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국대학교 서울캠퍼스에 있는 원래의 경희궁 숭정전에 대한 내용은 정각원 문서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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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상청 국립기상박물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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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 창덕궁 · 창경궁 · 덕수궁 · 경희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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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근정전 景福宮 勤政殿 |
창덕궁 인정전 昌德宮 仁政殿 |
창경궁 명정전 昌慶宮 明政殿 |
덕수궁 중화전 德壽宮 中和殿 |
경희궁 숭정전 慶熙宮 崇政殿 |
※ 중화전 건립 이전 덕수궁의 정전은 즉조당이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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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사적 제271호 경희궁 | ||
<colbgcolor=#bf1400> 경희궁 숭정전 慶熙宮 崇政殿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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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새문안로 45 ( 신문로2가) | |
건축시기 |
1620년 (창건) 1926년 (이건) 1991년 (복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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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f1400> 숭정전[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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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경희궁의 정전. 신하들이 임금에게 새해 인사를 드리거나 국가 의식을 거행하는 곳이다. 현재 남아있는 5대 궁궐의 정전 중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정전이다.2. 역사
1617년( 광해군 9년)에서 1620년(광해군 12년) 사이에 경희궁을 창건할 때 지었다. 이후 약 240여년 간 조선 후기 동안 사실상 정궁[2]인 창덕궁의 인정전과 더불어 국가의 주요 행사를 치르는 공간으로 쓰였다. 경종, 정조, 헌종이 이곳에서 즉위했다. 1829년(순조 29년) 경희궁에 대화재가 일어나 내전 주요 건물인 회상전(會祥殿), 융복전(隆福殿) 등은 불탔으나 숭정전은 피해를 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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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f1400> 1901년 이전에 촬영한 경희궁 숭정전 사진 (프랑스어 교사인 샤를 알레베크가 제작한 사진 엽서의 사진) |
그러나 1907년( 융희 원년) 순종이 창덕궁으로 이어[4]한 뒤, 경희궁은 다시 버려졌다. 경술국치 직후인 1910년에 일제는 숭정전과 그 인근에 일본인 학교 경성중학교(京城中學校)[5]를 세웠다. 숭정전은 한동안 제자리에 있었는데 1926년에 일본 사찰 대화정 조계사(大和町 曹溪寺)에 매각되어 법당으로 바뀌었고[6], 기존 숭정전 자리에는 학교 식당이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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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f1400> 동국대학교 서울캠퍼스의 정각원으로 쓰이는 경희궁 숭정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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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f1400> 학교 건물 하단에 있는 숭정전 돌계단[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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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f1400> 복원공사를 갓 마친 숭정전. 주변 복원은 아직 못한 모습이다.[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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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f1400> 복원 공사를 마친 현재 숭정전 일곽 |
3. 정문
자세한 내용은 경희궁 숭정문 문서 참고하십시오.4. 구조
<colbgcolor=#bf1400> 〈서궐도안〉을 채색한 〈서궐도〉에서 묘사한 숭정전 일곽 |
<colbgcolor=#bf1400> 위는 동국대학교 정각원(본래 숭정전) 천장의 용이고 아래는 새로 복원한 숭정전 천장에 달린 용이다. |
- 건물 4면에는 꽃살분합문을 달았고, 그 위에는 교창(交窓)을 내었는데, 어칸에는 4짝, 그 옆 협칸에는 3짝, 그리고 가장 양 끝칸인 툇간에는 2짝문으로 나 있다. 내부 천장은 소란반자이다. 공포는 외부로는 창방 위에 외2출목의 쇠서와 교두형 첨차를 두어 다포계의 특징을 보이면서 기둥 위에만 짜여 있다. 간포(間包) 대신 화반을 두고, 공포 내부에 출목 없이 양봉형(樑奉形)으로 보아지를 마련하여 보를 받치는 점은 다른 건물에서는 볼 수 없는 특징이다. 건물 앞에 놓인 계단 역시 다른 궁(宮)의 정전과 같이 삼도(三道)로 꾸며 중앙에는 봉황 1쌍을 양각하여 장식했다. 출처.
- 1990년대에 숭정전 일곽을 복원하면서 조정 뜰에 품계석[11]을 세워두었다. 그런데 정작 조선 시대에는 없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이 포스팅에 따르면, 품계석은 법궁의 권위를 상징하는 물건이었기 때문에 경복궁, 창덕궁(경복궁 중건 이전 조선 후기 사실상 법궁), 경운궁(대한제국 광무 연간 법궁) 조정에만 세웠다는 것이다. 실제로 조선 시대에 경희궁을 그린 〈서궐도안〉과 대한제국 시기에 촬영한 경희궁 사진에서 품계석은 보이지 않는다.
