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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8-14 14:24:10

보리치

보스니아 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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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5C337><colcolor=#6D7585> 보스니아 초대 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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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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Борић}}}
출생 미상
사망 1164년 이후 (향년 불명)
재위 보스니아
1154년 이전 ~ 1164년 이후
아버지 베리슬라프
배우자 라비카 부크미리치
자녀 보리치, 파바오, 베라 등
가문 보리체비치 가문

1. 개요2. 행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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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기록상에 등장하는 보스니아 반샤그 초대 반(Ban).

2. 행적

기원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지만, 보스니아 출신이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1162년경, 보리치는 슬라보니아의 성전 기사단에 토지를 기부했다. 이는 보리치의 재산이 슬라보니아에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일부 사료에 따르면, 사바 강의 브로드 시 인근 그라바즈의 지역 귀족 베리슬라프의 아들이라고 한다. 동로마 제국 역사가 요안니스 키나모스는 보리치가 헝가리 왕국의 가신이었다고 밝혔다. 타지인이었던 그가 어떻게 보스니아의 반이 될 수 있었는지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그가 역사 기록에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시기는 1154년이다. 라구사 공화국의 역사가 마우로 오르비니(Mauro Orbini, 1563 ~ 1614)에 따르면, 이해 교황청은 라구사 대주교의 요청에 따라 보스니아 주교가 라구사 대주교의 관할권에 속해야 한다고 결정했다. 본래 스플리트 대주교의 직접적인 관할하에 있던 보스니아 주교 밀로반은 이 결정에 불만을 품고 보리치에게 라구사 응징에 힘을 보태달라고 요청했다. 보리치는 처남 토마쉬 부크미리치(Tomaš Vukmirić)와 함께 출진했으며, 헝가리 왕국으로부터 기병대를 지원받았다. 그러나 트레비네에서 미호 보발에비치가 지휘하는 라구사군과 전면전을 치르던 중 토마쉬가 전사하면서 군대의 사기가 급락하자 퇴각했다. 이후 보리치는 트레비네 주교를 통해 라구사 공화국과 협상한 끝에, 보스니아 주교가 라구사 대주교의 관할권에 들어가는 걸인정하고, 라구사에 보상금을 지급하고 화해의 표시로 선물을 가져오는 선에서 평화 협약을 맺었다고 한다. 하지만 현대 학계에서는 마우로 오르비니의 기록은 교차검증되지 않기때문에 신빙성이 부족하다고 본다.

1154년, 보리치는 분견대를 파견해 헝가리 국왕 게저 2세가 동로마 제국이 통치하는 브라니체보를 포위하는 걸 도왔다. 하지만 얼마 후, 제국 내부에서 헝가리와 호응하기로 약속했던 안드로니코스 콤니노스가 체포당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게저 2세는 헝가리로 귀환했다. 동로마 장군 바실리오스 틴트루체스(Basil Tzintziluces)가 헝가리군을 추격했지만 매복에 걸려 섬멸되었다. 1155년 초, 남이탈리아 원정을 막 단행한 동로마 황제 마누일 1세는 헝가리와 쓸데없이 전쟁을 벌일 이유는 없다고 보고 헝가리에 사절을 보내 화해를 제안했고, 게저 2세 역시 받아들였다.

1162년 게저 2세가 사망한 뒤, 이슈트반 3세가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동로마 황제 마누일 1세는 자국으로 망명한 이슈트반 왕자에게 군대와 물자를 지원해 새 왕을 상대로 반기를 들게 했다. 보리치는 이슈트반 왕자의 편에 섰고, 이슈트반 왕자는 이슈트반 3세를 몰아내고 헝가리 왕이 된 뒤 자기를 도와준 걸 보답하고자 슬라보니아 영지를 수여했다. 이후 보리치는 슬라보니아의 성전 기사단에게 에스델 마을과 토지를 기부했다. 그러나 1163년 6월 19일, 이슈트반 3세가 독일 용병들을 이끌고 반격을 가해 세케스페헤르바르에서 이슈트반 4세를 격파하고 사로잡았다.

이후 이슈트반 3세는 보리치를 응징하기로 마음먹고, 독일 용병대장 고드프리트를 파견했다. 1282 ~ 1285년 헝가리 국왕 라슬로 4세의 궁정 사제이자 연대기 작가인 케자의 시몬이 저술한 <훈족과 헝가리인의 행적(Gesta Hunnorum et Hungarorum)>에 따르면, 고드프리트는 1164년경 이슈트반 3세의 지시에 따라 보리치를 공격해 물리쳤다고 한다. 이후 보리치에 대한 언급은 전혀 전해지지 않는다. 그 후 보스니아는 1166년 헝가리 남부를 침공한 마누일 1세의 동로마군에 의해 동로마 제국의 영역으로 귀속되었다.

마우로 오르비니에 따르면, 보리치는 토마쉬 부크미리치의 여동생인 라비카 부크미리치와 결혼했다고 한다. 하지만 라비카는 오로지 마우로 오르비니의 기록에만 등장하기에, 실존인물인지는 불명확하다. 보리치는 두 아들 보리치와 파바오, 딸 베라를 두었는데, 이중 딸 베라는 자후믈례 대공 미로슬라프 자비도비치와 결혼했다.그의 후손은 보리체비치 가문으로 일컬어졌으며, 13세기 무렵 사바 강 연안 양쪽에 토지와 재산을 소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