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dc143c><colcolor=#fff> 스타니스와프 스칼스키
Stanisław Skalsk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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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15년 11월 27일 |
러시아 제국 코디마 (現 우크라이나 오데사주 코디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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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2004년 11월 12일 (향년 88세) |
폴란드 바르샤바 | |
학력 |
바르샤바 기술학교 뎀블린 생도학교 |
최종 계급 | 준장 |
참전 |
제2차 세계 대전 ┗ 폴란드 침공 ┗ 영국 본토 항공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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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폴란드의 군인이다.2. 생애
오데사에서 가까운 도시 코디마(Кодима)에서 1915년 10월 27일에 외동아들로 태어났다. 스칼스키의 부모는 살던 고장이 러시아 제국 치하에 들어가자 우크라이나로 이주해온 것이었으나, 스칼스키가 태어난 후에 고향이 폴란드 정부에게 반환되면서 다시 모국으로 돌아갔다. 따라서 소년 스칼스키는 만리타국에서 유년시절을 보내면서도 조국의 산천과 문화에 대하여 잊지 않고 있었고, 애국심 또한 남다른 아이로 자라났는데 아마도 이런 경험이 그가 평생 군인 외길을 고집하게 된 배경에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1933년에 김나지움을 졸업한 스칼스키는 이미 자신의 진로를 조종사로 생각해두고 있었다고 한다.2.1. 공군사관학교 입교
바르샤바 기술학교에 들어간 그였지만 학업에는 별 관심이 없었던 청년 스칼스키는 교내에 포함되어 있는 모코토스키 비행장(Pole Mokotowskie)에 있는 비행클럽에서 죽치고 살다시피 했다. 격납고를 청소하고 비행기를 닦다가 가끔 운이 좋으면 공짜 비행을 즐길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반백수 오타쿠로 지내던 그는 결국 이곳에서 글라이더 조종 면허를 딸 수 있었다. 기어이 1935년에 학교를 중퇴한 그는 자원하여 폴란드 공군에 입대했다. 그렇게도 타고 싶은 비행기를 마음껏 몰기 위해서...2.2. 전쟁에서 거둔 첫 격추
1936년에 뎀블린(Dęblin)에 있는 공군사관학교(Szkoły Podchorążych Lotnictwa)에 입학한 그는 동기 70명과 함께 생도 생활을 하며 조종 교육을 받은 다음 2년 후인 1938년 8월에 폴란드 북부의 고도 토룬(Toruń)에 주둔하고 있던 제4비행연대(4 Pułk Lotniczy)에 임관하게 된다. 햇병아리 조종사 스칼스키 소위는 이 부대에서 제142전투비행대(142 Eskadrze Myśliwskiej)에 배속되며 그 무렵 폴란드 공군의 주력 전투기인 PZL P.11을 타게 되었다.나치 독일이 폴란드 국경을 넘어 쳐들어온 1939년9월 1일, 새벽에 출격한 스칼스키 소위는 오전 5시 32분에 독일 공군의 헨셸 Hs 126 정찰기를 격추시키면서 전쟁에 뛰어들게 된다. 같은 시간대에 미에치스와프 메드베키(Mieczysław Medwecki : 1904~1939) 대위도 임멜만 항공단(제2급강하폭격항공단 : StG 2) 제1비행단 소속의 편대장 프랑크 노이베르트(Frank Neubert : 1915~2003) 상사의 Ju 87을 격추시켰다. 20분 후, 메드베키의 윙맨 브와디스와프 기스(Władysław Gnyś : 1910~2000 / 6대 격추) 상사가 2대의 도르니에 Do 17 폭격기를 추격해 격추시켰다.
역사가들은 이 3건의 격추야말로 2차 세계 대전을 통틀어 첫 번째 격추 기록으로 여긴다. 폴란드 전역에서 스칼스키는 구식 전투기를 몰면서도 2주 사이에 5대의 독일 공군기를 격추시켰고, 1대를 공동 격추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즉, 스타니스와프 스칼스키는 2차 대전에 참전한 연합군 파일럿 중에서 처음으로 에이스로 등극한 인물인 셈이다.
2.3. 망명과 이어진 싸움
9월 17일에는 소련까지 폴란드 침공을 개시하자 스칼스키는 당시 중립국이던 루마니아를 통해 프랑스에 도착했지만, 프랑스 군대는 마지노선을 믿고 독일에 대한 공세를 취하지 않고 있었다. 1940년 초에 지원하여 영국으로 넘어간 그는 영국 공군에 배속되었다. 1940년 7월에 시작된 영구 본토 항공전에서 제501전투비행대대에 소속된 스칼스키 중위는 그 후 제303스쿼드론과 제306스쿼드론을 거치다가 제317스쿼드론의 지휘관이 되었다. 이 기간 동안 스칼스키는 2대의 Bf 109를 포함해 6대의 확인 격추를 기록하고 있어 RAF 유수의 에이스들과 맞먹는 전투력을 보여주었다.그렇지만 9월 5일에 처음으로 적기에게 피격당하면서 스칼스키의 격추 행진에도 제동이 걸리게 된다. 이 날 그는 해협 상공에서 여러 대의 폭격기, 전투기들과 교전하다가 거의 해면 고도까지 내려가게 되었는데, 이때 그의 허리케인 주위에 기총탄이 빗발처럼 쏟아지며 물보라가 피어났다. 독안에 든 쥐가 된 그는 필사적으로 이리저리 조종간을 꺾어대며 회피했지만, 결국 엔진을 맞고 불길이 치솟았다. 시뻘건 화염이 조종석까지 핥기 시작하자 스칼스키 소위는 이대로 전방 연료탱크에 불이 번지면 끝장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조종간을 당겨 급상승하면서 조종석 밖으로 뛰어내렸다.이때 부상을 입은 그는 10월 초까지 전선을 떠나있어야만 했다.
