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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호 | 없음 |
시호 | 소황제(昭皇帝) |
성 | 리(Lý, 李/이) |
휘 |
펏킴(Phật Kim, 佛金/불금) 티엔힌(Thiên Hinh, 天馨/천형) |
생몰 기간 | 1218년 ~ 1278년 |
재위 기간 | 1224년 ~ 1225년 |
[clearfix]
1. 개요
베트남 리 왕조의 제9대 황제이자 마지막 황제. 묘호는 없고, 시호는 소황제(昭皇帝). 휘는 불금(Phật Kim, 佛金) 또는 천형. 베트남 역사상 유일한 여제(女帝)이다. 혜종의 둘째 딸이었다.2. 생애
즉위 전 작호는 소성공주(昭聖公主)였다. 1224년, 아들이 없던 혜종에 의해서 소성공주는 황태녀로 책봉되었다.[1] 아버지 혜종이 실권자 진수도에 의해서 폐위되자, 소성공주는 1224년 음력 10월, 일곱 살(세는나이)의 나이로 황제에 즉위했다. 그리고 아버지 혜종은 진수도에 의해서 절에 유폐되었고 쩐 왕조가 들어선 뒤 그곳에서 자결을 강요당했다.1225년 음력 10~11월, 진수도에 의해서 동갑내기 진경(陳煚)과 혼인하였고[2] 같은 해 음력 12월 초하루에 제위를 남편 진경에게 선양하는 방식으로 소황은 폐위되었다. 이 때 그녀의 나이 여덟 살이었다. 리 왕조의 대다수 황족들은 권신 진수도에 의해서 살해되었고, 소수의 황족들은 성씨를 바꾸거나, 타국으로 망명하게 되었다.[3]
소황은 황제에서 황후가 되었지만, 황후로 지낸 지 12년 만에 진태종 진경과의 사이에서 자식을 낳지 못해서[4] 1237년에 진태종에게 이혼을 당하였으며,[5] 이후 1258년에 원나라의 제1차 침공이 끝나자 자신을 버린 황제에 의해 공을 세운 장군 레푸쩐(Lê Phụ Trần, 黎輔陳)[6]과 재혼하게 되었고, 그나마 다행이게도 1남 1녀를 낳았다.
1278년, 소황은 6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3. 기타
< 푸른 늑대와 흰 사슴: 원조비사>와 < 징기스칸 4>에서 리 왕조 고종의 왕비 소성공주로 등장하지만, 소성공주(=소황)는 고종의 손녀라서 고증에 맞지 않고, 고증대로라면 태종이 군주인 시나리오 3에서 태종의 왕비로 등장해야 맞다.
[1]
언니는 이미 시집갔기 때문에 황위 계승에서 제외되었다.
[2]
혼인을 시킨 명분도 정말 가관인데, 당시 베트남에는 여자가 남자 쪽에
빈랑 열매를 보내 그것을 남자가 받아들이면 혼인이 이뤄지는 풍습이 있었다. 어느 날 소황이 자신과 친구가 된 진경과 같이 놀다가 우연히 빈랑의 열매가 담긴 수건을 던졌는데, 진수도는 그것을 빌미로 둘의 혼인을 추진했다.
[3]
대표적인 타국으로 망명한 황족은
화산 이씨의 시조
이용상이다.
[4]
1233년에 황태자를 낳았으나 금방 요절했다.
[5]
문제는 진수도가 자기 일족에게 시집간 소황의 언니를 강제로 이혼시킨 뒤 진태종의 두 번째 황후로 삼았다는 것이다.
[6]
쩐 왕조의 전전대 왕조인 전 레 왕조의 개국군주인 레호안의 후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