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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15 13:47:46

세리카와 유고

세리카와 유고
[ruby(芹川, ruby=せりかわ)][ruby(有吾, ruby=ゆうご)] |Yugo Serikawa
<colbgcolor=#000000><colcolor=#ffffff> 출생 1931년 6월 26일
도쿄도 코이시카와구
사망 2000년 10월 4일 (향년 69세)
학력 와세다대학 (졸업)
국적
[[일본|]][[틀:국기|]][[틀:국기|]]
직업 애니메이션 감독, 애니메이션 연출가

1. 개요2. 경력3. 특징4. 인맥5. 작품
5.1. 감독5.2. 참여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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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의 애니메이션 감독, 연출가.

오구로 유이치로는 정확한 건 잘 모르겠지만 각본가 浜田稔、山中肇는 세리카와 유고의 필명이라고 생각한다고 한다.

2. 경력

영화인 가문 출신으로 어린 시절부터 온 가족이 영화인이라 영화인이 된다는 것에 전혀 의문이 없다고 한다. 대학은 와세다대학에 들어갔으며 독일어를 공부했다고 한다. 이때 헤르만 헤세, 요한 볼프강 폰 괴테에 빠져들었다고 한다. 영어는 전혀 못하고 영어가 무섭다고 한다. 독일 문화가 더 좋다고. 자신의 작품은 독일 문화의 영향이 강하다고 한다.

각본을 공부하여 신도호(新東宝)라는 영화사에서 기획 문예부에서 시작했다. 그러다 경력을 쌓아 조감독부로 이적했는데, 이 때 영화 감독 나미키 쿄타로(並木鏡太郎), 나카가와 노부오(中川信夫)[1]에게 연출을 사사했다. 그러나 당시 일본에서는 TV가 광범위하게 보급되기 시작하면서 영화계가 점점 쇠퇴하고 있어 본인도 위기감을 느꼈고, 그러다 우연히 보게 된 월트 디즈니 스튜디오 밤비를 보고 애니메이션에 매력을 느꼈다고 한다. 그리고 일본의 애니메이션 제작사를 찾던 도중 백사전을 만들던 토에이 동화의 존재를 알게 되고 신도호를 퇴사하여 토에이 동화로 이적했다.[2]

조감독을 하라고 해서 영화처럼 잡일이나 하는 거라고 생각하고 해서 알았다고 수락했는데 선배들이 갑자기 콘티를 하라고 시켜서 영화와 다르다는 걸 알고 놀랐다고 한다.[3] 엉터리로 해서 냈는데 영화인 가문 출신답게 엉터리로 한 게 꽤 괜찮게 나와서 선배들이 "넌 연출해라." 라고 해서 얼떨결에 연출가가 되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애니메이션의 개념을 어려워했으나 본인이 장인에게 영화 연출을 배운 경험이 있어 이를 살려내 영화적인 연출을 했고 연출한 에피소드는 모두 좋은 평가를 받았다. 또 세리카와가 애니메이션 연출 일을 시작한 1960년대는 애니메이션 제작 체계가 잡혀있지 않아 그때그때 주먹구구로 만들던 시기였는데, 본인은 첫 극장판 연출작인 장난꾸러기 왕자의 오로치 퇴치에서 직접 전체 공정을 총괄하는 감독 업무를 봤고[4] 뛰어난 퀄리티를 선보이며 감독으로서의 가능성을 열고 주목을 받았다. 사실상 일본에서 애니메이션 감독이라는 개념과 체계를 처음으로 정립한 인물이다.

3. 특징

야나기사와 테츠야는 "영화적인 연출을 하며 대사의 템포가 좋다. 종종 엉큼한 서비스신이 들어가기도 한다."라고 세리카와 유고의 연출을 평했다. 오구로 유이치로는 " 로망을 중시해서 연출하던 연출가. 세리카와의 연출은 텐션이 높다[5]. 드라마와 코미디 연출력이 뛰어나다. 모성을 가진 여성[6]과 말괄량이 소녀[7] 연출을 잘 한다. 특히 할머니를 연출할 때 훌륭하다. 미소녀가 싸우는 게 멋지고 재밌다는 걸 일본 애니메이션 시청자에게 처음으로 보여준 분이다. 미소녀 전사 세일러 문 같은 작품의 원조라고 할 수도 있다.[8]" 라고 평했다. # 츠키오카 사다오는 " 미야자키 하야오의 스승인 타카하타 이사오의 스승이 세리카와니까 둘과 어딘가 비슷할 것.[9]" 이라고 하기도 했다. 오치 카즈히로는 "예쁘고 강한 소녀가 싸우고, 살짝 성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장면도 들어가는 일본식 미소녀 히어로 애니메이션의 원조는 세리카와." 라고 했다.

