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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14 01:13:34

샤를 드 로앙

<colbgcolor=#C4CFDA><colcolor=#000000> 수비즈 공
샤를 드 로앙
Charles de Rohan, Prince de Soubise
파일:800px-Charles_de_Rohan,_Prince_of_Soubise,_Marshal_of_France_-_Versailles_MV_1098.jpg
이름 샤를 드 로앙
(Charles de Rohan)
출생 1715년 7월 16일
프랑스 왕국 파리 베르사유 궁전
사망 1787년 7월 1일 (향년 71세)
프랑스 왕국 파리 오텔 드 수비즈
배우자 안 마리 루이즈 드 라 투르 도베르뉴
(1734년 결혼 / 1739년 사망)
사보이아의 안나 테레사
(1741년 결혼 / 1745년 사망)
헤센로텐부르크의 빅토리아 (1745년 결혼)
자녀 샤를로트, 빅투아르
아버지 수비즈 공 쥘 프랑수아 루이 드 로앙
어머니 안 쥘리 드 멜룬
형제 프랑수아 아르망 오귀스트, 마리 루이즈, 프랑수아 오귀스트, 르네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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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의 육군 원수이자 정치인. 일명 수비즈 공으로, 로앙-로앙의 공작이다. 처세술이 탁월해 마담 드 퐁파두르에게 신임받아 권세를 누렸으나 군사적 역량은 부족하여 7년 전쟁 시기 프랑스군이 졸전을 거듭하는 데 일조했다.

2. 생애

수비즈 공은 1715년 7월 16일 베르사유 궁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수비즈 공 쥘 프랑수아 루이 드 로앙은 왕립경호대 대령이었고 어머니는 안 쥘리 드 멜룬이다. 수비즈 공작은 루이 14세의 정부중 하나인 안 드 로앙 차보트의 손자이기도 했다. 1724년 그의 부모가 파리에서 천연두로 사망하자, 할아버지 에르큐르가 그의 양육을 맡았고 같은 나이의 루이 15세와 궁정에서 함께 자라며 친밀한 관계를 맺었다.

1732년, 수비즈 공은 근위 기병대 제1 부대에 입대한 후 루이 15세와 마담 드 퐁파두르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으며 빠르게 출세해 1733년 대위로 승진했고 1740년 1월 17일에 준장이 되었으며, 1743년엔 육군 소장이 되었다. 1745년 5월 11일, 수비즈 공은 루이 15세와 함께 퐁트누아 전투를 참관했고 1748년 1월 1일에 중장으로 진급했다. 1749년, 수비즈 공은 로베르발, 루이즈, 그리고 생제르망의 영지를 물려받았고 1751년엔 플랑드르와 에노의 총독 겸 릴의 주지사로 임명되었으며 1755년엔 국무장관에 선임되었다.

1757년 7년 전쟁이 발발한 후, 수비즈 공은 처음엔 프랑스군의 하노버 침공 작전에 가담하여 데스트레 백작 루이 샤를 세자르 르 텔리에의 지휘를 받다가 작센 탈환 작전에 투입될 2만 4천 명의 프랑스군의 지휘관으로 부임하여 작센-힐드부르크하우젠 공 요제프 프리드리히 빌헬름의 1만 명과 합세했다. 그러나 그는 로스바흐 전투에서 지리멸렬한 지휘력으로 일관하다가 참패당하고 부상을 입은 채 본국으로 도주했다. 하지만 그는 퐁파두르 부인의 후원을 받았기 때문에 이 패배에 대해 별다른 책임을 지지 않았다.

1758년 7월 23일, 수비즈 공의 군단의 선봉장인 브로이 공작 빅토르 프랑수아 잔더스하우젠 전투에서 헤센군을 격파했다. 이후 1758년 10월 10일, 수비즈 공은 1차 루텐베르크 전투에서 38,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14,000명의 연합군과 맞붙어 적병 3,000~4,000명을 사상시키고 800명을 포로로 생포하는 승전을 거두었다.(프랑스군의 사상자는 600명.) 비록 적보다 3배 가량의 전력으로 밀어붙여서 얻어낸 성과이긴 했지만 로스바흐 전투의 패전으로 인한 불명예를 어느정도 떨쳐낼 수 있었고, 루이 15세는 그의 공로를 치하하며 원수 직책을 부여했다.

1761년, 수비즈 공은 약 11만 명으로 구성된 라인강 일대의 프랑스 군대 총지휘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7월 16일 빌링하우젠 전투에서 브로이 공작과 연계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고 전황 파악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바람에 독단적으로 철수해버려 브로이 공작이 적군에게 고전하다가 끝내 큰 피해를 입고 패주하게 만드는 실책을 범하고 말았다. 이후 그는 패배의 책임을 공격 개시일로 정해놓은 일자보다 하루 먼저 공격한 브로이 공작에게 떠넘겼고, 브로이 공작은 이에 맞서 시종일관 소극적인 태도를 보인 수비즈 공작을 비난했다.

1762년 6월 24일, 수비즈 공은 빌헴스타흘 전투에서 7만 명의 병력을 확보하고 있으면서도 그보다 적은 5만의 군세로 급습해온 연합군을 두려워해 제대로 싸워보지도 않고 퇴각해버렸다. 프랑스 정부는 군대의 이러한 추태에 더이상 연합군과 맞설 전의를 상실해 파리에서 평화 협약을 체결한다. 그러나 퐁파두르 부인을 등에 업고 루이 15세의 신임을 받는 그는 이러한 실책을 저질렀음에도 별다른 처벌을 받지 않았다.

7년 전쟁 후, 수비즈 공은 궁정인으로서 파리에서 유행을 이끌어가는 선두주자가 되었다. 그는 매우 방탕한 삶을 살았고 값비싼 보석들을 마구 구매하는 등 심한 사치를 부려 세인들의 지탄을 받았지만 퐁파두르 부인의 뒤를 이어 루이 15세의 총애를 받은 애첩 뒤바리 부인으로부터 호의를 샀기에 어느 누구도 그를 탄핵하지 못했다. 1774년 루이 15세가 사망한 후에도 그의 권세는 이어져 루이 16세로부터 국무장관에 임명되었다, 유복한 삶을 살다가 1787년 7월 4일 파리에서 사망했다. 아들은 일찍 죽었고, 딸만 둘 있었기 때문에, 사위가 그의 작위와 재산을 물려받았다.

여담으로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기 사건의 그 로앙 추기경과는 같은 로앙 가문이기는 하지만 분가부터 다른 먼 친척이다. 다만 통혼으로 이어져있고, 나름 파리 사교계의 거물들이었기 때문에 서로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좀 더 정확히는 로앙 추기경이 샤를 드 로앙의 사돈의 동생, 즉 2촌이니 사돈의 팔촌보다는 그럭저럭 가깝다. 하지만 샤를 드 로앙이 전쟁 당시 오스트리아와의 연합군을 이끌었던 궁정의 권력자이자 인기인인 반면, 로앙 추기경은 원래 반 오스트리아 파로 활동한 경력이 있어서 프랑스 궁정에서 인기가 없었다. 이를 뒤집어보려고 오스트리아 공주 출신인 마리 앙트와네트에게 접근하려던 시도가 바로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기 사건이다.