쿨리니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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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jepan Kulinić}}}
출생 미상
사망 1236년 이전 (향년 불명)
재위 보스니아
1204년 ~ 1232년
아버지 쿨린
어머니 바이카 보이슬라바
배우자 안실라
자녀 시비슬라프
가문 쿨리니치 가문

1. 개요2. 행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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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기록상에 등장하는 보스니아 반샤그 제3대 반(Ban).

2. 행적

보스니아 반샤그 제2대 반(Ban) 쿨린과 자후믈례 공작 자비다의 딸이자 세르비아 대공 스테판 네마냐의 여자 형제인 바이카 보이슬라바의 아들이다. 1204년 아버지가 사망한 뒤 보스니아 반이 되었다. 그의 치세에 대한 기록은 매우 부실해, 오직 교황청과 헝가리 왕국간의 서신에서만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1216년, 교황청은 보스니아에 보고밀파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교황 특사를 파견해 보고밀파를 잠재우려 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220년대에 프랑스 남부에서 기승을 부리던 카타리파에 대한 십자군이 단행되고 있을 때, 니케타스라는 카타리파 대립교황이 보스니아에 거주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니케타스가 실존했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헝가리 왕국은 점점 독립적으로 행동하는 보스니아에 대한 종주권을 되찾기 위해 이 소문을 이용하기로 했다. 1221년, 교황 호노리오 3세는 특사 아콘시오를 보스니아로 파견했다. 아콘시오는 보고밀파가 어린아이들에게 모유 수유를 하면서 이단 교리를 설파한다고 주장했하며 이를 박멸하려 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다가 병사했다. 이후 교황은 헝가리 국왕 언드라시 2세에게 군대를 일으켜 보스니아에 만연하는 이단을 토벌하기 위한 십자군을 단행하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언드라시 2세는 헝가리 국내 귀족들간의 대립이 심각했기 때문에 이에 응하지 못했다.

십자군 결성이 지지부진해지는 사이, 보고밀파의 위세는 갈수록 강해져 보스니아 전역에 퍼졌을 뿐만 아니라, 남부 헝가리(현재 크로아티아) 지역, 심지어 이탈리아 북부와 프랑스 남부까지 퍼졌다. 1225년, 요안니스 앙겔로스[1]는 칼로차 대주교 우그린 차크의 독려에 따라 보고밀파를 응징하기 위한 십자군을 단행하겠다고 맹세했다. 그러나 그는 별다른 군사 활동을 벌이지 않았고, 1227년 새 교황 그레고리오 9세로부터 어서 십자군을 단행하라는 요구를 받았음에도 별다른 행동을 하지 않았다.

그동안 스테판의 행적은 별로 전해지지 않으나, 아버지와는 달리 가톨릭을 신봉했고 종교 재판소가 자국의 영역인 비테즈에 신설되어 수십 명의 보고밀파를 화형시키는 걸 용인해 신망을 잃었던 것으로 보인다. 1232년, 보스니아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스테판은 축출되었다. 이후 마테이 니노슬라프가 보스니아의 새 반이 되었다. 교황 그레고리오 9세는 1236년 8월 8일자 서신에서 우소라의 크네즈이자 '사망한 보스니아의 반 스테판의 아들' 시비슬라프를 거론했고, 스테판의 미망인 안실라를 보호하며, 오스트로고니아 대주교에게 안실라가 괴롭힘을 당하지 않도록 잘 지켜달라고 당부했다. 이로 볼 때 스테판은 1236년 이전에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1] 동로마 제국 황제 이사키오스 2세와 헝가리 국왕 벨러 3세의 딸 마가레타의 아들로, 이사키오스 2세가 몰락한 뒤 헝가리로 망명해 언드라시 2세로부터 사바 강 남쪽의 시르미아 일대를 영지로 수여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