영화인, 각본가 출신이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콘티를 전혀 그리지 못했다고 한다. 그래서 연출 지시 사항을 내리면 애니메이터들이 콘티로 구체화시켜 작업을 했다. 장난꾸러기 왕자의 오로치 퇴치 때는 콘티로는 자신의 연출이 전달 안 될 것 같아서 스태프와 배우를 불러서 한 번 리허설 연기를 하고 애니메이터에게 보여주고 그리라고 시켰었다고. 일례로 마법소녀 메구짱의 1화는 연출이 세리카와 유고로 되어 있으나 콘티는 아라키 신고가 대신 그렸다. [10] 실제론 연출 작업을 했음에도 각본가로 크레딧되기도 했다고 한다. 각본에 영상을 이렇게 만들라고 연출 지시 사항을 썼던 것 같다.[11] 그러나 본인도 애니메이션 연출과 감독 일을 하면서 점점 수련을 거쳐 콘티를 그릴 수 있게 되었고, 1991년 6월에 60세를 맞아 토에이 동화를 정년 퇴직한 후 말년에는 프리랜서 신분으로 콘티를 그리며 작품에 참여했다.

다른 감독 작품에서 에피소드 연출을 할 때는 그 작품의 BGM을 안 쓰고 자신이 임의로 BGM을 선정해서 넣을 때가 많았다. 장난꾸러기 왕자의 오로치 퇴치의 작곡가였던 이후쿠베 아키라(伊福部昭), 사이보그 009의 작곡가였던 코스기 타이치로(小杉太一郎)의 음악을 자주 재탕했으며 클래식 음악을 사용하기도 했다. 독일 클래식 음악을 좋아한다고 한다.

각본을 쓸 때는 헤르만 헤세 작품에서 아이디어를 많이 차용한다고 한다. 각본가가 다른 사람이더라도 의견은 낸다고. 헤르만 헤세는 사랑[12]을 테마로 글을 쓰던 작가이므로 자신도 그런 작품이 많다고 한다.

세리카와는 욕하는 여자 아이가 매력있다고 생각했었다고 한다. 그래서 마징가 Z를 만들 땐 유미 사야카가 욕설을 하는 장면을 넣으려고 했으나 거절당했고 마법소녀 메구짱에서 처음 실현했다고 한다. 일본 애니메이션 최초로 욕설 히로인이라는 개념을 시도한 연출가이다.

제자 츠키오카 사다오 말로는 세리카와는 장난꾸러기 왕자의 오로치 퇴치를 만들 때 무리한 작화를 요구한다고 애니메이터들에게 엄청난 욕을 먹은 뒤로 이후로는 작화 매수를 많이 쓰지 않고 힘든 작화는 줄이게 되었으며 드라마와 연출로 승부를 걸게 되었다고 한다. 세리카와 본인은 무시 프로덕션에서 만든 작품을 보고 괜찮다고 생각했고, 결정적으로 '엄지공주'란 작품을 만들면서 데즈카 사단과 같이 일해봤는데 그러면서 "리미티드 애니메이션도 괜찮은 것 같다." 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콘티를 그리는 법도 데즈카 사단 연출 팀이 만드는 걸 보고 "아 이렇게 만드는 거구나." 라는 감을 얻었다고 한다.

그래서 카메라 워크도 잘 움직이지 않으며, 캐릭터의 움직임도 적은 작품이 많다. 사이보그 009 때는 작화를 너무 아껴서 원작자 이시노모리 쇼타로가 마음에 안 든다고 화를 냈었다고 한다. 스즈키 슌지도 세리카와가 작화 매수를 너무 아껴서 애니메이터로서 오히려 일하기 힘들었다고 하기도. 작화를 아끼느라 캐릭터가 이동하는 걸 슬라이드 쇼로 슥 나타나는 걸로 표현하기도 한다.[13] 세리카와의 작품은 오로치 퇴치[14]를 제외하면 작화는 기대하지 말고 연출을 중심으로 보는 것이 좋다.

디즈니 작품을 좋아한다는 본인 말대로 디즈니 작품 연출 오마주를 하기도 한다. 다만 작화 매수를 많이 쓴 오로치 퇴치를 제외하면 작화 매수를 많이 안 쓰는 세리카와의 다른 작품은 그거 때문에 느낌이 좀 다르다.[15]

평론가 오구로 유이치로는 "연출이라는 일이 무엇을 하는 것인지 확립한 분으로 일본 애니메이션 역사에 한 획을 그은 분인데 이상하게 다른 평론가나 업계인은 이분을 잘 언급하지 않는다." 라면서 세리카와의 연출력이 과소평가되었다고 평했다. 자신이 좀 재조명을 시켜보고 싶은데 세리카와는 이미 사망했고 워낙 자료가 없어서 못 하고 있다고 한다. 오구로는 기동전함 나데시코 게키강가를 만들 때 연출가와 애니메이터에게 "세리카와 유고와 카츠마타 토모하루의 연출을 오마주해서 만들어라." 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4. 인맥

자주 같이 작업했던 인물로는 카츠마타 토모하루가 있으며 같이 일하는 애니메이터는 아라키 신고[16], 이나노 요시노부, 각본가는 츠지 마사키[17]가 있다. 연출 제자로는 타카하타 이사오[18], 츠키오카 사다오[19] 가 있다.

