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제국 해군 태평양 함대 사령관 스테판 오시포비치 마카로프 Степан Осипович Макаров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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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49년 1월 8일 |
러시아 제국
헤르손 현
니콜라예프 (現) 우크라이나 미콜라이우 주 미콜라이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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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04년 4월 13일 (향년 55세) |
러시아령 다롄
포르트-아르투르 근해 페트로파블롭스크 함선내 (現) 중국 랴오닝성 다롄시 뤼순커우구 뤼순항 근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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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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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 해군사관학교 |
직업 | 군인, 해양학자, 탐험가 |
최종 계급 | 중장 |
복무 기간 | 1858년 9월 ~ 1904년 3월 31일(46년) |
경력 | 태평양 함대 사령관 |
1904년 2월 1일 ~ 2월 24일 | |
크론슈타트 총사령관 겸 주지사 | |
1899년 12월 6일 - 1904년 2월 9일 | |
해군 포병 수석 감찰관 | |
1891년 - 1894년 | |
참전 |
러시아-튀르크 전쟁 그레이트 게임 러일전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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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스테판 마카로프(Степан Макаров)는 러시아 제국의 군인으로써 러시아 제국 해군에서 복무하였으며, 그는 군인으로 유명하지만 해양학자와 탐험가, 엔지니어로도 활동을 했으며, 한국에서는 나름 러일전쟁에 참전한 러시아 제독으로 잘 알려져있다.2. 생애
마카로프는 러시아 제국의 헤르손 현 니콜라예프에서 해군 장교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아버지의 근무지가 시베리아 소함대로 재배치되어 1858년(9세) 가족은 태평양 연안 니콜라옙스크나아무레 항구도시로 이사했으며 그곳에서 일반학교를 다니다 해군학교로 전입하였다.후에 1863년(14세) 러시아 제국 해군에 입대하였고 첫 번째 러시아 제국 함대 북아메리카 해안 원정(кспедиция русского флота к берегам Северной Америки)에서 안드레이 포포프(Андрей Александрович Попов)제독의 휘하하에 참여하여 항해법을 익혔다.
1865년 해군 항해사 군단(КФШ)[1]에서 수석으로 졸업하였다.
1865년 8월 마카로프는 로베르트 룬드(Роберт Александрович Лунд) 중령의 지휘하에 코르벳함"바랴그"(Варяг)에 해상 실습 훈련에 배치되었으며, 당시 함장이었던 룬드는 이러한 기록을 남겼다. 마카로프는 코르벳함에서 1년동안 복무하는 동안 모든 해양예술분야, 특히 열정과 노력, 호기심 모든 분야에서 탁월한 결과를 보여주었다 예를 들면, 마카로프는 콘스탄틴 스타리츠키(Константин Степанович Старицкий) 중위의 임무에서 천문학적, 자기적관찰에 참석하였고 자신을 위한 계산을 하였다. 마카로프는 가장 고귀하고 아름다운 행동의 청년이였다.라고 회고하였다.
1866년 11월, 마카로프는 표트르 폴로조프(Петр Иванович Полозов) 중령의 지휘하에 코르벳함"아스콜드"(Аскольд)에 해상 실습 훈련에 배치되었고, 아스콜트함은 희망봉을 거쳐 발트해로 건너갔다.
1867년 마카로프는 해군사관학교의 입학하여 2년간 장교후보생으로 지내었다. 당해 첫번째 과학논문을 발표하였다.
1869년 장갑선"루살카"(Русалка)의 첫항해 당시 마카로프도 탑승하였는데 그는 배가 가라않지 않은 방법을 물색하고 있었는데 실험하기 위해서 당연히 해군부에 승인을 받았다. 당시 실험 내용은 선체를 구획으로 나눠서 강력한 펌프와 파이프를 설치하고, 선체에 구멍이 뚫렸을때 선체내에 물의 유입을 막기위한 혁신적인 아이어디어를 제안했으며, 이후에도 연구과 논문을 발표하여, 러시아 해군 월간지에 기록된다.
1868년 ~ 1869년 프로펠러 호위함"드미트리 돈스코이"(Дмитрий Донской)에 탑승했고 7개월간의 해외항해로 외국 독일, 프랑스, 포르투갈, 브라질을 방문하였다. 이 항해당시 마카로프는 아직 실험 실습훈련에서 합격하여, 장교후보생에서 병조장으로 진급하였고 크론슈타트에서 근무를 하게되었다. 1871년~1872년 증기스쿠너 "퉁구스"(Тунгуз)를 타고 세계일주를 하였다.