5. 대중매체에서
2000년대 들어 문화재 보호를 위해 문화재청에서 주요 고궁에서의 사극 또는 드라마 촬영을 엄격하게 제한하자, 제작사 측에서는 사실상 신축이라 상대적으로 연혁이 짧은 경희궁을 촬영 장소로 자주 이용했으며, 자연스럽게 메인 건물인 숭정전이 자주 등장했다.문제는 창건 이전( 광해군 이전) 시대를 다룬 작품에 숭정전이 나와 재현 오류가 일어난다는 것. 대표적으로 세종 시기를 다룬 〈 대왕 세종〉과 문종 ~ 세조 시기를 다룬 〈 공주의 남자〉[12], 그리고 성종 ~ 연산군 시기를 그린 〈 왕과 나〉가 있다.[13]
또한 현대에 입헌군주제가 지속된다는 설정을 가진 드라마들, 즉 〈 궁〉, 〈 궁S〉, 〈 황후의 품격〉[14]에 나오는 전통 양식 궁궐 건물도 사실 이 곳에서 외부 장면을 촬영했다.
〈대장금〉, 〈화성에서 꿈꾸다〉, 〈 명성황후〉, 〈왕세자 실종 사건〉 등의 사극 뮤지컬도 '고궁 버전'이라는 이름으로 숭정전에서 자주 공연한다. 아무래도 야외이기도 하고 애초에 공연장이 목적인 장소가 아닌지라 시설은 그다지 좋지 않지만, 밤하늘 아래에서 보는 뮤지컬만큼은 최소한 분위기가 제법 난다.
6. 여담
- 일제강점기 경성중학교 시절에는 상급생들이 후배들을 갈구는(...) 장소로 활용되었다고 한다. 선배가 후배들에게 "숭정전 앞으로 오라."라고 호출하면, 후배들이 매우 두려워했다고 한다.[15]
7. 같이보기
[1]
첫 번째 사진 출처: 티티어스.
두 번째 사진 출처: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2] 조선왕조 500년 내내 정궁은 엄연히 경복궁이었다. 다만 임진왜란 이후 270여년 간 재건하지 못하면서 창덕궁이 사실상 정궁으로 기능했다. [3] 출처: 《경복궁 영건일기》권1. [4] 移御. 임금이 거처를 옮기는 것. [5] 현재 서울특별시 마포구 연남동에 있는 경성중학교와는 다른 학교다. 거기는 '景'城. [6] 현재 대한불교조계종의 조계사와는 다른 절이다. 자세한 것은 조계사 항목 참고. [7] 복원된 숭정전은 문화재로 지정받지 못했다. [8] 사진 출처: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9] 사진 출처: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10] 예외로 창덕궁 인정전의 경우는 북쪽을 제외한 3면에만 문이 있다. [11] 品階石. 신하들이 서열에 맞게 서있을 위치를 나타내는 돌. [12] 참고로, 이 드라마에서 김종서로 출연한 배우 이순재가 서울고등학교가 경희궁 터에 있던 시절 다녔던 졸업생이다. [13] 특히 〈왕과 나〉의 라이벌이었던 〈 이산〉은 정조 시대를 다룬 드라마라 재현을 따지자면 오히려 〈이산〉을 이 곳에서 촬영하는 게 맞았다. 그러나 정작 〈이산〉은 용인 MBC 드라미아에 있는 고려 왕궁 만월대 세트에서 촬영했다. [14] 단, 이 드라마의 경우 메인 촬영지는 충청남도 부여군 백제문화단지이고, 숭정전은 11회부터 어쩌다 가끔 나온다. 마지막회에서는 관광지가 된 궁궐로 나온다. [15] 차은정, 2016, 《식민지의 기억과 타자의 정치학》, 선인, p.307.
두 번째 사진 출처: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2] 조선왕조 500년 내내 정궁은 엄연히 경복궁이었다. 다만 임진왜란 이후 270여년 간 재건하지 못하면서 창덕궁이 사실상 정궁으로 기능했다. [3] 출처: 《경복궁 영건일기》권1. [4] 移御. 임금이 거처를 옮기는 것. [5] 현재 서울특별시 마포구 연남동에 있는 경성중학교와는 다른 학교다. 거기는 '景'城. [6] 현재 대한불교조계종의 조계사와는 다른 절이다. 자세한 것은 조계사 항목 참고. [7] 복원된 숭정전은 문화재로 지정받지 못했다. [8] 사진 출처: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9] 사진 출처: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10] 예외로 창덕궁 인정전의 경우는 북쪽을 제외한 3면에만 문이 있다. [11] 品階石. 신하들이 서열에 맞게 서있을 위치를 나타내는 돌. [12] 참고로, 이 드라마에서 김종서로 출연한 배우 이순재가 서울고등학교가 경희궁 터에 있던 시절 다녔던 졸업생이다. [13] 특히 〈왕과 나〉의 라이벌이었던 〈 이산〉은 정조 시대를 다룬 드라마라 재현을 따지자면 오히려 〈이산〉을 이 곳에서 촬영하는 게 맞았다. 그러나 정작 〈이산〉은 용인 MBC 드라미아에 있는 고려 왕궁 만월대 세트에서 촬영했다. [14] 단, 이 드라마의 경우 메인 촬영지는 충청남도 부여군 백제문화단지이고, 숭정전은 11회부터 어쩌다 가끔 나온다. 마지막회에서는 관광지가 된 궁궐로 나온다. [15] 차은정, 2016, 《식민지의 기억과 타자의 정치학》, 선인, p.3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