모리 야스지는 은인이라고 한다. 장난꾸러기 왕자의 오로치 퇴치를 만들 때 첫째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죽어서 정신이 이상해졌는데 모리 야스지가 격려해줘서 제정신을 찾았다고 한다.

연출가 및 애니메이터 야나기사와 테츠야, 하바라 노부요시, 오치 카즈히로가 존경하는 인물이라고 한다.

5. 작품

5.1. 감독

5.2. 참여작



[1] 도카이도 요츠야 괴담이라던가 지옥 같은 괴담 호러 시대극 영화로 유명한 감독이다. 후루하시 카즈히로가 존경하는 영화 감독이다. [2] 이 당시 영화계 쇠퇴에 맞물려 애니메이션계로 이적한 영화 꿈나무들이 많았는데, 대표적으로 카츠마타 토모하루, 토미노 요시유키가 있었다. [3] 영화나 드라마 쪽은 감독이 콘티를 하고 조감독은 주로 잡일을 한다. 하지만 애니메이션은 조감독에 해당하는 '연출' 직책의 사람들이 콘티를 하는 것이 오늘날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4] 실제로 이 때 작화감독 제도를 처음으로 도입해서 이후 애니메이션 제작공정의 표준이 된다. [5] 캐릭터의 연기가 과장되었다는 것. [6] 세리카와 말로는 이런 모성이 강한 헌신적인 여성 캐릭터는 헤르만 헤세 작품에서 따오는 것이라고 한다. [7] 이건 그냥 개인 세리카와 개인 취향이라고 한다. [8] 실제로 세일러 문의 작가 타케우치 나오코 마법소녀 메구짱 등 세리카와 유고의 작품을 매우 좋아했다고 하며 세일러문에서 오마주하기도 했다.. [9] 타카하타도 말괄량이 소녀 연출 전문이었다. [10] 다만 아라키 신고 말로는 세리카와가 스틱맨이긴 했어도 원본 콘티를 줘서 그걸 참고로 그린 것이라고 한다. [11] 그래서 오구로 유이치로는 세리카와가 각본을 한 에피소드도 연출색이 있다며 각본을 한 에피소드도 보는 게 좋다고 평했다. [12] 남녀의 사랑을 넘어 자애도 추구. [13] 이러면 움직이는 과정을 안 그려도 되고 그림 한 장을 이동시키면 끝난다. [14] 이건 작화가 디즈니급이란 소리를 듣는 작품이다. [15] 디즈니는 작화 매수를 굉장히 많이 쓰는 회사로 유명하다. [16] 아라키 신고가 세리카와의 콘티도 대신 그려주며 세리카와의 콘티를 해독하는 능력이 뛰어나 아라키가 작화감독을 하면 세리카와의 연출이 한층 더 극적으로 변한다. [17] 특히 츠지 마사키 각본, 세리카와 유고 연출인 에피소드는 명작이 나오기로 유명하다. 세리카와 본인도 사이보그 009 16화, 요술공주 샐리 60화 같은 건 츠지가 없으면 못 나왔을 작품이라고 극찬했다. [18] 세리카와 말로는 현장과 사람 관리하는 건 신인 시절부터 타카하타가 세리카와보다 잘 했다고 한다. 자신보다 한참 선배인 애니메이터에게도 논리적인 말로 맞대응해서 할 말이 없게 만들었다고. [19] 데즈카 오사무에게 "츠키오카는 애니메이션을 하기 위해 태어난 천재." 라고 들었지만 자신이 생각하기엔 그걸 넘어서 "애니메이션 속에서 현실로 온 사람"이라고 한다. 그 정도로 작화를 잘 한다고. 많은 도움을 받아서 츠키오카가 늑대소년 켄을 만들 땐 많이 도우며 연출도 알려줬다고 한다. [20] 야나기사와는 세리카와 연출 편을 보려고 아예 샐리 DVD 박스를 사버렸다고. [21] 당시 일본 사회에 만연하던 인종차별을 비판하는 내용. DVD 11권 표지가 이 에피소드이다. [22] 야나기사와의 감독 작품 건전로봇 다이미다라4화는 이 작품 2화 오마주이다. [23] 나가이 고도 자신의 자전만화 게키만에서 토에이에서 기획 회의할 때 이 작푸을 담당할 에이스라고 소개해서 만난 연출가가 세리카와 유고, 카츠마타 토모하루 두 사람이었다고 한다. [24] 어릴 때 아무 선입견 없이 마징가를 볼 때 "이 에피소드는 굉장하다." 라고 느낀 에피소드는 나이 먹고 알아보니 전부 세리카와 유고 연출편이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