중위 마카로프는 흑해함대에서 근무하였는데 오데사의 정박중이였던 어뢰정"벨리키 크냐즈 콘스탄틴"(Великий князь Константин)의 함장이였다. 그는 소해함으로 사용하기 위해서 개조하였고 1877년 ~ 1878년 러시아-튀르크 전쟁에 참전하여 오스만 제국의 상선과 군함을 공격하여 큰 피해를 입혔다. 전쟁동안 마카로프는 그는 소령으로 진급한다.
러시아 제국의 중앙아시아 정복은 오래동안 지속되었는데 마카로프가 정복에 참전했을 당시에는 거이 전쟁 말이였고 정복하지 못한 투르크멘과 부하라 칸국이 남아있었고 마카로프는 투르크멘과의 전쟁에서 아스트라한에서 튀르크멘바시로 보급품을 수송하는 역할을 하였으며, 원정군 사령관 보병대장 미하일 스코벨레프(Михаил Дмитриевич Скобелев)과 성 게오르기훈장을 교환[2]하였다.
1881년 ~ 1889년까지 증기선"타만"(Тамань), 장갑순양함 "크냐지 포자르스키"(Князь Пожарский), 프로펠러 코르벳 "비탸지"(Витязь)를 지휘하여, 세계일주를 하였고 해양학연구에 매진하여 러시아 제국 지리학회(ИРГО)로 부터 작은 금메달(Малая золотая медаль)을 받았다. 이후 15년 후에 표도르 페트로비치 리트케 메달을 받았다.
1890년 마카로프는 후방제독으로 진급하여 1891년 ~ 1894년 해군 포병 수석 감찰관으로 지내었고, 1892년 ~ 1897년 페테르부르크에서 살았으며, 1894년~1895년 발트 함대의 사령관중 가장 막내였다고 한다.
1896년 ~ 1895년 일본 제국의 위협으로 인해 마카로프는 다시 극동으로 이동하였다.
마카로프는 희망봉을 건너 극동~ 발트 해까지의 항해가 느리고, 오래걸려서 빠르고, 짧은 거리인 북극해 항로를 개발하기 위한 쇄빙선"예르막"(Ермак)을 건조하기 위한 아이디어를 보고하였고, 러시아 제국은 이를 받아드려 건조자금을 할당하였으며, 영국의 암스트롱 휘트워스(Armstrong Whitworth)과 건조계약을 맺었다. 예르막은 10개월이내 건조계약이었지만 1개월 지채되었으며, 진수가 완료되어 뉴캐슬에 배를 진수하였다.[3] 예르막은 해군소속의 선박이 아닌 재무부소속의 선박였다. 1901년 마카로프는 예르막을 지휘하여 제믈랴프란차이오시파 제도를 탐험하였다.
1899년 ~ 1904년 크론슈타트 항구 총사령관 겸 주지사로 역임하였으며, 마카로프는 일본 제국과의 전쟁이 불가피하게 발발할것을 주의하였는데 러일전쟁이 시작되기 4일전에 포르트 아르투르가 일본이 사용하던 무기로 인해 포르트 아르투르가 공격당할경우 단점을 파악과 공격당할시 며칠동안은 전투를 해야한다고 하였다.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마카로프는 태평양 함대의 사령관으로 1904년 2월 1일 임명되었고, 2월 24일에 포르트 아르투르에 도착하였고, 뤼순 공방전에 직접적으로 참전은 안했지만 지속적으로 상황을 보고받으면서 페트로파블롭스크급 전함 네임쉽 페트로파블롭스크에서 지휘하였으나 귀환하던중 우현으로 돌다가 기뢰와 접촉하여 폭침되었는데 마카로프와 종군화가 바실리 베레샤긴, 군종신부 알렉세이 라옙스키를 포함한 620~650명이 전사하였다. 이후 뒤따르던 군함들이 퇴함한 승조원을 구조하여 80명이 구조되었다.
전후 1909년 페트로파블롭스크는 한 사업가에 의해 구매되었고, 선체수색을 하였지만 6명의 유해만이 발견되었으며, 1913년 수병들의 유해를 포르트 아르투르의 군사묘지에 매장하였다.
3. 가계
- 할아버지 : 표도로 마카로프
- 외할아버지 : 안드레이 키릴로프
- 아버지 : 오시프 표도로비치 마카로프(Осипа Фёдоровича Макарова, 1813년 ~ 1878년), 해군 장교
- 어머니 : 옐리자베타 안드레이브나 키릴로바(Елизаветы Андреевны Кирилловой, ?~?)