1943년 10월에는 폴란드 출신 파일럿들 중에서 정예를 모아서 폴란드 비행팀(PFT)를 조직하고 그 리더가 되었다. 이 부대는 그의 이름을 다서 스칼스키의 서커스단(Skalski 's Circus)이라고 불렸다. PFT는 리비아와 시칠리아에서 싸웠다. 그 후 제601스쿼드론 지휘관을 역임한 스칼스키는 노르망디 상륙 작전이 개시되기 전에는 제133비행단 사령관이 되었다. 1944년 9월에는 실전 임무를 마치고 미국으로 건너가 포트 리븐워스 참모학교에 배속되었다. 그는 제3공군에 배속되거나 배속될 신참과 고참 조종사들에게 자신이 전투에서 얻은 경험을 전수해주며 공중전에 관해 강의했다.
스칼스키는 폴란드 조종사 중에서 가장 많은 격추 기록을 거둔 에이스로 이름을 남겼다. 그의 전과는 확인 격추만도 22대를 헤아리지만, 그외에 인정받지 못한 전과까지 더하면 30여대는 가뿐히 넘긴다고 평가받았다.
3. 종전과 억울한 혐의
서유럽에서 전쟁이 끝나자 스칼스키 소령은 본인이 원한다면 영국 공군에 남아 계속 승승장구할 길이 열려있었다. 그렇지만 그는 소련의 지배 하에 들어가게 된 조국 폴란드로 돌아갈 것을 결정했다. 1947년에 고국으로 돌아간 그는 공산정권 치하의 폴란드 공군에서 근무했다. 그러나 1948년에 그는 스탈린 정권의 외압에 더해 과거 영국에서 복무한 경험까지 겹쳐 바르샤바 거리 한복판에서 첩자 혐의로 체포당했다. 폴란드 공안부에 끌려가 몇 달간이나 끔찍한 고문을 받던 그는 결국 강요된 자백서로 인해 스파이로 기소되어 1950년 4월 7일에 법정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3년을 옥중에서 보냈다.아들이 체포당했을 때 스칼스키의 어머니는 너무도 놀라 전철에서 굴러 떨어져 다쳤고, 아버지는 그토록 자랑스럽던 아들이 사형 판결을 받았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후 심장마비로 사망하고 말았다. 1951년 1월 4일, 폴란드 대법원은 1심의 판결을 그대로 유지한다는 확정 판결을 내리게 된다. 다행히도 곧 감형 조치가 이뤄져 종신형으로 결정되었다. 조국을 열렬히 사랑하고 침략자와 싸운 전쟁영웅 스타니스와프 스칼스키에게 이같은 대우는 너무나 부당한 것이었지만, 그의 고초는 이오시프 스탈린이 죽고 나서야 변화가 찾아오게 된다.
3.1. 되찾은 명예
1953년에 스탈린이 죽자 위성국인 폴란드에서도 점차 정치계에 새 바람이 불어왔고, 1956년에 민족주의자인 브와디스와프 고무우카가 서기장이 되자 스칼스키에게도 사면 복권이 이뤄지면서 석방되었다. 무려 8년이 넘게 교도소에서 썩으며 심신이 지칠대로 지친 스칼스키였지만, 그는 몸을 추스르자마자 곧바로 폴란드 공군에 돌아갈 것을 희망했다. 소령으로 다시 복무를 시작한 그는 1957년에 중령으로 진급함과 동시에 신예 제트전투기를 타기 위한 기종전환 교육을 받았다. 비행을 누구보다 사랑했던 스칼스키에는 딱한 일이었지만, 감금 생활 동안 가해진 참혹한 고문들은 그의 몸에 씻을 수 없는 상흔을 남겼고, 건강이 전과 같지 않았던 스칼스키 중령은 비행 임무 보다는 주로 행정 업무가 맡겨졌다.1968년 5월 20일에는 공군에서의 공식 직함 외에 폴란드 비행클럽(Aeroklub Polski : 1911년 설립되어 폴란드 전역에 회원을 가진 동호회) 회장이 되었고 1972년에 군에서 퇴역했다. 1988년 5월 15일에 퇴역 대령 스칼스키에게는 여단장이라는 명예 보직과 준장 계급장이 주어지게 된다.
오늘날, 그가 처음 조종사 생활을 시작했던 토룬시와 바르샤바 거리에는 각각 그의 이름을 딴 광장과 거리가 생겨났고, 폴란드 공군 제22공군기지에서는 그를 기리기 위해 MiG-29 제4105호기의 꼬리날개에 그가 젊었던 시절과 노후의 모습을 묘사한 스페셜 마킹이 그려넣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