- 장인 : 니콜라이 표트로비치 야키모프스키(Николая Фёдоровича Якимовского, 1828년 ~ 1982년), 육군 공병 중위
- 아내 : 카피톨리나 니콜라에브나 야키모프스카야(Капитолина Николаевна Якимовская,1859년 ~ 1946년)
- 장녀 : 올가 마카로바(Ольга Макаровойа, 1882년~ 1886년) : 요절
- 차녀 : 알렉산드라 스테파노브나 마카로바(Александре Степановне Макаровойа, 1886년 ~ 1982년) : 황실에서 시녀였으며, 시종이였던 (사위)레프 빅토로비치 골루베프(Лев Викторович Голубев)와 결혼하였으며, 1남을 낳았다.
- 외손자 : 바딤 골로베프(Вадим Голубев, 1910년 ~ ?)
- 장남 : 바딤 마카로프(Вадим Макаров, 1891년 ~ 1964년 1월 2일) : 해군 장교로 복무했으며, 러시아 내전에 백군 해군으로 참전하였다. 이후 미국으로 이민가서 뉴욕에 정착하여 사업으로 성공하였고, 뉴욕에서 사망하였다.
4. 계급
- 1867년 장교후보생(Гардемарин)
- 1869년 병조장(Ми́чман)진급
- 1870년 소위(Унтер-лейтена́нт) 진급
- 1871년 중위(лейтена́нт) 진급
- 1874년 대위(Капитан лейтенант) 진급
- 1876년 소령(Капитан 3-го ранга) 진급
- 1880년 중령(Капитан 2-го ранга) 진급
- 1881년 대령(Капитан первого ранга) 진급
- 1890년 소장(Капитан-командор) 진급
- 1899년 중장(Контр-адмирал) 진급
5. 업적
- 마카로프 제독은 세계해양에 필요한 장비를 포함하여 해양학에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으며, 최초의 항해에서 필요한 수심계를 개발하였고, 또한 선박의 내항성에서 가라앉지 않음 이론을 크게 발전시켰고, 이를 과학의 분야로 만들것을 주장하였고 처음으로 해당 이론을 적용한 노급전함 보로디로급 오룔[4]에 적용하였다.
- 포병 수석 감찰관 당시 캡형태의 장갑 관통형 포탄(A[CBC)를 개발하였지만 생전에는 실전에서 안쓰였지만 사후 러시아 제국 해군이 사용하였다.
- 군함의 장갑의 두깨의 증가보다는 군함의 함포를 비롯한 무장과 고속무기가 더 중요시 여겼고, 공격장비보다는 방어장비의 무게를 두었고 방어장비로는 총을 사용하는 것이 나을것이라고 판단하였고, 상부갑판에 총을 배치하는 것에 옹호하는 입장을 취했다.
- 당시 열강들은 건함 경쟁이 심했고, 쓰시마 해전에서 승리한 일본 제국이 가장 심하게 심취하여 거함거포주의까지 존재하고 있는 상황이었는데, 1차세계대전 중심으로 보면 러시아 제국은 해군 군함이 상대적으로 증강이 지지부진했는데 전드레드노트급 전함이 중심이었고 드레드노트급은 강구트급 전함말고는 없었고 당시에는 배정순위가 무조건 신식군함이 발트함대 → 태평양 함대 → 흑해함대 = 카스피 소함대 및 소함대 으로 배정되었는데 그나마 태평양 함대가 먼저 창설된 흑해함대보다 보유함선이 좋았다. 그는 만톤이상군함보다 5000톤이하급일 더 건조하고 더많은 군함을 더 바다로 내보내는 것이 더 낫다고 믿었다.
- 최초의 세마포어 알바벳은 홈 릭스 팝햄(Home Riggs Popham)이 개발아였고, 러시아식 세마포어 알파벳을 마카로프에 의해 개발되었다.
- 저서 얼음 속의 예르막<Ермак во льдах>을 집필하였다.
- 러시아 연방 해군은 그의 업적을 기려, 어드미럴 그리고로비치급 호위함 3번함에 그의 이름을 붙였다.
6. 수상 및 서훈내역
- 성 게오르기훈장
- 대공 블라디미르훈장
- 성녀 안나훈장
- 성 스타니슬라프훈장(2회)
- 황금 무기"용맹을 위하여"
- 마카리예프 상(2회) 자연과학분야
- 표도르 페트로비치 리트케 메달 지리학분야24번째 수상자
7. 외부링크
[1]
러시아 제국 해양부에 있는 전문 군종 분야
[2]
성 게오르기 훈장 수훈자들간에 하나의 의형제를 맺는 전통이다.
[3]
이 쇄빙선은 세계최초의 쇄빙선이다.
[4]
해당함은 일본제국에 포획되어 이와미라는 이름으로 재취역하였고 표적함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